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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책]좋은 글은 심금을 울린다

[박준규] 학교 혁신의 나아갈 길을 묻다

gunbbang 2013. 8. 18. 18:41

학교 혁신의 나아갈 길을 묻다

 

단재학교 대표 박준규

abae@abae.co.kr

 

# prologue

 

1968, 외솔 최현배 선생님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당시 한글학회 회장이었던 외솔 선생님은 기자회견을 통해 모든 글살이에 한글만을 쓰자고 주장했습니다. 지금도 한글전용화를 반대하는 세력이 많은데, 당시로선 파격적인 주장이었습니다. 기자 한 사람이 너무 앞서가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휘어진 대나무를 바로 잡으려면 똑바로 펴서만은 아니 되네. 휘어진 만큼 반대편으로 구부려야하는 걸세.”

혁신 교육에 대한 담론을 다룰 깜냥이 부족한 사람이 드릴 수 있는 말씀은 문제해결의 방법이나 학교교육의 방향이 아니라 화자인 제 입장을 선명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이는 결코 정답이 될 수 없으며 대나무를 바로 잡기 위해 반대편으로 힘껏 구부리는 역할이라고 봅니다. 저는 학교 밖에 있는 사람이지만 화자로 여러 선생님들 앞에 선 것은 궁극적으로 공교육을 정상화하자는 바람입니다.

 

# 혁신에 대해 생각해보기

 

2009년 경기도 김상곤 교육감이, 2010년에 서울 곽노현 교육감이 당선되면서 혁신학교가 교육계의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혁신이라 함은 과감하게 새롭게 하자는 의지 표현인데, 무엇을 어떻게 새롭게 하자는 것인지 논의만 분분하고 모두가 공감하는 의견 수렴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의 새로운 교육패러다임으로 혁신학교와 혁신교육을 말하기도 하기에 큰 틀에서 낡은 패러다임을 버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자는 주장으로 혁신교육운동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낡은 패러다임은 경쟁 패러다임이고 새로운 패러다임은 협력 패러다임으로 얘기 되는 것 같습니다. 낡은 것은 버리고 새로운 것을 취해야겠지만 제도 자체가 경쟁에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데 제도 위에서 배경역할을 하는 낡은 패러다임이 버려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새롭다고 일컫는 협력 패러다임도 도입할 수 없습니다. 혁신학교는 이런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문제가 있기에 문제해결을 위한 혁신을 주장합니다. 따라서 혁신을 말하기 전에 문제에 대한 고찰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현실 상황과 주체의 욕망 사이의 간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간극이 멀면 멀수록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반대로 문제의 해결은 간극의 좁힘으로 이해됩니다. 교사 입장에서 살펴보면 학생들이 교사의 지시에 순응하지 않는 현실에서 교실에서 무언가 학생들에게 전달해야하는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욕망의 거리는 멀어 보입니다. 이때 문제의 해결은 학생들이 교사에게 순응하거나 교사가 학생에게 반드시 교육 컨텐츠를 전달해야하는 의무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어느 것도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혁신과제를 받아들고 입시위주 교육제도를 원망하거나 학생들의 불량한 태도와 체벌금지 조치를 탓하게 되는 현실입니다. 그래도 혁신학교 지정으로 과제 수행을 반드시 해야 하는 경우에는 마제형의 책상 배치를 하거나 학교 밖 체험활동을 늘려 배치하는 정도의 변화를 주는 것이 일반적 상황입니다. 혁신 때문에 일은 많아지고 학생들은 여전히 철없고 임기응변의 기법을 적용해보지만 늘 허탈해지는 일상의 반복입니다. 혁신을 손에 쥐고 무엇을 더 해야 할 것인가를 찾지 말고 기존의 시스템에서 무엇을 덜어낼 것인가를 찾으라는 조언은 허무할 뿐입니다.

 

# 협력의 패러다임은 허구

 

미로에서 길을 헤매고 있다면 왔던 길로 되돌아가서 잘못 들어선 첫 지점을 알아내야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설정에서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 아닐까 합니다. 실체 없고 결국 도달할 수 없는 언명으로서 협력을 세팅한 것입니다. 협력은 쉽게 경쟁의 반대말로 쓰입니다. 경쟁의 반대말은 경쟁하지 않는 것이지 협력이 아닙니다. 즉 경쟁하지 않는 것이 협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쓰는 경쟁과 협력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학(修學)능력의 제고입니다. 경쟁을 하든 협력을 하든 낮은 능력을 높은 능력으로 끌어올리는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경쟁협력은 의미가 없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수학능력제고에 아무런 흥미와 관심이 없는데 경쟁하지 말자고 하면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질 뿐 많은 에너지를 쓰면서 협력의 장으로 뛰어들 리가 없습니다. 현실은 협력적 노력으로 수학능력저하를 불러옵니다.

