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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방랑자

박동섭 -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본문

책/[책]좋은 글은 심금을 울린다

박동섭 -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gunbbang 2012. 4. 20. 12:54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1)


역: 박 동섭(littleegan@gmail.com)


학생: 선생님 ‘어른이 된다는 것’ 이게 무엇을 뜻하는 건가요?

우치다: 앗 직구 그것도 한 가운데로 꽉 차 들어오는 직구같은 질문이군. 그러나 직구이든 체인지업이든 우치다는 모든 물음에 즉답하는 준비가 되어 있다. 자 그러면 대답 들어간다. 그렇게 물음을 던졌을 때에 자네는 이미 대답을 알고 있었다. 이상.

 

학생: “선생님! 잠깐만요. 그게 끝입니까?”

우치다: 그래

 

학생: “그런 말도 안 되는 ㅠㅠ 의미를 잘 모르겠어요.”

우치다: 울지마. 자 그러면 설명하지. 자네는 자각하지 못했을지 모르겠지만 이 물음 안에는 두 가지 언명(言明)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 하나는 “나는 아이입니다” 또 하나는 “당신은 어른입니다”이다.

 

학생: “왜 그렇게 되는 거지요?”

우치다: “....라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라는 물음은 보통 ‘답을 모르는 사람’이 ‘답을 알고 있음에 틀림없는 사람’에게 던지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은 풀 수 없는 물음의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실은 이것이 ‘아이’의 정의이다.

그리고 ‘아이’가 ‘대답을 알고 있다고 상정하는 사람’ 이것을 ‘어른’이라고 부른다.

‘아이’와 ‘어른’의 정의는 이것 밖에 없다. 그래서 자네는 물음을 발한 순간에 이미 스스로 답을 한 셈이다.

자네는 나를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나는 ‘어른’이다.

 

학생: “선생님은 어른이지 않습니까?

우치다: 어떻게 생각해? 자네는 나를 ‘어른’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물음을 던졌지? 그러니까 그 말은 ‘어른이란 무엇인가?’를 자네가 벌써 알고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자네 물음은 다름 아닌 ‘어른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즉 자네는 ‘어른이란 무엇인가?’를 모름에도 불구하고 나를 ‘어른’이라고 판정한 것이 된다. 왜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학생: “선생님 머리가 빙빙 도는 느낌입니다.”

우치다: 미안하네 하지만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 ‘어른’이라든지 ‘아이’라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지. 때때로 ‘어른’이라는 것은 ‘생활비를 버는 사람을 가리킨다’라든지 ‘무슨 일이든지 정견을 갖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라든지 ‘고독에 견딜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라고 정의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정의는 전혀 무의미하다. ‘어른’이라는 것은 ‘아이로부터 어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것 밖에 없다.

 

학생: “그렇습니까?”

우치다: 그래. ‘어른’은 ‘아이’와의 관계 속에서 일종의 ‘수위차’로서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차이 안에서 깃든다’라는 의미에서는 그것은 화폐와 정보와 똑같다. ‘화폐’는 누군가가 받아주지 않는 한 가치가 없고, ‘정보’는 누군가가 그것을 듣고 싶어 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는 것이다.

‘어른’도 똑같다. 누군가에게 ‘어른이다’라고 승인받지 않는 한 ‘어른’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

‘어른’이라는 것은 ‘아이’로부터 ‘어른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는 물음이 향한 사람을 가리킨다.

 

학생: .....

우치다: 자 그러면 ‘자립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라든지 ‘자신의 머리로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 무엇을 뜻합니까?’와 같은 물음을 던지는 사람은 아직 자립하지 않고 자신의 머리로 아직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알겠지?

 

학생: 그것은 왠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우치다: 잘 생각해보면 쉬운 이야기야. 그것은 ‘빚을 갚고 싶으니까 돈을 빌려 달라’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거니까.

물음을 통해서 ‘일반해-일반적인 정답-’을 구하는 한 사람은 자립도 가능하지 않고 자력으로 매사를 생각하는 것도 할 수 없다. 이미 자립해서 자력으로 사고하는 사람은 ‘누군가가 일반적인 정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학생: “자 그러면 ‘아이’는 어떻게 하면 그런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겁니까?”

우치다: 역사 이야기를 하나 해볼까.

18세기 말 무렵에 프랑스 혁명이 있었지. 그 때 구체제의 귀족들중 상당수가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그들은 살롱에 모여서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우리는 이런 쓰라린 체험을 해야 하는가 하고 끝없는 불만을 토로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특권과 재산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식으로 물음을 설정했다.

‘혁명이 일어난 것은 누구 때문인가?’

