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방랑자
개풍관의 교육실험 - 0. 녹취록 본문
1. 소비자마인드가 망친 교육을 개풍관에서 살리다
Q: 개풍관凱風館이란 무도관을 만든 이유?
심신단련의 공간으로서의 무도관
개풍관을 만들기 전에 공립 체육관을 빌려 합기도를 했다. 체육관은 시설이 좋지만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공기가 별로 좋지 않았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점이다. 합기도는 전신감각을 사용하는 운동으로, 공기의 청결정도가 무척이나 중요하다. 왜냐 하면 합기도는 불교명상과 비슷하여, 오감을 민감하게 해야 하기 때문에 보는 것, 듣는 것, 만지는 것, 맡는 것, 들리는 것이 자극적이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합기도의 기본 원리이며 학교나 절, 도장 같은 곳은 저자극적인 공간이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합기도는 서서하는 운동이라 다다미의 촉감이 대단히 중요하다. 단지 걷는다는 느낌이 아니라 굴러간다는 느낌, 다다미와 하나가 된 느낌이 필요하다. 다다미가 끈적끈적해선 안 되며 항상 깨끗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악취가 난다던지, 소리가 난다던지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로 무도관은 종교시설이자 교육시설이라 할 수 있다.
종교의 장소로서의 무도관
공립체육관은 종교적인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일본은 법적으로 ‘모든 공공시설에선 종교적인 행사를 행해선 안 된다’는 게 명문화되어 있다.
보통 ‘깨닫는다’, ‘頓悟漸修’와 같은 말은 종교적인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무도라는 게 흔히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신적인 것과의 마주침을 말한다. 인간이 도저히 낼 수 없는 힘 같은 것을 자연으로부터 빌려와서 나의 육체를 통해 현현해 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칼이 아무리 날카롭다고 해도 철로 만든 갑옷을 밴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옛이야기를 듣다보면 ‘칼로 갑옷을 뚫었다’는 이야기는 쉽게 들을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의 힘을 넘어선 초인적인 힘이 바로 자연으로부터 빌려온 힘이라 할 수 있고, 그게 곧 무도라는 것이다.
‘修業’이란 단어의 修는 ‘닦는다’는 뜻으로 파이프에 물이 들어가 흘러가듯 자연의 힘을 우리의 신체를 통해 흘려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나는 무도를 합니다’라고 하면 사람들은 “신체를 단련하고 있군요.”라고 하는데,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니다. 파이프는 물을 흘려보내는 게 목적이며, 가능한한 많은 물을 흘려보내야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파이프=몸’, ‘물=초월적인 의미’라고 도식화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무도는 반드시 초월적인 것과 연결될 수 있도록 모든 감각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공립체육관엔 그러한 초월적인 것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그런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체육관에 들어가자마자 신에게 예의를 차리는 것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체육관에서 마음가짐을 바로 잡고 신에게 예의를 차린다고 해도 공간 자체가 지닌 무종교성 때문에 한계는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개풍관을 만들어 신전화神殿化한 것이다. 이 곳 개풍관 벽면의 ‘합기도’라는 글씨는 미대 선생님이 이러한 기본 정신을 오롯이 담아 쓴 글씨로, 이런 영성적인 부분을 통해 도장 전체를 정화하는 것이다. 또한 이곳 다다미를 드러내면 강연장이 될 수도, 가부키나 능악을 위한 무대가 될 수도 있게 설계되어 있다.
Q: 현대 일반적인 일본 학교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1
초·중등교육의 획일화와 고등교육의 주식회사화
현재 일본의 가장 큰 문제는 인구감소다. 급격하게 아이들의 수가 줄어 학교에 들어오질 않으니, 학교를 통폐합하게 되고 먼 곳에 사는 아이들은 학교를 찾아 대도시로 집중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인구감소⇒학교 재학생수 감소⇒학교 통폐합⇒대도시인구 집중⇒교육의 획일화’라는 도식인 셈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교육의 다양성이 훼손되고 있는 것이다.
