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방랑자
스크랩 - 최동훈 감독의 '범죄영화 3부작' 뜯어보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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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2004을 통해 잘 짜인 범죄 영화의 매력을 선보인 최동훈 감독이 <타짜>2006에 이어 세 번째 범죄 영화 <도둑들>을 완성했다. 최동훈 감독의 범죄 영화 세 편을 나란히 늘어놓고 보니 그 구조와 변화가 한눈에 보인다.
※ 스포일러 다량 함유. 영화 관람 후 읽기를 권함!
1. 왜 범죄 영화인가?
왜 자꾸 범죄 영화를 만드느냐는 질문에 최동훈 감독은 농담하듯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건 담당 검사와 얘기해 봐야 할 것 같은데.(웃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스쿨버스를 타려면 20분씩 걸어 나와야 하는 동네에 살았다. 촌에 살아서 동네 사람들이 다 건들건들했다.”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 >의 사기꾼, <타짜>의 타짜, <도둑들>의 도둑. 범죄의 종목은 다르지만 이들은 하나같이 건들건들한 것 말고도 비슷한 점이 많다. 첫째, 사람을 속인다. 사기꾼이 사람 속이는 거야 당연하고, 타짜 역시 노름판에서 귀신같은 속임수로 이득을 취하는 사기꾼이다. 물론 속임수를 쓰지 않고 이른바 ‘자연빵’으로 칠 때도 있다. 그럴 때도 패가 돌아가는 상황과 상대의 마음을 부처님 손바닥 보듯 읽어서 노름판을 떡 주무르듯 해야 진짜 타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도둑들>의 도둑들 역시 사기꾼 기질이 농후하다. <도둑들>의 도둑들이 어디 빈집에 들어가서 푼돈 챙겨 나오는 좀도둑인가? 도둑맞는 사람이 도둑맞는 줄 모르는 사이에 티 안 나게 훔치는, 도둑 중의 도둑이지.
둘째, 전문 기술자다. ‘업계’ 최고의 고급 기술을 자랑하는 사기꾼 중의 사기꾼, 타짜 중의 타짜, 도둑중의 도둑이 아니면 최동훈 감독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특히 <범죄의 재구성>의 사기꾼들과 <도둑들>의 도둑들은 전문 분야가 다 다르다. <범죄의 재구성>의 김 선생(백윤식)은 사기 작전 짜기로는 우리나라 최고의 브레인이다. 얼매(이문식)는 입담, 이른바 ‘구라’가 좋다. 제비(박원상)는 여자 벗겨 먹는 데 선수다. 휘발류(김상호)는 우리나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위조 전문가. 서인경(염정아)은 ‘구로동 샤론 스톤’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미인계가 주 무기다. 최창혁(박신양)은 주인공답게 브레인과 ‘구라’에 두루 능한 팔방미인.
<도둑들>의 팹시(김혜수)와 줄리(이심결)는 금고 따기 전문. 뽀빠이(이정재)는 원래 줄 내리기 전문인데, 나름대로 작전을 짜기도 한다. 뽀빠이 밑에서 줄 내리는 법을 배운 신참 도둑이 바로 잠파노(김수현)다. 예니콜(전지현)은 줄타기 선수, 씹던 껌(김해숙)은 연기파 도둑의 전설. 홍콩 도둑 첸(임달화), 조니(증국상), 앤드류(오달수)는 총을 다룬다. 주인공 마카오 박(김윤석)은, <범죄의 재구성>의 최창혁과 마찬가지로 브레인, 줄타기, 연기 뭐 하나 못하는 게 없다. <타짜>의 고니(조승우), 정 마담(김혜수), 평 경장(백윤식), 고광렬(유해진), 박무석(김상호), 아귀(김윤석), 짝귀(주진모) 모두 화투에 도가 트인 기술자라는 사실은 두말하면 입 아프고.
