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방랑자
호모부커스2.0 - 2. 편집후기 본문
그린비에서 호모 부커스 2.0 프로젝트를 한창 진행하고 있었던 2008년 10월, 저는 다른 회사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린비로 날아가느냐 마느냐를 두고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었을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변명입니다만 그래서, 전 이런 프로젝트가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제 코가 석 자였으니까요(-_-;). 어쨌든 전 그린비로 날아왔고 어쩌다 보니 『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2.0』의 편집을 맡게 되었습니다. 작업을 하면서 문득 든, 부질없는 생각, “나도 (원고를) 내 볼걸 그랬네. 후훗”. 그리하야 원고 공모 기간은 지났건 말건, 심사도 다 끝나고 책도 나왔건 말건, 주제는 뭐였건 말건 편집 후기를 대신해서 저의 부실한 독서간증 시간을 한번 가져 볼까 합니다(책 나올 때마다 쓰는 편집 후긴데 한 번 정도 삼천포로 빠지는 건 괜찮겠죠?).
전 컨츄리 걸이랍니다. 제 남친은 아직도 저희 집에 놀러왔을 때 제가 해 준 별미를 잊지 못합니다. 전 한 손에는 남친 손을, 다른 한 손에는 빈 페트병을 쥐고 집 근처 논으로 가서 메뚜기를 잡았죠. 그러고는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소금까지 잘 쳐서 볶아 주었는데 이 도회적인 양반은 먹질 못 하더군요. 흠흠, 이야기가 좀 돌았지만 시골 소녀에 대한 예시를 든 거랍니다. 예나 지금이나 차상위계층도 될까 말까한 저희 집에는 비디오도 없었고(고2 때 돼서야 엄마가 EBS 보라고 들여 놨습니다--), 게임기도 없었고(그래서 제가 게임에 집착합니다. 한이 돼서…), TV는 오로지 정규 방송(물론 낮 시간에는 유선방송이라고 해서 재방송이 나오긴 했습니다만…), 비디오도 없는데 컴퓨터라고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놀 거리가 마땅치 않으니 애꿎은 동식물만 시골 소녀의 손에 유명을 달리했더랬습니다. 그런 것도 시들해지면 겨우 책을 집어 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계몽사 소년소녀세계문학집이었습니다(고경은 님의 「책은 왜 읽는가-나의 오래된 습관일 뿐」에 나오는 “모 출판사의 빨간 세계명작 소설집”이 요게 아닐까 합니다). 그것도 저희 엄마가 한물 간 거 얻어다 준 겁니다. 원래 50권짜린데 반 정도만 있었던 것 같네요. 벽에 등을 붙이고 무릎을 세워서 독서대를 만들고 책을 읽던 어느 날, 저희 아빠가 저에게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우리 봉식어멈(가명)은 책 읽을 때가 제일 예쁘더라.”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었습니다. 인물도 없는 데다 한마디 하면 두세 마디 더 토를 달고, 수틀리면 악악거리기나 하는 딸이 입 다물고 책을 보는데 당연히 예쁠 수밖에요. 하지만 어리고 순진했던 저는 그 말을 다큐로 받아들였고 책을 읽으면 칭찬을 받는다는 삶의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저의 책읽기는 이렇게 처세의 방편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책 읽는 자유에 빠져」를 써 주신 이종환 님처럼 우연히 책 한 권을 읽고 거기에서부터 책읽기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어 저는 책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중학교,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는 더 심해졌습니다. 어찌나 책들을 안 읽던지 저처럼 쉬는 시간이고 점심시간이고 책을 붙들고 있는 아이는 금방 눈에 띄기 마련이었지요. 게다가 저처럼 공부도 어중간하고, 뭐 딱히 잘 하는 것도 없고, 날라리가 될 자신도 없는 아이가 캐릭터를 굳히기에는 책만큼 좋은 소품이 없었습니다. 「악마는 책을 읽는다」의 이지현 님처럼 책을 읽으면 ‘있어 보인다’라는 것을 일찌감치 감잡은 것이지요. 봉식어멈 하면 ‘아, 책 좋아하는 애’ 요렇게 튀어나왔죠, 후후.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말을 이럴 때 써도 될지는 모르겠사오나 소설 『외딴방』을 읽던 어느 날, 전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헤겔을 읽는 아이가 있다. 급장이며 내 오른편으로 짝이 되는 미서.
그 애는 등교를 해서도 헤겔을 펼쳐들고, 쉬는 시간에도 책상 밑에 넣어두었던
헤겔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읽는다.