처음 보통학교에 생겼을 때만 해도 자연발생적으로 다양한 조건의 학교가 생겼지만, 지금은 문부과학성(한국의 교육부)이 학교를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한 가지 모습의 학교만 남게 되었다.
대학교 또한 마찬가지로 다양한 학교들이 있었는데, ‘대학교 정상화’란 그럴 듯한 말로 획일화시키고 있다. 즉, 대학교의 주식회사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인사권과 예산권 등의 모든 권한을 총장이 쥐고 있다. 총장의 권한이 막강해짐으로, 교수들의 이견이 있을 때엔 ‘의견을 한 번 들어볼 수는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 민주사회인양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옛날의 대학교수들은 독립적인 판단기준에 따른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교수회의에서 자기만의 스타일로 인사권과 예산권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사라진 것이다. 대학교는 주식회사가 되고 교수는 샐러리맨이 되고 말았다. 문부성은 학교에서 교사들이 모여 인사권에 대해 회의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처럼 일본의 대학을 비롯한 모든 교육기관이 이와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학교의 기업화와 그 영향
오사카에서 ‘교육기본조례’가 생겼다. 조례의 핵심은 교육감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고, 민간인 교장제도를 둔 것이다.
그 때 교장이 된 사람들은 교육자로서의 경험은 전혀 없지만 비즈니스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은 당연히 학교를 주식회사 시스템으로 바꾸기 시작했으며, 모든 것을 ‘Top Down 방식’으로 바꾸었고 모든 권한을 교장이 가지게 했다.
하지만 민간교장제는 대실패하고 말았다. 11명이 뽑혔는데, 그 중 6명이 그만두었던 것이다. 본인이 재미없어서 그만 둔 경우도 있지만, 학교돈을 횡령하거나, 스캔들 때문에 그만 둔 것이다. 예전엔 민간인 교장 제도를 실시해야 한다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그러한 상황을 겪으며 지금은 더 이상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학교를 기업화하자’는 얘기는 없어지지 않고 있다. 여전히 학교에 오는 아이들과 부모들을 소비자로 보는 것이다. 그건 곧 ‘학교=가게’, ‘교육활동=소비활동’으로 본다는 의미다. 고객으로부터 선택되지 않으면 사라져야 한다. 아이들과 부모들은 소비자가 된 기분으로 학교에 오게 되니, 클레임claim을 거는 것이다. 손님이 점원을 향해 이야기하는 어법으로 학부모는 선생님에게 이야기한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교육은 황폐화되어 가는 것이다.
소비자 마인드와 학력저하
좀 더 큰 문제는 학력의 극적인 저하다. 학생은 소비자이고 교사는 판매자이기에, 학교에서 배우는 교육 자체가 소비활동이 되는 것이다. 쇼핑이란 게 ‘저비용 고효율’을 기본 전제로 깔고 있다. 그렇다면 학교에서는 어떠한 화폐를 사용할까? 그건 바로 ‘학습노력’이란 화폐를 사용한다. 학습노력은 필기를 한다거나, 규칙을 지킨다거나, 선생님에게 높임말을 사용한다거나 하는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화폐가 되어 학교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유급 당하지 않고 패스만 할 수 있다면, 가능한한 교사에게 높임말을 쓰지 않으며, 가능한한 규칙을 지키지 않으며, 가능한한 학습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얻는 것이라 인식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바보스러운 짓이지만 이게 바로 소비자의 태도이며 소비자의 의무다. 학교에 시장원리를 도입하면 이와 같은 학습저하는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다.