사또 마나부의 배움의 공동체 연수를 받거나 황당하게도 비고츠키를 협력학습의 모델인 것처럼 받아들여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도, 또는 대안교육진영의 프로그램을 도입하다고 협력의 패러다임으로 다가서는 것은 없습니다. 현 공교육 교실에서 협력의 구호는 허구일 뿐입니다.

 

# 패러다임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

 

선택한 길이 잘못됐다면 또 다른 길로 활로를 찾아보는 것이 당연합니다. 경쟁과 협력의 패러다임이 아니라면 어떤 패러다임이 현실과 혁신의 길을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매체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가져올 수 있을 겁니다.

앞 세대의 지식을 뒤 세대에게 전달하기 위해 학교가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결국 지식 전달의 매체가 교육의 고갱이입니다. 우리는 매체 결합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독일 매체학자 파울슈티히가 인류사를 매체사로 재구성한 것으로부터 실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회변동을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사이의 복합적인 작용으로 파악한 그는 매체의 범위를 넓게 인간매체(설교, 춤과 연극), 조형매체(궁전, 조각 같은 건축물), 수기매체와 인쇄매체(팸플릿, 서신, 서적, 신문)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대중매체가 있기 전부터 인류사회는 매체사회였고 이들은 사회적, 문화적 변화를 촉진하는 촉매였다고 파울슈티히는 주장합니다.

파울슈티히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사이의 복합적인 작용으로 사회변동을 파악한 것처럼 인간의 성장발달을 변화와 변동으로 해석하면서 의 복합적인 작용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학교 교실의 구체적 현상은 말살이와 글살이의 충돌에서 오는 현상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해석학의 태두 게오르그 가다머이해는 결코 언어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가다머 철학적 해석학의 핵심은 언어에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경험은 모두 언어에 의해서 매개됩니다. 언어를 단순한 기호체계로 보는 언어학자나 언어철학자들에 비해 가다머는 해석학적 관점에서 언어를 보며, 인간 삶의 세계 경험이 항상 언어를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런 가다머의 주장은 제도교육의 교육과정에도 스며들어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놓치는 것이 말살이와 글살이의 분리입니다. 말은 학습으로 증진되는 현상이 아닌 공동체 속에서 누구나 자연스럽게, 선천적으로 구사할 수 있습니다. 말은 파울슈티히의 인간매체의 핵심입니다. 반면 글은 인간이 발명한 매체이고 반복적 학습에 의해 능숙하게 사용되는 도구이자 매체입니다.

교육의 고갱이가 매체이고 교수자든 학습자든 사람이 매체이며 우리가 구사하는 말과 글이 모두 매체이지만 인간 바깥의 도구적 매체의 발전과정을 시간과 관련해서 생각해보자는 것이 새로운 상상력입니다. 교육을 매체의 입장에서 살펴본다면 지식의 유통과 더불어 주체적인 표현이 교육과정의 주류를 이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빌렘 플루서의 아이디어를 차용한 것입니다.

 

# 매체의 차원적 변화

 

어린이 및 청소년 학습자의 주된 학습활동은 모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방은 표현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위에서 언급한 교육의 정의와도 일치합니다. 창조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저는 같은 차원(2차원2차원)으로 모사(模寫)하는 것은 모방이지만, 다른 차원(2차원1차원/1차원2차원)으로 모사하는 것은 창조라고 생각합니다.

차원의 차이를 시간의 유무로 바라본 빌렘 플루서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우리는 3차원 공간에 서식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실존은 4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변화의 근본요인인 시간을 제거하면 정지된 상태의 3차원 입체가 탄생합니다. 자연을 모방한 것이지만 시간을 제거함으로써 창조적인 조각품이 탄생했습니다. 흔히 빌렌도르프의 원시 비너스상을 예로 들기도 합니다. 수많은 버전의 여인상이 조각으로 탄생하면서 모방과 창조의 선순환은 이어졌을 것입니다.