셋째, 여럿이 함께 일을 꾸민다. 날고 기는 전문 기술자들이 좀스러운 먹잇감을 노릴 리 있나. 크게 털려면 전문 기술자 여럿이 함께 일을 꾸며야 한다. <범죄의 재구성>에서 최창혁은 한국은행 금고에 있는 50억 원을 털기 위해 김 선생, 얼매, 제비, 휘발류와 손잡는다. <타짜>의 정 마담 역시 돈 많은 놈을 벗겨 먹기 위해 고니, 고광렬 등 타짜 여러 명을 고용해 작전을 짠다. <도둑들>에서 우리나라와 홍콩의 도둑 열 명은 300억 원짜리 다이아몬드 ‘태양의 눈물’을 훔치기 위해 한패가 된다. 여기서부터 일이 더욱 재미있어진다. 사람 속이는 재주를 가진 전문 기술자들끼리 만나 한패가 됐으니, 겉으로는 당장 콩 한쪽도 나눠 먹을 것처럼 의리 있는 척해도 속으로는 딴 꿍꿍이를 꾸미게 마련.
아니나 다를까, <범죄의 재구성>과 <도둑들>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부분은 사기꾼들과 도둑들이 함께 목표했던 일을 벌이는 이야기고, 뒷부분은 그 일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사기꾼과 도둑들이 서로 속고 속인 나머지, 애초에 계획했던 일이 틀어지는 바람에 빚어지는 또 다른 이야기다. 최동훈 감독의 진짜 속셈은 뒷부분에 있다. 한 편인 척했던 동료 기술자마저 속이는 데서, 이들이 뼛속부터 범죄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셈이니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범죄의 세계다. 그 세계로 들어가야만 관객을 깜빡 속일 수 있다. 언제 누가 누구를 속일지 모르는 팽팽한 긴장이 범죄자들에게 그 무엇으로도 변신할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야기꾼에게 그것은 무한 자유다. 최동훈 감독은 그 가능성 속에서 쾌재를 부르며 마음껏 이야기를 뻗어나간다. 최동훈 감독은 <도둑들>의 주인공 도둑 열 명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도둑이자 스파이면서, 이제 막 미국 서부에 도착한 인물이자 사기꾼 같은 인물들을 떠올렸다. 모든 장르 영화의 요소를 다 담을 수 있는 존재.”
2. 왜 복수하나?
<범죄의 재구성>의 최창혁과 <도둑들>의 마카오 박이 난다 긴다 하는 사기꾼과 도둑들을 불러 모아 한탕을 벌이는 건, 사실 크게 한탕 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다. 최창혁은 4년 전, 자신의 형 최창호에게 사기를 쳐 그를 자살하게 한 김 선생에게, 마카오 박은 어릴 적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홍콩 범죄 조직의 거물 웨이 홍에게 앙갚음할 생각이다. 복수에 매달리는 건 <타짜>의 고니도 마찬가지.
누나의 위자료를 판돈으로 들고 갔던 도박판에서 자신의 돈을 모조리 따간 박무석을 찾아 혼내 주겠다는 게 첫째 목표, 고니에게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인 평 경장을 죽인 아귀를 찾아 복수하겠다는 게 둘째 목표다. 이로써 자신의 잇속을 차리는 데만 신경쓰는 줄 알았던 범죄자 주인공이 알고 보니, ‘사적인 정의’를 추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복수를 통해 단순한 범죄자에서 정의와 불의가 묘하게 뒤섞인 복합적인 인물로 거듭나는 것. 최동훈 감독은 이렇게 설명한다.
“사회가 세운 선과 악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게 범죄 영화의 기능이기도 하다. 최창혁, 고니, 마카오 박은 분명 나쁜 놈이지만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관객이 그들을 응원하게 만들고 싶다.”
이들이 복수해야 하는 상대는 하나같이 사기, 도박, 도둑 분야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거물이다. 그래서일까. 최창혁, 고니, 마카오 박이 꿈꾸는 복수는 상대를 무참히 죽이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식이 아니다. 세 사람 모두 사기, 도박, 도둑 세계의 규칙에 따라 상대와 승부를 벌여 그들을 이기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들의 계획대로 최창혁, 고니, 마카오 박이 각자 사기, 도박, 도둑 세계의 1인자로 평가받는 김 선생, 아귀, 웨이 홍을 꺾으면서 최창혁, 고니, 마카오 박은 새로운 1인자가 된다. 결과적으로 신출내기 기술자 최창혁. 고니, 마카오 박이 오랜 전통의 권위자를 누르고 그 세계의 서열을 새롭게 재편하는 셈.