내가 대학교수를 했을 때, “선생님 몇 점을 받아야 합격입니까?”, “몇 번까지 수업에 빠질 수 있습니까?”라고 학생이 물었고, 난 “60점 이상 받아야 패스합니다.”, “1/3이상 빠지면 안 됩니다.”라고 대답해줬다. 정말로 그 학생은 2/3만 출석하고 60점을 넘기 위해 공부했던 것이다. 최소한의 조건을 묻고 그에 따라 그만큼만 하려 한다. 아이들은 수업 계획표를 보는 순간 ‘최저가격’을 생각한다. “이 상품은 최저가격으로 사야만 해”라는 생각으로 최대한 노력하지 않고 목표한 것을 이루려 한다. 만원에 살 수 있는 것을 6만원에 샀다고 하면 바보처럼 느껴지는 것과 똑같다고 보면 된다. 지금 일본 아이들은 ‘내가 얼마나 공부하지 않고 졸업했는가?’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아무 것도 공부하지 않았지만 졸업했습니다’라는 말은 ‘싼 가격으로 좋은 물건을 샀습니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게 바로 소비자 마인드이고 소비자 마인드가 교육에 들어와 생긴 폐해다.
2. 교육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기
Q: 현대 일반적인 일본 학교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2
매스컴과 재계의 공격
예전엔 일본에도 전교조가 있었는데 30년간 미디어의 공격을 받으며 지금은 유명무실해졌다. 일본의 ‘대단한 능력’을 제대로 보여준 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학력이 떨어지면, 학생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미디어에선 그걸 모두 전교조의 탓으로 돌렸다. 그런 핍박을 받으며 한 때 90%의 조직률에 이르던 전교조는 이제 20%도 조직되지 않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재계로부터의 공격은 갈수록 심해졌다. 일본의 글로벌 기업은 ‘지금 바로 쓸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 하루에 15시간 일할 수 있고, 회사의 명령이 떨어지면 바로 해외로 날아갈 수 있는 사람을 ‘글로벌 인재’로 규정하며 그런 사람을 원한 것이다. 그런 재계의 요구를 문부성이 받아들여 대학에 그와 같은 인재를 육성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글로벌인재=일회용 인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제가 후퇴하는 시대에 접어들면서 종신고용은 사라졌다. 지금 대부분의 회사는 정년을 40세로 정하고 있다. 월급이 비싸기 때문에, 원가절감을 위해서 계속 새로운 멤버로 교체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기에 젊은이들은 보통 3년 정도만 일을 하면 이직해야만 한다. 더욱이 회사 오너 입장에선 ‘일을 시킬 때 제대로 뽕을 빼야 한다’는 생각으로 잦은 야근에, 여러 요구들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야근으로 12시에 퇴근하여 집에서 잠시 눈 붙인 후 5시에 일어나 회사에 나와야 하며, 10명이서 하던 일을 5명이 할 수 있도록 했다. 이와 같은 살인적인 환경에 몇 만명의 아이들을 밀어 넣고 싶은 것이다.
보통 그런 살인적인 작업환경을 지닌 직장이라면 안 가야 맞지만, 지금의 학생들은 오히려 못 들어가서 난리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순종적인 인재를 만들기 위해 학교에선 ‘일을 한다는 건 그런 것이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기업들은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취업박람회’란 이름으로 대학을 찾아와 “예스맨이 되라”, “영어를 잘 해야 한다”, “참아야 성공할 수 있다”라는 말로 학생들에게 겁을 준다. 그런 현실이기에 대학교 3학년이나 4학년이 되면 학교에 가지 않고 취업준비를 위한 공부만을 하는 것이다. 기업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다.
우리가 교육을 하는 이유는 ‘주위 사람들에게 보탬을 줄 수 있는 존재’, ‘그 사람은 없어지면 곤란한 유일무이의 존재’로 키우기 위해서 이다. 하지만 지금은 ‘교체 가능한 인간’을 키우는데 몰입하고 있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무관심하며 자기 일만 신경 쓰는 인간’을 키우는데 몰두하고 있다. 그런 고립된 인간을 만들기 위해 재계, 정치, 미디어는 학교에 끊임없이 요구하며 학교는 그 요구를 수행하는 기관으로 전락했다.
