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방랑자
멋진 하루 - 누가 뭐랬어 그냥 찾아와도 돼~ 본문
비가 내렸다. 아침엔 집에서 나가지 않았으니 왔다고 할 순 없겠지. 그냥 바닥 가득 빗방울이 고여있는 걸 보고서 비가 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때론 이렇게 바닥에 쭉 달라 붙어서 아무 생각도 없이 창가 너머를 내다보곤 한다. 예전엔 이게 그렇게 싫었다. 꼭 내 존재가 불필요한 존재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내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던 거다. 그런데 지금은 괜찮다. 내 스스로를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까. 편히 있고 싶을 땐 그걸 즐기자고. 비록 내가 지금은 장판과 물아일체 되어 있을지라도 그 자체가 즐거우면 그걸로 그만이다.
이런 날 영화 한 편 때려야 한다. 이미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었기에 대뜸 집어들었다. 바로 '멋진 하루'. '지금 이 나에게도 멋진 하루이듯이 영화에서도 그런 멋진 하루를 보여주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보았다. 잔잔하여 졸음이 온다는 평이 있긴 했지만, 요즘은 이런 영화들이 더 좋다. 잔잔하다는 건 우리의 삶의 일면일테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잔잔함을 참지 못하고 잔잔함 속에 풍지풍파를 일으킬 특별함을 바라며 산다. 일상은 지루함과 동의어니까. 하지만 그런 잔잔한 하루도 맘껏 즐길 수 있다면 그 안에서도 얼마나 많은 특별함들이 있는지.
영화는 참 잔잔했다. 하지만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이 영화는 앞으로 두고 두고 계속 보게 될 거 같다. 내 삶을 휘저을 만한 특별함은 없었지만, 그래서 흥분되는 쾌감은 없었지만 평이하게 파고드는 아련함이란. 보는 내내 지루함을 느낄 수 없었다. '멋진하루'란 제목이 처음엔 영화의 내용과는 반대되는 내용이었다. 이준익 감독의 '즐거운 인생'처럼 결코 즐겁지 않은 인생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용과 제목이 일치하는 순간이 오더라. 진정 멋진 하루였다. 그래서 두고 두고 잊혀지지 않을 그런 하루.
희수는 병운을 찾아 간다. 자신이 헤어지자고 해서 헤어진 사람이다. 다시 보고 싶다고 해서 무작정 찾아가기엔 면목이 없다. 찾아 가서 '보고 싶어 왔다'고 하기엔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어처구니 없으니까. 그래서 생각해낸 게 빌려준 350만원을 받겠다는 핑계였던 거다.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도 나름대로 합리화를 했으니 그 만남이 어색할 리는 없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스스로를 이해시킨 한계일 뿐이다. 병운은 그런 희수를 전혀 뜻밖이라는 듯 쳐다봤고 그 돈을 만들러 찾아가는 사람마다 그 합리화를 여지없이 깨부수어 주었으니까. 그 중 가장 큰 기여를 한 인물은 '쎄미'이지 않나 싶다. 아주 대놓고 그 어이없는 합리화를 비난하고 나서니까.
희수는 그런 순간들을 지나며 조금씩 다시 깨닫는다. 더이상 자신을 속일 필요가 없음도, 자신의 감정이 어떠 하다는 것도. 희수와 병운의 관계가 좀더 가까워졌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 있다. 희수는 견인된 자동차를 빨리 찾으려 뛰어서 지하철을 타려 한다. 하지만 병운은 힘에 겨워하며 뒤처졌고 결국 그런 병운 때문에 지하철을 놓치게 된다. 영화 초반의 희수였으면 분명히 톡 쏘아 붙였을 거다. 나도 당연히 그런 희수의 반응을 기대했다. 그런데 이게 웬 걸?? 화를 내긴 커녕 다리를 절뚝 거리며 오는 병운을 걱정하는 게 아닌가~ 놀랍다!!!!! 둘 사이에 어느덧 조금씩 소통이 일어나고 있는 거였다. 그런데 그 역 이름이 하필 '新設洞'이다. 신설이라, 무언가를 새롭게 지어낸다는 뜻이다. 둘 사이에 묵힌 감정이나 스스로 지식이란 이름으로 합리화하기에 바빴던 것들을 다 걷어내고 새롭게 만들어 간다는 뜻이다. 어느 정도 이제 자신의 감정을 알고 솔직하게 되었음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보고 싶으면 그냥 그 마음만 가지고 오면 된다. 제발 그렇게 맘껏 마음에 충실하며 살 수 있기를. 여러 생각들로 합리화할 필요도 없이 그렇게 진심만이 흘러 넘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게 무시 된대도 좋다. 어쨌든 나에겐 솔직하였으니 그걸로 괜찮다. 그렇게 나를 배반하지 않을 때, 남에게도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알찬 내가 될 테니까. 멋진 하루는 나를 찾아가는 하루였던 셈이다, 나를 알아가는 하루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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