여기서 <범죄의 재구성>의 최창혁의 대사에 귀를 기울여보자. 최창혁이 죽은 형의 복수를 위해 김 선생에게 사기를 쳤다는 사실이 점점 드러나는 대목에서, 최창혁은 형 최창호의 납골당을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엉아, 내가 니 복수해 줬다. 좋냐, 이 븅신아? 내가 착하게 살려고 그랬지. 근데 이 씨X X만한 새끼들이 지들이 최고인 줄 알고 날뛰잖아. 그래서 내가 한 방 먹여 준 거야. 엉아는 그렇게 알고 있으면 돼!”
전문 기술자들의 세계에서 서열은 곧 기술 수준을 나타낸다. 서열은 명예고, 그 세계의 질서다. 서열이 꺾이는 건 목숨을 잃는 것만큼 치명적이다. 그래서 <범죄의 재구성>의 김 선생, <타짜>의 아귀, <도둑들>의 웨이 홍은 얼치기라고 생각했던 최창혁, 고니, 마카오 박에게 자신이 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발버둥 치다가 끝내 피를 본다.
사기꾼을 이기기 위해서는 사기꾼이 돼야 하고, 타짜를 이기기 위해서는 타짜가 돼야 하고, 도둑을 이기기 위해서는 도둑이 돼야 한다. 그런데 사기, 도박, 도둑의 세계는 일단 한 번 들어가면 마음대로 빠져 나올 수 없다. 그 세계에 발 담근 것이야말로 최창혁, 고니, 마카오 박이 복수를 위해 치른 대가다. 사기, 도박, 도둑의 세계에 한 번 들어온 이상 최창혁, 고니, 마카오 박은 평생 떠돌며 살 수밖에 없다. 최창혁, 고니, 마카오 박은 그래서 어느 한 군데 머무는 법이 없다.
<범죄의 재구성>에서 최창혁은 이제 막 출소했고, <타짜>의 고니는 도박판에서 누나의 돈을 다 잃고 고향을 떠나 전국을 떠돈다. <도둑들>의 마카오 박은 고국을 등지고 마카오에 가 있는 지 오래다. 그들은 집을 떠나 복수의 대상을 쫓는다. 복수가 성공한다 해도 쫓기는 신세가 될 것이 빤하다. 복수를 결심한 이상 평생 쫓기면서 고독하게 살아야 한다는 걸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도둑들>에서 뽀빠이가 “(웨이 홍에게 덤볐으니) 너 이제 평생 쫓길 텐데”라고 했을 때 마카오 박은 이렇게 말한다. “좆같겠지. 외롭고.” 이것은 최동훈 감독이 인물의 밑바닥에서 포착한 ‘인간의 숙명’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고독하다. 힘든 싸움을 할수록 더 고독하지. 그런데 고독이 노골적인 주제가 되면 영화가 너무 무거워지니까 은근슬쩍 이야기하는 거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도둑들>의 몇몇 도둑은 자신이 짊어지고 갈 고독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한다고 볼 수 있다. 맹목적일 정도로 순정을 나누는 첸과 씹던 껌, 서로를 향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마카오 박과 팹시가 바로 그렇다. 지금까지 최동훈 감독의 범죄 영화에서 로맨스가 이렇게 강조된 적은 없었다. 고독한 삶의 한가운데를 떠돌고 있는 그들에게 사랑은 마지막 피난처다.
“‘사적인 감정이 담긴 장르 영화가 가능할까?’ 궁금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영화는 액션 영화이자 멜로 영화 아닌가. <도둑들>에서 그 두 가지를 한 그릇에 담고 싶었다.”
3. 왜 이렇게 빠른가?