무도관은 성숙이란 관념으로 만든 학교
이런 상황을 돌파하고자 사람들은 여기와 비슷한 무도관을 만들거나 사숙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예전의 사숙은 입신양명을 위한 공간이었던데 반해,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사숙은 전혀 다른 공간이다.
학교 교육의 대안적인 활동을 하는 곳이니 말이다. 지금의 학교가 다음 세대의 아이들을 기르는 것을 포기하였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사숙이 등장한 것이다. 건실한, 성숙한 어른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상식의 거점’을 만든 것이다. 지역사회와의 상호부조가 바로 이러한 사숙의 목표다.
자기 돈으로 공간을 열어서 하는 것이지만, 비즈니스가 아니기에 상품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와라! 와라!’하는 심정으로 문을 연 것이다. 처음 학교를 만들었을 때 ‘줄 것이 있으니 와라’하는 심정으로 열었던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게 바로 시민교육의 기치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숙 외엔 어떠한 교육기관도 이런 교육을 하고 있는 곳은 없다. 학교나 학부모와 아이들은 모두 돈 이야기만 하느라 바쁘기에, 지금의 교육은 돈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기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Q: 현재 학교와는 다른 학교의 원래의 모습이 있는 듯한데, 학교의 원래 모습은 어땠나요?
30년 전에 재밌는 일이 있었다. 그 땐 중학교 체육관을 빌려 합기도를 했었는데, 그날따라 태풍이 몰아치고 비가 많이 온 것이다. 그래도 하기로 한 수업이기에 당연히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학생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많은 비가 내리니 쉴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1시간 정도를 기다리고 있으니, ‘여기서 지금 뭐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와 동시에 ‘이게 바로 교육이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기서 화내면 안 된다. 내가 가르치고 싶어서 포스터도 붙이고 아이들도 모집한 것인데 화낼 이유가 어디에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중학생 한 명이 왔다. “선생님 태풍이 와서 안 하는 줄 알았는데, 오늘도 하는 거예요?”라는 인사를 하며 말이다.
학교의 원점은 학생이 아무도 없는 곳에 선생이 기다리는 것이다. 여기엔 가게도, 소비자도 들어설 공간이 없다. 지원자가 몇 명인지, 실력의 편차가 어느 정도인지 아무런 정보도 없다. 자기가 하고 싶기 때문에 할 뿐이다. 그게 바로 학교가 시작된 최초의 모습이다. “나는 가르치고 싶은 것이 있으니, 듣고 싶은 사람들은 모여라!”
Q: 『스승은 있다』에서 ‘학생이 교사를 호출하기 전까지는 어떠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부분을 읽었다. 그렇다면 학생이 호출하기 전에 교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인가?
교육은 교사단 속에서
첫 번째는 교사는 혼자가 아니다. 언제나 팀일 수밖에 없으며, 교사단敎師團으로밖에 기능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50명의 아이들이 있을 때, 배움의 욕구가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내 탓이라 자책할 필요는 없다. 그 중 1~2명이라도 있으면 된다. 선생님과 학생이 서로 만나는 주파수는 다르기에, 50명의 모든 아이들이 한 교사를 보고 ‘와~~~’하며 배움이 일어나는 경우는 결코 없다. 선생님에 따라 주파수가 맞는 학생은 다르기 때문에 몇 십명으로 이루어진 교사단을 만들면 70% 이상의 배움의 욕구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실상은 이러한데 보통의 교사들은 동료 교사와 공동작업을 하려 하기보다 자기의 실력이 부족하다고 자책하기에 바쁘다. 내가 대학교수를 할 때, 강의를 제대로 듣는 사람은 3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좋은 얘길 말이다. 그렇기에 교사는 좀 더 낙관적일 필요가 있다.
교육은 오감을 열어주는 것
두 번째는 아이들의 귀를 쫑긋 세우는 방식이 있다. “뒤의 학생 내 말이 들립니까?”, “더우니 에어컨 켤까요?”라는 말을 할 때 모든 사람들이 집중한다. 그러니까 단편적인 부분들을 자기 스스로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위 질문의 공통점은 신체적으로 민감해져야 대답할 수 있는 문제라는 사실이다.