열일곱의 나, 미서가 교무실에 갔을 때 그 애가 읽던 페이지를 펼쳐본다.
그 애가 연필로 줄을 그어놓은 부분을 읽는다.
이해가 되질 않아 한 번 더 읽는다.
그래도 나는 그 뜻을 모르겠다.
(…중략…)
"무슨 말인지 모른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읽을 수가 있어?"
미서는 책상 밑에서 헤겔을 꺼내 책가방에 넣는다.
"상관 마."
미서는 별일이라는 듯 책가방을 들고 홱 나가버린다.
오랜 후, 열일곱의 나와 친해진 미서가 헤겔에 대해서 말한다.
이 책을 읽고 있을 때만 내가 너희들하고 다른 것 같아.
나는 너희들이 싫어.
▲ 스타프 아돌프 헤닝 作 <독서하는 소녀>
_ 컨츄리 걸이 다소곳하게 예뻐지는 순간. "이 책을 읽고 있을 때만 내가 너희들하고 다른 것 같아." 이런 오만방자한 책읽기조차 무용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아, 내가 얘였구나. 이해도 못하는 책을 펼쳐놓고는 ‘난 너희랑 다르단다’ 하고 있던. 「우물 안 개구리가 드넓은 바다를 꿈꾸다」를 써 주신 곽동운 님의 표현처럼 “오만방자한 책읽기”를 하고 있었던 셈이죠. 하지만 처세와 자기 연출 도구였음에도 불구하고 책읽기가 아주 무용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즐거웠습니다.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면서 옛날이야기에 아주 짜게 굴었던 할머니가 안 해주시는 옛날이야기를 읽는 것도 좋았고, 할머니가 안 해주면 내가 한다, 하면서 할머니한테 「양반전」이나 「봄봄」을 읽어 드렸을 때 파안대소하시던 할머니를 보는 것도 좋았습니다. 뉴스나 신문을 보면서 알아듣는 게 늘어가는 것도 괜찮은 기분이었고, 다큐멘터리를 재밌게 보기 시작한 것도 책 덕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 (동생을 포함해서) 사람을 때리는 것은 나쁜 일이라는 것을 안 것도(물론 아직도 실천이 잘 안 되긴 합니다. 흠흠)…….
의도는 불순했으나 결과적으로 책읽기는 저에게 참 많은 것들을 ‘득템’하게 한 것 같습니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읽으면서 정신과 상담을 받는 주인공에 저를 대입시켜서 ‘아, 요로요로한 사건 때문에 내가 요 모양이 되었고나’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말입니다(「책 더미 속 공개 토론회」의 원종윤 님처럼 능동적인 호보 부커스였다면 프로이트나 융을 ‘알아서’ 찾아 읽었을 텐데 어려운 책을 못 읽는 저는 그냥 이 책을 여러 번 읽었습니다. 흑). 특히 연구 대상이었던 저희 아빠 속에 있는, 사람들 속에 누구나 존재한다는 그 아이가 엄청 떼쟁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아빠한테 ‘쫌’ 친절(?)해진 것도 제 인생에서는 정말 큰 수확이었지요. 또 단골 서점에서 1년간 책방 아가씨로 일하면서 책 읽는 다소곳한 모습과 기꺼이 자신의 책을 빌려주는 싹싹함으로 남자친구도 꿰찼구요. 게다가 청년 실업이 120만 명에 육박하는 이때 무려 ‘그린비’에서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또 『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2.0』을 통해 생활 속의 책읽기 달인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생생하게 만날 수 있었구요.
예비 한문선생님이신 이종환 님이 책은 “반완성품”이란 말씀을 하셨는데 제가 또 깜짝 놀랐습니다. 책을 만드는 저는 원고를 받아서 편집 과정을 거쳐서 ‘책 상태’로 만들어지면 그것이 책의 완성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손 털었다, 이거죠-_-;). 하지만 이번 작업을 통해서 책은 읽기를 통해서 독자를 호모 부커스로 변화시키는 그때에야 완성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부끄럽지만 책 사 주는 독자가 장땡, 이었던 저의 독자관도 『부커스 2.0』작업을 통해 바뀌었구요. 어디선가 끊임없이 책읽기를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호모 부커스들이 있기에 책은 정말 ‘잘’ 만들어야 한다고 제 자신을 단도리(저 요즘 일본어 공부해요^^;)하였습니다. 하여, 오늘도 책의 완성도를 높여 주고 계신 사방팔방의 호모 부커스 여러분들, 이 자리를 빌려 감사 인사 올립니다. 요것으로 후기 시마이합니다.^^
- 편집부 봉식어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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