3차원 입체에서 다시 한 번 시간을 제거하면 2차원 면이 창조됩니다. 예술사에서 그림이 조각보다 늦게 태어나는 근거입니다. 인간은 2차원 회화를 3차원 조소로 환원하는 역방향 창조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2차원 회화가 창조된 상황이라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시해야할 것은 인류문화사적 창조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열역학 제2법칙의 반대 방향으로 시간을 소거하는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것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인간의 문화는 그만큼 대가를 치러야합니다.

2차원 면에서 또 다시 시간을 지워버린다면 1차원 선이 됩니다. 문자의 탄생입니다. 선으로 이루어진 특별한 도형에 일정한 약속을 주입한 것이 문자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문자를 통하여 의사소통하고 의지를 저장하고 유통합니다. 문학예술도 등장합니다. 대략 25백년 정도의 세월이 여기에 속합니다. 저는 인류문화사를 10만년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25백년은 2.5%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DNA에 텍스트 사용이 인식되기에는 짧은 세월입니다. 언어사용은 선천적이라는 생각과 반대편에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엔트로피 증가를 거스르면서 1차원적 표현수단으로 문자가 대두됐기에 인간은 문자, 그림, 조소(건축을 포함)를 마음대로 사용하면서 표현합니다.

문제는 1980년대 이후 PC의 보급 이후, 소위 3의 물결이 화두가 되면서 0차원이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30대 이하 젊은이들은 0차원적 표현 수단에 능숙하지만 아직도 천 년 이상 이어져온 1차원 문자사용 패러다임과 충돌과 갈등을 빚는 과정에 있습니다. 바로 1,2,3차원 표현수단과 사운드까지 아우르는 디지털 시대의 도래입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0차원 점(dot)을 기반으로 이루어집니다. 종이 위에 손글씨가 아닌 워드프로세서로 텍스트를 처리합니다. 이미 ‘writing'이 아니라 ’processing'으로 개념이 바뀌었습니다. LP를 완전히 몰아낸 CD의 등장과 인터넷 사용이 그렇고, 이동전화와 문자전송, 아나로그 전파가 아닌 라디오와 TV의 디지털화, 결국 모든 매체의 디지털 변화는 선형구조에서 비선형구조로 인간사회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풀어 말하면 매체의 디지털 변환은 단지 기술적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과 끝이 명확하고 그 과정의 순서가 변하지 않는 선형구조(Linear System)에서 처음과 끝이 불명확하고 중간 과정의 순서가 쉽게 변하는 비선형구조(Non-Linear System)로 이행을 말합니다. 0차원의 시대에 2층을 먼저 짓고 1층을 나중에 만들 수도 있습니다.(랜덤 구조) 비선형구조의 가장 큰 특징은 위계질서의 파괴입니다. 부모와 자식, 선생과 교사, 형과 아우, 부자와 가난뱅이, 중심과 변두리의 위계를 거부합니다. 먼저와 나중이 불명확하고 서로 뒤바뀔 수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권위는 부정됩니다. 비로소 엔트로피 증가라는 순방향으로 인간문화의 판 자체가 바뀌는 과정입니다.

지식을 선점해서 선생이든 나이가 많아서 선생이든 기존 선생의 개념은 거의 파괴됐습니다. 지식in이 알려주고 인터넷 강의가 더 신뢰를 갖는 현실입니다. 대학교수든 고등학교 선생이든 조롱거리에 불과합니다. 버르장머리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표현수단과 지식유통수단이 1차원적인 문자위주에서 0차원적인 디지털 멀티미디어(1,2,3차원 수단의 통합)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제도 학교 선생은 문자 패러다임의 권력 아바타입니다.

이제 더 이상 글로만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림과 동영상, 사운드가 결합된 형태로 컨텐츠 생산이 이루어집니다. 글로 표현한다고 해도 과거처럼 전문가에게 집중되지 않습니다. 블로그를 통해, 트위터를 통해 모든 사람이 작가가 됩니다. 텍스트만의 표현은 점점 더 짧아집니다. 짧아지는 텍스트 표현으로 더 많은 사람이 쉽게 작가가 됩니다. 1차원 문자 패러다임에서는 글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것이 권력을 이루었으나 디지털 패러다임으로 변환하면서 텍스트는 낮은 차원으로 전락합니다.