최동훈 감독의 영화는 확실히 “액션 영화이자 멜로 영화”다. 액션 신과 감정 신이 따로 구분돼 있지 않고, 모든 장면에서 액션과 감정이 함께 굴러가기 때문이다. 최동훈 감독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 그렇다. 감정과 액션이 섞여 있다. 연기도 그렇게 해야 다채로워진다. 영화에서 배우가 마치 자기가 대사 할 순서를 기다리듯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싫다.”
최동훈 감독의 모든 영화에 출연한 배우 김윤석의 말을 들어볼까?
“최동훈 감독의 영화는 매 순간이 갈등이고 액션이다. 무술 영화에 나오는 ‘액션’만 액션이 되는 게 아니라, 대사 자체가 액션이 되는 느낌이다. 프레임 안의 모든 것들이 살아 움직여야 한다. 손가락 하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그 장면의 공기가 계속 흐르지 않고 멈추면 최동훈 감독이 바로 ‘NG!’를 외친다.”
그래서 최동훈 감독의 영화는 빠르다. <범죄의 재구성><타짜><도둑들>중에서 제일 빠른 작품은 <범죄의 재구성>. 최동훈 감독이 <범죄의 재구성>을 연출했을 때를 회상한다.
“신인 감독이었으니까 패기 넘쳤지. 대사 끝나면 바로 그 신이 끝나는 식이다. 하늘 바라볼 틈을 안 준다.(웃음)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일부러 동선도 어렵게 짰다. 한마디로 악착같이 찍었다. 그만큼 희열도 컸다. 그런데 영화를 다 찍고 보니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죄의 재구성>처럼 편집을 기계적으로 빨리 하면 영화는 ‘간지’나고 좋지만 관객은 인물의 감정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타짜>가 <범죄의 재구성>보다 약간 느리고, <도둑들>이 <타짜>보다 조금 더 느린 이유는 그 때문이다. “전체적인 속도는 빠르지만 중간 중간 느린 구석이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예를 들면 <타짜 >에서 도박판을 빠져나온 고니가 아침거리를 쓸쓸히 걸어가는 장면이나 정 마담이 혼자 있을 때 쓸쓸해하는 모습, <도둑들 >에서 비 오는 날 팹시와 씹던 껌이 술 마시는 장면 같은 것. 그래서 최동훈 감독은 정말 연기 잘하는 배우를 캐스팅한다. 한 장면 안에서 액션과 감정을 동시에 표현하면서 전체적인 박자를 조절할 줄 알아야 하니까.
그의 영화는 늘 출연진의 연기가 전체적으로 잘 어우러진 앙상블 영화로 꼽힌다 . 최동훈 감독이 배우들에게서 훌륭한 연기를 계속 뽑아낼 수 있는 건, 근본적으로 그가 배우라는 존재에 깊이 매료돼 있기 때문이다. “사석에서 같이 술 마실 때는 정말 평범한 사람 같은데, 카메라 앞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자유자재로 변신하던지,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게 정말 황홀하다.” 최동훈 감독이 배우라는 존재에 끌리는 건 그가 범죄자 캐릭터에 끌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범죄자가 속임수를 통해 변신의 자유를 얻는 것처럼 배우 역시 캐릭터를 빌리면 그 무엇으로도 변신할 수 있다.
최동훈 감독의 범죄 영화는 궁극적으로 그 변신의 스펙터클을 좇는다. 최고의 사기꾼, 최고의 타짜, 최고의 도둑이 귀신같은 재주를 부리듯 지극히 자연스러우면서도 능청스럽게. 속는 사람이 속았는지도 모를 정도로 감쪽같이. 그래서 최동훈 감독은 계속 범죄 영화를 찍는다. 복수에 성공한 최창혁, 고니, 마카오 박이 계속 사기, 도박, 도둑의 세계에 머무는 것처럼. 누구든 범죄의 세계는 한 번 발을 들이면 쉽게 빠져나갈 수 없으니까. 그건 최동훈의 범죄 영화에 맛들인 우리도 마찬가지다.
[ 뉴스 글_장성란 기자 ] | 무비위크 | 2012.07.31 13: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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