건방진 방랑자
[박동섭] 내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 3. 증여의 의미를 고찰해 보았을 때 부각되는 것들 본문
미래의 직인을 위한 석공일을 하던 석공
졸업논문의 최종수익자는 내가 아닌 모든 것
학술연구란 집합적인 일이다
나의 연구활동은 ‘end-user’가 아닌, ‘pass-user’일 뿐
모스의 증여론 1 - 마오리족의 하우에 대해
모스의 증여론 2 - 답례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길 때, 비로소 선물이 된다
레비스트로스의 커뮤니케이션론 1 - 답례는 다른 대상에게 하는 것
레비스트로스의 커뮤니케이션론 2 - ‘근친상간 금지’가 사회를 시작시켰다
레비스트로스의 커뮤니케이션론 3 - 침묵교역은 가치를 알 수 없는 것으로 유지된다
착각할 수 있는 능력
고맙습니다라는 말로 증여는 시작된다
증여는 주체적인 행위가 아니다
증여라는 감각은 시간과 함께 시간 속에서 배양되는 것이다
3. 증여의 의미를 고찰해 보았을 때 부각되는 것들
타자로부터 증여받은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증여의 사이클이 기동하기 위한 필수적인 혹은 사활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을 봐도 “이것은 혹시 나 앞으로 온 혹은 나를 위한 선물이 아닐까?”하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착각할 수 있는 능력
침묵교역이 시작된 그 기원의 순간을 잠시 상상해 보기로 하자.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경계선 근처에 ‘뭔가 처음 보는 물건’이 놓여 있다. 인공물이라도 좋고 자연물이라도 좋다. 어쨌든 ‘보통은 거기에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을 다른 부족으로부터 온 ‘선물’이라고 생각한 것으로부터 침묵교역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것을 ‘선물’이라고 생각한 것은 혹여 순전히 나의 지레짐작일지도 모른다. 다른 부족 사람이 필요 없다고 판단하여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바람과 물에 실려서 혹은 다른 동물이 물고 온 것이 거기에 굴러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을 위한 선물이 아닐까’하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답례의무를 느꼈다.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가치 있는 것’이 먼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이것을 증여하자’라는 애타적인 의도가 먼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우연히 손에 넣은 것을 ‘나를 위한 선물’이라고 간주(혹은 착각)하고 그것에 대한 답례의무를 느낀 사람이 출현함에 따라서 증여 사이클은 기동하였다. 인간적 제도의 기원에 있는 것은 “이것은 나를 위한 선물이다”라는 ‘일방적인 선언’이다. 그 선언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이 만든 여러 제도들을 기초 짓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적으로 말하자면 뭔가를 봤을 때 근거도 없이 “이것은 나를 위한 선물이다”고 선언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켜 ‘인간성’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오즈야스지로는 커뮤케이션만을 거의 그것만을 주제로 해서 영화를 계속 만들었다. 일본 사회의 한쪽구석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널리고 널린 사건을 담담하게 그려낸 오스야스지로의 작품이 사후 반세기를 훨씬 지나도 세계적인 인기와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오스야스지로가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스야스지로의 또 다른 작품인『안녕하세요お早う』(1959)에 다음과 같은 인상 깊은 신이 있다.
『안녕하세요お早う』에서는 아이들이 ‘방귀로 커뮤니케이션하는’ 에피소드가 반복해서 나온다. 이마를 누르면 ‘뿌’하고 방귀로 대답하는 놀이가 아이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었다. 호출과 응답 콘텐츠가 없는 순수한 커뮤니케이션의 게임이다.
善이라는 아이는 이 방귀 커뮤니케이션의 명인으로 아이들 사이에서는 영웅이다. 善의 아버지는 더 관록이 붙은 ‘방귀의 달인’이다. 평소에 출근 전에 옷을 입으면서 뿡뿡 방귀를 끼는 것이 다반사이다. 그런데 부엌일을 하고 있던 그의 아내가 그것에 반응해서 거실에 모습을 드러내고 “당신 불렀어요?”라고 말한다. 남편은 “아니”하고 대답한다. 다시 방귀, 다시 아내가 부엌에서 나와서 “뭐라고?”라고 묻는다. 그러자 남편은 “오늘 OOO에 가는데 갈분떡이라도 사올까?”하고 아내를 신경 써주는 말을 한다. 그 상냥한 말에 아내는 미소 지으면서 “응 사와 줘요. 아 정말 좋은 날씨!”하고 남편의 근로의 하루에 축복을 보낸다. 이 장면은 일견 코믹한 상황설정으로 볼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장면이야말로 ‘증여’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정말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이 아무 생각 없이 발신한 ‘방귀’를 자신에게 보낸 메시지로 오해하고, 그것에 두 번 진지하게 응답한 ‘공적’에 의해서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자신을 배려하는 마음을 이끌어 낸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침묵교역의 원점에서 이루어진 것을 드라마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의미하게 놓인 것을 자신을 위한 혹은 자신 앞으로 온 메시지, 자신을 위한 선물이라고 착각한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이 반대급무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함으로써 거기에 커뮤니케이션의 회로가 열린다. 마찬가지로 무의미하고 우연히 만들어진 음향(방귀)을 ‘자신을 부르는 소리’라고 잘못 알아들은 사람에 의해서 세계는 비로소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고맙습니다라는 말로 증여는 시작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세계를 의미로 채우고 세계에 새로운 인간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인간에게만 갖추어진, 즉 어떠한 것이라도 자신을 위한 선물(증여)이라고 착각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이처럼 인간들의 세계를 성립시키고 있는 것은 “고맙습니다”라는 언어를 발하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원사실이다. 가치의 생성은 그것보다도 전으로는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 “고맙습니다”라는 증여에 대한 답례의 말. 그것만이 물건의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다.