거대한 흐름입니다. 패러다임의 급격한 변화로 1차원 문명과 0차원 문명은 갈등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외형상 세대갈등으로 보일 뿐입니다. 구세대가 신세대를 겉으로는 걱정하면서 속으로는 억압하는 형태를 보이지만 정작 패러다임의 변화를 도모한 것은 구세대입니다. 패러다임의 변화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엔트로피는 증가하는 방향으로만 움직인다는 우주법칙에 따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터넷과 게임중독인 청소년들이 부모와 겪는 갈등도, 최근 트위터를 사용하는 북한의 홍보전략에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는 보수정권의 고민도, 책상에 앉아서 선생이 던져주는 19세기 정보(고등학교 교육과정은 모두 19세기 지식을 넘지 않지요)를 받아먹기를 거부하는 수많은 청소년 학습자들의 현실도 0차원 패러다임의 변화로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돌상에 쌀과 연필 대신에 마우스가 올라오는 문화에서 태어난 현재 어린이 및 청소년들은 이미 0차원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지만 학교는 교육의 결과물로서 질서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제도교육의 목적에서 조금도 움직일 생각이 없습니다. 이런 조건에서 학교 시스템을 대표하는 사람매체로서 교사와 디지털 매체로서 어린이 청소년 학생은 필연적으로 불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0차원 디지털 신세대는 과거 인디고 아이들로 불리기도 했고 요즘은 ADHD 환자라는 오명을 쓰고 위험한 치료약물을 먹기도 합니다. 이들은 순서가 정해진 발달을 하지 않으며 필요한 상황에서 자신의 변화를 스스로 가져옵니다. 0차원 디지털 신세대에게 시작과 끝이 명확하며 그 순서가 변화할 수 없는 학교시스템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사람이 물속에서 고작 몇 분만 견딜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학교는 등교시간과 하교시간이 정해져 있으며 개인에 따른 유연한 수정이 불가능하고 순서대로 교시와 교과목 시간표가 학습주체인 어린이 청소년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결정돼 있으며 1학기 다음에 여름방학이, 이어서 2학기와 겨울방학이 이어지는 루틴이 고정적으로 흐르는 전형적인 선형모델입니다. 가장 큰 불화의 원인은 배워서 습득하고 페이퍼 테스트를 거쳐야 할 내용이 어린이 청소년 개인 주체와 소통 없이 강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른 현상이 끊임없이 교실에서 솟아나는 아우성들입니다.

이거 왜 배워요. 이거 왜 해요. 제가 이거 꼭 해야 하나요.”

교단에 선 교사들에게 이와 같은 아우성은 학습을 거부하겠다는 소리로만 들리지만 사실은 1차원 문자 패러다임에 저항하는 0차원 디지털 세대의 신음 소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재밌는 사실은 한국에서 선망의 모델로 삼고 있는 북유럽(핀란드, 스웨덴) 국가의 교실에서도 피학습자 어린이 청소년들이 위와 같은 아우성을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시차가 있지만 어린이 청소년들의 아우성이 전 지구적인 현상이라는 것에서 국지 문화적 특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혁신교육이란 0차원 디지털 세대 이해하기

 

0차원 점의 세계는 현실세계에서 계속적으로 시간을 소거하는 결과 탄생한 메타포의 세계이기 때문에 기성세대에게는 어린이 청소년이 두서없이 움직이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히 1차원 문자 패러다임에 갇힌 사람들의 시야에 잡히는 모습입니다. 아는 대로 믿고 믿는 대로 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들은 계단식 학습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이들에게는 어제가 있어서 오늘이 있지 않습니다. 지금을 기준으로 경우에 따라서 어제가 결합할 수도 있고 내일이 결합할 수도 있습니다. 어제가 오늘의 원인이고 내일은 오늘의 결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지금바로여기를 구성하는 한 요소로 어제와 내일이 있는 것이지 원인과 결과 관계로 얽매여있지 않습니다.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운 0차원 디지털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겨울을 준비하지 않은 베짱이가 결국 부지런한 개미에게 가서 구걸할 수밖에 없다는 25백 년 전 이솝으로는 이들을 결코 설득할 수 없습니다. 다른 패러다임에서 서식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은 시작점과 경유지, 종착지가 모두 다르다는 뜻입니다. 또한 시작점이 종착지가 될 수 있고, 종착지가 경유지로 탈바꿈하면서 랜덤으로 시작점 경유지 종착지가 뒤섞이는 것을 말합니다. 같은 연령, 같은 동네, 같은 학교에 다닌다고 해도 개인 마다 좌표가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교과서와 동일한 진도는 불만의 대상이 됩니다. 일인 교사가 다수의 학생을 만나는 공교육 시스템이 바뀔 수 없기 때문에 이제 교육에 대한 기본 개념을 혁신적으로 바꿔야 합니다. 혁신교육, 혁신학교의 혁신은 교육에 대한 기본 개념을 아주 새롭게 리모델링하는 것을 말합니다. 새로운 리모델링의 단면을 요즘 회자되는 Education 3.0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 혁신적인 교육 개념이란 무엇인가