그들은 시스템 그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져서 사용할 수 없게 되어 버렸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붕괴했다 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혁명은 시스템의 ‘외부’로부터 침입해 온 ‘사악하고 강대한 것’ 때문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이리하여 실로 다양한 ‘장본인’의 가능성이 음미되었다. 영국의 해적자본, 프로테스탄트, 프리 메이슨, 바바리아의 계명결사, 시온의 현인들...무엇이든 상관없었다.

 

학생: “그것과 ‘어른이 되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우치다: 비슷한 이야기는 자네 주위에도 있을 것이다. 자신한테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원인을 ‘누군가의 악의’에 구해서 설명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이’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일어나면 그 원인을 ‘나의 외부에 있는 강대한 것, 나의 이해를 넘어선 것’ 즉 ‘모든 물음에 대한 대답을 알고 있는 것’에 귀착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아이’는 신을 믿는 것과 똑같은 정도로 쉽게 악마의 실재도 믿어 버린다.

‘누군가가 전부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 그것이 아이가 갖는 생각의 위험함이다. 그래서 ‘아이’는 종종 놀랄만한 폭력의 배양기가 되기도 한다.

‘강력한 악이 어딘가에 실재해서 세계의 모든 사태를 컨트롤 하고 있다’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설령 노인이라고 하더라도 ‘아이’이다.

 

학생: “ 자 그러면 조지 부시는 ‘아이’입니까?”

우치다: 인류학적 기준으로부터 본다면 ‘YES이다. ‘

나’는 순진무구하고 사악하고 강력한 것이 ‘외부’에 있어서 ‘나’의 자기실현과 자기인식을 방해하고 있다. 그런 화법으로 ‘자신에 관한 스토리’를 짜는 사람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아이’이다.이런 정신상태가 사회질서에 있어서 잠재적으로 얼마큼 위험한지는 히틀러의 사례로부터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회에는 ‘어른이 되어라’라는 성장을 재촉하는 동기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실정적인 조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학생: .......?

우치다: ‘아이’는 ‘어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어른이란 무엇인가?’의 조건은 실정적으로는 규정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학생: “모르겠습니다.”

우치다: ‘아이’는 자신의 외부에 ‘어른’이 있어서 모든 것을 컨트롤 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 녀석을 어쨌든 속여서 ‘어른’으로 길러내지 않으면 사회는 굴러가지 않는다.

그런데 ‘아이’에 대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이용 도구’뿐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화폐’와 ‘주식’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을 지폐다발과 채권으로 매수할 수 없다.

‘아이’를 속이려면 ‘아이’가 소중하게 여기는 도구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하면 사용할 수 있는 도구는 하나 밖에 없다.

 

학생: “그게 무엇입니까?”

우치다: ‘어딘가에 어른이 있다’라는 ‘아이의 맹목적인 믿음’을 이용하는 것 밖에 ‘아이’를 ‘어른’으로 만드는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에게 ‘우리는 어른이고 너희들이 모르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라는 큰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 말에 완전히 속아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어른’의 뒤를 필사적으로 따라 가려고 한다.

 

학생: “.....그러면 그 후에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속아 넘어간 채로 계속 가는 겁니까?”

우치다: ‘아이’는 ‘어른’은 ‘뭔가 예지력’을 갖고 있다고 믿고 쭉 ‘어른’을 따라 간다. 그리고 긴 세월이 지나고 난 후에 ‘어른’은 그런 것을 갖고 있지 않았다 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학생: “심한 이야기군요.”

우치다: 아니 그렇지도 않아. ‘어른은 어떤 예지력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있다고 생각해서 여기까지 따라오고야 말았다’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사람은 이미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학생:  “왜요?”

우치다: 잘 봐 그렇지 않아. ‘어른’이라는 개념은 ‘여기에 있는 질서 이상의 질서’ 같은 것이 어딘가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지를 넘어서는 지’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에게 가르쳐 주기 위한 사기술이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아이’는 ‘어른’이 되기 때문에.

 

학생: “그런데 그런 말을 ‘아이’에게 까발려도 되는 겁니까?”

우치다: 물론 왜냐하면 지금 자네는 내 이야기를 ‘완전히’ 믿고 있지. 모리스 브랑쇼(Maurice Blanchot)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작품은 사라진다. 그러나 사라졌다는 사실은 본질적인 것으로서 남는다.”

이런 말은 어른 밖에 할 수 없는 말이다. 의심이 깊은 사람에게 ‘거기에는 무엇인가가 있다’라는 것을 믿게 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집요하게 단언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손에 넣는 제일 좋은 방법은 그것을 타자에게 주는 것’이라는 레비스트로스의 통견과 깊은 곳에서 통하고 있다.

“어디가”라는 물음이 나오면 또 긴 이야기가 되긴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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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망설임의 윤리학』중에서 우치다 타츠루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