치사율 99%의 바이러스의 창궐로 인해 인류최후의 한 명이 된 사람을 상상해 보기로 하자. 그는 더 이상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가 우주의 신비를 해명하는 최종정리定理를 발견해도 불로불사의 비약을 발명해도 그것에 대해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해 줄 사람이 단 한명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가치 있는 것은 그래도 존재한다. 선인들이 그를 위해 남겨 둔 것, 즉 주거와 식량과 책과 음악과 총기와 약에 대해서 라고 하면 그는 “고맙습니다” 라고 중얼거릴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죽음을 맞이하였을 때, 아무도 들어 줄 사람이 없는데도 미약한 목소리로 “고맙습니다”라고 중얼거릴 때 인류의 전역사는 ‘가치 있는 것’으로서 누구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기억 속으로 봉인되게 된다. 인류최후의 사람이 중얼거리는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창세기의 모두에 나오는 조물주의 “빛이 있어라!”와 똑같은 정도로 아니 그것 이상으로 가치생성적인 것이다.
침묵교역의 기원으로부터 인류 최후까지 이런 저런 상상력을 구사해서 ‘증여’에 대해서 한 발 더 들어간 고찰을 해봤는데, 그것은 ‘물건 그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을 위한 선물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가치를 창조한다는 공리를 공유하는 것이다.
증여는 주체적인 행위가 아니다
증여라는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반대급부’를 가리킨다. 이미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답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부채감을 못 이겨서 수행하는 행위가 바로 증여이다. 그래서 한가하기도 하고 돈도 제법 있으니까 “이번 기회에 증여라도 한 번 해볼까”라는 식으로 증여가 시작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증여는 ‘자기’를 기원으로 하는 주체적인 행위가 아니다. 증여는 그것 자체 ‘이미 증여를 받은 것의 결과’이다.
증여에 관해서 우리가 빠지기 쉬운 오류는 아량이 있는 사람이라든지 박애주의로 가득한 사람이라든지 자유의지에 기초해서 증여가 시작된다는 발상이다. 그런데 증여라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앗 어떻게 하다 보니까 증여를 받았다. 빨리 반대급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느낀 사람이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증여는 ‘하고 싶다/하고 싶지 않다’ 라든지 ‘할 수 있다/할 수 없다’와 같은 틀에서 논의되어야 할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의지 같은 것 아무도 묻지 않기 때문에. 당신의 박애주의적 경향이라든지 정기예금의 통장 잔고라든지 그런 것 아무도 묻지 않기 때문에. 당신의 인간성이 어떻든지 그리고 지금 갖고 있는 자원에 얼마큼 여유가 있는지 그런 것은 증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당신이 “이미 증여를 받았다”라고 느끼는지 아닌지 그것만이 문제이다. 따라서 증여를 받은 계기는 무엇이든지 상관없다. “증여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출현에 의해서 증여가 사후적으로 ‘있었던 것’이 되게 된다.
증여는 신앙의 시작과도 똑같다.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출현에 의해서 ‘신’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진 것이다.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세계에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피조물들 중 누군가가 “아 나라는 존재는 누군가에게 창조되었다”라고 생각할 때 신은 비로소 존재한다. 그때까지는 ‘창조’라는 개념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증여는 “나는 증여하였다”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증여를 받았다”라고 생각한 사람의 출현에 의해서 생성되는 것이다.
증여라는 감각은 시간과 함께 시간 속에서 배양되는 것이다
우치다(2015)는 자신이 21년 동안 근무한 고베여학원대학神戸女学院大学의 교사校舍를 건축한 건축가 윌리엄 메럴 보리스William Merrell Vories의 건축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이전 경영 컨설턴트일을 하던 사람이 우리 대학을 방문해서 보리스가 설계하고 건축한 대학 건물을 가리키면서 “건축한지 60년 이상 된 건물은 가치가 없습니다. 이런 건물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시궁창에 돈을 버리는 것과 똑같습니다.”고 단언한 것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건물에 대한 평가를 토지의 평당 단가와 비용 대 효과 등 수치적 외형적 근거로만 내릴 수 있다고 본 그 사람의 정신의 빈곤함에 아연실색하고 말았습니다.