 

기존 교육의 개념은 증진(increase)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학습대상자는 지적, 정서적, 물리적으로 부족한 상태에 놓여있고 교육과정을 통하여 풍족한 상태로 변해야하는 당위를 안고 있습니다. 입력 대비 출력이 (+)증진 돼야 효과적이고 올바른 교육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출력은 입력이 전제된 결과이며 이 둘이 바뀔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입력 재료에 대한 출력의 양태가 미리 예견돼야하고, 예견된 결과를 보이지 않았을 때 실패한 교육이 됩니다. 돼지를 넣으면 햄소세지가 나와야 하는 것이지 양말이나 스마트폰이 나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혁신적 교육 개념은 증진을 배경으로 하지 않습니다. 증진은 정해진 방향으로 고정된 개념이지만 0차원 디지털 세대의 변화는 증진과 퇴행의 낱말꾸러미를 거부합니다. 변화 과정을 즐기는 것이지 변화 결과에 대한 가치 판단은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입력 대비 출력이라는 표현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입력과 출력의 기능적 함의는 남아있어도 반드시 입력이 전제된 출력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 학습자의 표현(expression) 중심으로 교육활동이 배치되는 것이 혁신적인 학교 시스템의 리모델링입니다. 학습자의 표현은 기존 교육 개념의 출력과 다릅니다. 교사의 교수활동을 전제하지 않고 학습자가 지식과 감성을 주체적으로 구성하고 그 결과를 스스로 밖으로 드러내도록 하는 과정을 설계할 수 있습니다. 그때 표현의 형식은 탈()텍스트의 콘텍스트(context)가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공부하다배우다에서 표현하다로 바뀌는 것을 말하며, 표현 방식이 0차원 디지털이라는 것은 1/2/3차원 매체를 모두 아우른다는 것입니다. 문자는 물론이고 그림, 사진, 동영상, 말살이, 몸짓, 사운드가 평등하게 결합합니다. 나아가 입력 대비 출력의 양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개인적 집단적 표현은 그 자체로 유효하고 훌륭합니다.

 

# 학습자의 표현활동에 대하여

 

질문해야합니다. 세상을 향해, 친구를 향해, 텍스트를 향해, 우리 주변의 무수한 기호들에게, 그리고 추상적인 관념들에게. 학습청소년이 내부적으로 스스로에게 던지는 내용은 질문이지만 타인을 향해 외부적으로 던지는 내용은 매체를 이용한 자기표현이 됩니다. 말하고, 쓰고, 춤추고, 노래하고, 욕하고, 화내고, 울고, 그리고, 만들고, 연주합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질문자가 제시하겠지만 그 내용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동료청소년학습자 끼리 서로 멘토 역할을 해야합니다. 멘토는 멘티의 질문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답을 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다시 얘기하지만 답은 질문자가 도출합니다. 그 답에 딴지를 거는 것도 멘토의 역할입니다. 답에 대해 재질문하는 것이죠.

궁극적으로 교실이, 시간표가, 교사가 없어야합니다.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세상이 교실이고 온종일 수업이고 모두가 선생이라는 파격적인 생각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같이 관념적인 이해만 있고 손에 잡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을 버려야합니다. 결국 학습이 아닌 작업입니다.

배우고 익혀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합니다. 작업을 위한 준비단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단계의 작업이 있을 뿐입니다. 팝아트의 거장 키스 해링(Keith Harling)의 경우 어린이캠프를 자주 개최했습니다. 6세 어린이의 그림도 자신과 똑같은 작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표현과 어린이의 표현을 동급으로 설정한 것입니다.

한글을 깨치고 감격스러운 마음에 좋아하는 그림책을 읽는 5세 꼬마가 있습니다. 인수분해문제에 몰두하는 15살이 있습니다. 주기율표를 외우는 17살이 있습니다. 진중권의 <미학오딧세이>를 읽는 20살이 있습니다. <NATURE>지의 최신 논문을 읽는 40세 교수가 있습니다. 모두 자기단계에서 가능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곧 각 단계의 작업입니다.