10년 전 고등학생 1000명 앞에서 강의할 기회가 있었는데, 학생들은 나를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학교 선생님이 모이라고 해서 모였기에, ‘저 아저씨 뭐야’라며 짜증만 냈던 것이다.
그 학교는 오래된 학교여서 자연환경은 정말 좋았다. 그래서 제일 먼저 “안녕하세요. 이 학교 풍경이 좋군요. 그런 환경 속에 이 체육관이 있기 때문에 기의 흐름도 좋네요.”라고 하니, 아이들이 ‘기의 흐름이란 뭐지?’ 궁금해 하며 집중이 되었다. ‘기의 흐름’이란 말이 생소했기 때문이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몸의 감각을 민감하게 하기 위해 자세를 바로 잡는 게 보였다. 그 후 아이들이 이야기를 집중하며 듣게 되었다.
그게 바로 테크닉이다. 자신의 감각을 집중해야 주위의 변화에 반응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저절로 마음이 열린다. 학교교육의 기본이 바로 이와 같은 신체능력을 길러주며, 오감을 민감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배운다는 건 마음을 열고 몸을 여는 것이다. 후각을 민감하게 하면 좋은 냄새가 나고 청각을 열면 좋은 소리가 들리는 원리다. 그러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교육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점으로 대학교의 건물을 증축할 때, 건축가에게 “교실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는데 그 사람은 “방음은 완벽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거였다. 내 의도는 ‘그 교실에선 얼마나 목소리가 잘 울립니까?’, ‘학생이 질문하면 바로 교사가 들리는 구조입니까?’라는 거였는데, 아무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교실은 인간의 오감을 개방시켜주는 곳’이라는 생각을 아무도 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게 바로 교육의 정말로 중요한 부분임에도 말이다.
3. 소비자마인드가 망친 교육을 살리는 방법
Q: 아이들이 어떤 의지를 이어 운동으로 해나가는 게 중요한 건가?
지금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그러면서 자발적으로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상황에서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독립적으로 해나가면 충분하다. 조금 전에 이야기했듯이 교사단이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큰 운동은 반드시 실패하기에 할 수 있는 것을 지금 바로 나부터 하면 된다. 지금 나는 혼자 하지만 내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은 어딘가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Q: 연대가 될 때 의지가 되어 잘 될 수 있을 건데, 선생님의 말씀은 나 혼자 잘 하면 된다는 얘기처럼 들립니다. 혼자만 하라는 뜻인가?
‘떨어져 있지만 그건 고립이 아니기에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이 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생각과 교육이 뭔가 특별한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면 누군가도 이런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은 근대 일본을 지탱하는 가장 성공한 교육기관을 만들었다. 그는 특별히 가르치는 것 없이 ‘자학자숙’으로 사회에 유익한 인물이 될 수 있도록 했다. 학생들은 요시다의 인품에 반해 눈이 확 떠졌던 것이다. 그와 같은 상황에선 학생수가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배움이 일어나느냐, 그렇지 않냐만 있기 때문이다. ‘배우고 싶다’는 의지가 일어나면 교육은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현실적으로 풀어보자면 중고생들은 합기도를 배우는 것뿐이다. 오감을 민감하게 하여, 내부 세계로 들어온 감각을 느끼고 서로 발신해 내는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감수성을 키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고생은 합기도만으로 충분하다. 내가 ‘어떻게 살아라’라는 말을 일절하지 않으며 합기도를 하는 것만으로도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한다.