보리스는 “교사(校舍)가 사람을 만든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이 말을 사람이 지내기에 편한 건물이면 교육효과가 올라간다는 정도의 의미로 보통은 해석하겠지만, 저는 오랫동안 그 건물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도중에 “앗 이것은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교사가 사람들 만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보리스의 교사에는 ‘숨겨진 방’ 이라든지 ‘숨겨진 화장실’이라든지 어땠든 좁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에 ‘숨겨진 OO’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입생은 쉽게 그 전체상을 파악할 수 없도록 건물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여기저기에 수수께끼가 숨겨져 있어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움푹한 곳과 문이 아주 많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에 공통적으로 있는 것은 스스로 문손잡이를 돌려서 방에 들어가 보면 계단이 나오고, 계단을 오르면 복도 끝가지 가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반드시 ‘다음 방으로 통하는 문’ 아니면 ‘창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창문으로부터 ‘그 창문 이외의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 펼쳐집니다. 즉 그 동안 학생이 학교를 다니면서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조망과 풍경이 자신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호기심에 이끌려서 교사의 어두운 곳을 헤맨 학생은 그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서 ‘다른 누구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을 누릴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을 ‘배움의 비유’라고 말하지 않고 뭐라고 말해야 될까요?(內田. 2015: 241-242)
보리스의 건축물에 대한 우치다의 해석은 본 연구의 주제인 ‘증여’라는 감각이 시간 속에서 배양되는 것임을 일깨워주는데 상당히 참고할 만한 관점이다. 고베여학원대학의 건축물을 지은 건축가 보리스는 100여 년 전에 대학의 교사校舍를 만들 때 ‘교사가 사람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건물을 지었다. 그가 만든 건물의 철학은 호기심에 이끌려서 ‘스스로 문손잡이를 돌린 자만이’ 어떤 선물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그 문손잡이를 돌리기 전에는 문 저쪽에 무엇이 있는지 예상치도 못한 상태에서 문을 열고 난 후 그 동안 자신이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풍경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앗 이것은 뭔지는 아직 그 실체를 잘 모르겠지만, 혹여 보리스가 100여 년 전에 나를 위해 만들어 놓은 ‘배움이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선물이 아닐까?”를 어렴풋이 느끼는 순간 증여는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100여 년이라는 시간을 사이에 두고 서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이 건축물을 매개로 만나게 됨으로써 수증자受贈者인 학생의 “앗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증여는 그 본질적인 의미에서 증여로서 작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리스는 이 학생의 ‘고맙습니다’라는 감사의 말을 통해서 사후적으로 증여자가 되는 것이다.
‘천부의 재능’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개인의 노력여하에 따라서 어떻게 될 수 있는 재능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하늘이 나에게 준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이러한 ‘천부의 재능’을 증여의 관점에서 본다면 내가 그 재능을 발휘한 것을 통해서 얻은 이익은 ‘사유물’이 아니다. 그래서 뭔가 답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 그것은 ‘증여자에게 직접 등가의 물건으로 답례하는’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일단 상대는 ‘하늘’이기 때문에 돌려주려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증여에서 ‘처음으로 증여한 사람은 어떠한 답례에 의해서도 그것을 상쇄할 수 없는 절대적 채권자이다’는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에서 처음으로 증여한 인간이 가장 훌륭하다. 그 ‘최초의 일격’은 어떠한 답례를 하더라도 상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답례의무는 ‘증여자’에 대해서 책무의 상쇄를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해도 상관은 없지만 ‘증여를 처음으로 시작했다’는 그 사실은 어떠한 답례에 의해서도 상쇄할 수 없기 때문에 해도 무의미한 것이다.
이 수증자 혹은 피증여자가 증여자에 대해서 느끼는 부책감은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의 ‘증여자’로 구축함으로써만 상쇄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자신이 새로운 증여 사이클의 창시자가 되었을 때야 비로소 부책감은 그 절박함이 완화된다. 그렇게 해서 증여는 도미노가 넘어가듯이 최초의 한 명이 시작하면 그 다음은 무한으로 연쇄되어가는 프로세스이다.
재능은 일종의 선물이다. 그것에 대한 반대급무의무는 그 선물이 가져온 이익을 다른 누군가를 향해서 어떠한 대가도 구하지 않는 순수 증여로서 제공함으로써 밖에 달성되지 않는다.
증여론에서 모스가 쓰고 있듯이 선물이 가져온 이득을 자신이 독점하면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나고 죽는다.’ 이것은 모스가 특별히 주술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간성이 그렇게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다운 행위를 게을리 하면 ‘인간적으로 나쁜 일이 일어나고 인간적으로 죽는’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고 무병장수를 하더라도 ‘인간적으로는 죽는’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증여라는 감각은 보리스의 건축물의 예가 보여주듯이 증여-반대급무의무-증여-반대급무의무의 반복을 통해서 시간과 함께 시간 속에서 배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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