합기도는 배우기 위한 기본적인 몸을 만드는 것으로,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면 안 된다’는 게 기본적으로 갖춰지기 때문이다. 방어적인 자세란 곧 자신의 한계를 정하는 것이고, 어른에 대한 거부감을 지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합기도를 통해 마음을 열게 되면 자신의 한계를 정하지 않고 어른을 신뢰하게 된다. 그런 학생만이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Q: ‘배를 만드는 기술을 가르치기 전에 바다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야 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세상의 지식이나 테크닉보다 가장 근본적인 것을 알게 한 후에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린 시절에 사물을 빨려 들어갈 것처럼 쳐다볼 때가 있다. 아이들과 산이나 들로 돌아다니면 벌레를 본다거나, 꽃을 본다거나, 강의 흐름을 본다거나, 바다를 본다거나 할 것이다. 처음엔 멍 때리고 있지만 어느 순간엔 빨려 들어갈 것처럼 몰입하며 본다. 그건 곧 패턴을 발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예를 들면 자그마한 파도가 몇 번 온 다음에 큰 파도가 온다는 것을 수없는 관찰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예측한 것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관찰하게 되고 그런 식으로 하다 보면 어떤 법칙적인 것을 확정짓게 된다. 자기 스스로 패턴을 발견하고 법칙을 발견했기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쳐다보는 경험이 꼭 한 번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와 같은 행동은 세상의 비밀을 알게 된 것으로 과학적 지성의 활동이며 종교적 영성의 활동이기도 하다. 신앙이란 것은 카오스 속의 코스모스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런 지성적인 활동이나, 영성적인 활동은 아이들 스스로 해나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몸을 개방하는 것이 학교 교육이 기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열린 몸과 맘이 된다면, 학교교육은 95% 된 것이다.
교육자의 일이란 교사들끼리 협력하여 아이들의 마음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 도장의 ‘개풍관’이란 이름은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출처 『시경』’에서 따온 것으로 『시경』에서 나오는 시들 자체가 러브송이다. 하지만 나는 이걸 교육에 대한 이야기로 생각하여 도장 이름으로 쓴 것이다. 초여름에 따뜻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어느덧 봉우리가 열리고 꽃이 피어나는 그 형상을 그리며 이름으로 지었다.
Q: 성적이 낮은 학생을 둔 부모님들이 최근에는 예전처럼 ‘모두 다 공부를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 학생의 자존감은 떨어지고 그 부모님 또한 걱정이 앞서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 부모님들을 위해 어떤 이야기를 해주면 좋을지 막막하다.
사실은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에서 같은 내용을 공부하고 있다. 교과 내용이 깊어지고 어려워지지만 같은 내용의 반복이기에 언제든지 보충할 수 있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배우는 내용은 1년이면 충분히 배울 수 있는 내용이라 생각한다. 5학년 때까지 멍 때리다가도 6학년 때 정신 차리면 1년 만에 따라갈 수 있다. 중고등학생 때도 그건 마찬가지다. 12년 교육으로 본다면 3년만에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학교의 교육과정이란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항상 긴장감을 가져야만 공부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이 짜일 순 없고 어느 순간 몰입하더라도 충분히 거기서부터 공부할 수 있도록 짠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배움의 스위치가 켜질까? ‘아 저렇게 되고 싶은데’, ‘나도 논리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데’라는 생각이 들 때 배움의 스위치가 켜진다. 동경이나 선망을 할 때 비로소 스위치는 작동된다. 바로 그 순간부터 열심히 하게 되면 1년 만에 다 따라갈 수 있는 것이다. 음악이든, 철학이든, 역사든, 뭐든지 할 것 없이 말이다. 이런 이유로 대학자 중에선 만학도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단계에서 하고 싶은지, 알고 싶은지를 자신에게 묻는 마음이 중요하다.
교사에게 필요한 두 가지가 있다. 아이의 재능에 대한 낙관적인 시선과 인내력이 그것이다. 그 아이의 재능이 언젠가는 개화할 거라는 인내력과 낙관이 있어야 한다. 내가 담임하는 동안에 결과가 나와야만 한다는 생각에 갇혀서는 안 된다. 또한 내가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는 생각에 갇혀서도 안 된다. 그저 믿고 오감을 활짝 열 수 있도록 함께 지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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