각목을 한뼘 길이로 자르고 다시 양끝을 비스듬히 잘라 자치기 새끼로 만드는 10살 개구쟁이가 있습니다. 미송을 재단하여 일인용 좌탁을 만드는 16살이 있습니다. 춘양목을 다듬고 세워서 숭례문을 원형 복원하는 60세 대목장이 있습니다. 모두 가능한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입니다.

학습청소년은 작업을 통해 유무형의 컨텐츠를 생산하고 그 과정에서 자기에게 질문하며, 동시에 세상을 향해 표현합니다. 월간<고래가 그랬어>김규항 발행인은 일간지 칼럼을 통해 "(우두커니 앉아)먼산 바라보는"시간이 요즘 아이들에게 필요하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먼 산 바라보기는 결코 "멍때리기"가 아닙니다. 어떤 누구도 아무런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지 않습니다. 누구든 반드시 '자기표현작업'을 합니다. 교실 한 구석에서 비스듬한 자세로 몇 시간을 버티는 청소년이 있다고 칩시다. 이 친구가 잠들지 않은 상태라면 매우 활발한 사고실험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겉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미지의 세계에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위 전문가는 이 친구에게 무기력하다고 진단합니다.

 

# 표현의 구체적 예시들

 

인터뷰놀이 (아이를 인터뷰하면 놀라운 일이 생긴다 ; 시사in 기사 옮김)

경주(12세 남아, 가명)는 전날 엄마와 크게 다퉜다. 스마트폰 사용을 저녁 7시까지 하기로 해놓고선 8시까지도 돌려주지 않자 화가 난 엄마가 스마트폰을 빼앗아버렸기 때문이다. 경주 엄마는 아이가 이렇게 심하게 대든 적이 없어서 깜짝 놀랐다. 질풍노도의 사춘기가 시작됐을까, 엄마를 진짜 미워하는 건 아닐까, 내 아이가 스마트폰 중독인가,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경주와 인터뷰 놀이를 하면서 경주 엄마는 두 가지 커다란 착각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로봇이 엄마로 나오는 책 <엄마 사용법>을 아이와 함께 읽으며 경주 엄마가 나도 엄마 장난감처럼 감정이 없었다면 경주에게 야단도 안 치고 좋은 것만 해줄 텐데라고 말하자, 경주는 곧바로 감정이 없는 엄마는 싫어. 나도 감정이 없는 아이가 되니까라고 반박했다. 경주 엄마는 이때다!’ 하고 어제 일을 슬그머니 꺼냈다. “어제 스마트폰 뺏고 혼냈는데도? 엄마가 안 미웠어?” “안 미웠어. 그냥 화가 났을 뿐이야. 엄마들은 다 그러잖아.” 이 말을 듣고서야 경주 엄마는 안도했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엄마와 아이가 서로에게 아무거나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자유 인터뷰 놀이에서 경주가 맨 먼저 물어본 말은 엄마는 무슨 일을 해?”였다. 교육시민단체 간사 일을 하던 경주 엄마는 평소 아이가 자신의 일을 궁금해한다는 생각을 미처 못 해봤고, (시민단체 간사라는) 자신의 일을 설명해도 아이가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막연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경주에게 최대한 친절히 엄마가 하는 일을 설명하자 경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필자가 인터뷰의 힘을 알게 된 것은 몇 년 전 난생처음으로 어머니를 인터뷰해보면서다. 2007년부터 한 인터넷 신문의 시민기자를 하면서 많은 작가와 교수 등 전문가들을 인터뷰해봤지만, 어머니를 인터뷰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이었다. 평소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받아 적어야겠다고 생각해 메모지와 볼펜을 들고 어머니의 말을 받아 적었는데, 그 순간 어머니의 눈빛이 달라졌다. 필자는 그때 처음으로 미디어가 가진 힘을 제대로 느끼게 되었다. 그 느낌은 필자만의 경험이 아니었다. 인터뷰 놀이를 경험한 한 엄마는 아이와 대화할 때 종이에 그 내용을 적어 내려갔는데 그걸 본 아이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지더군요. 자신이 하는 말을 엄마가 적는 모습에 적잖이 놀란 것 같아요. 태어나서 처음이니까요라고 말했다. 다른 엄마는 글로 옮겨 적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평소에는 지나쳤을 아이의 말을 하나하나 귀담아듣게 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요컨대 인터뷰 놀이는 부모와 아이를 모두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인터뷰 놀이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평소 궁금했던 것을 자유롭게 질문하는 자유 인터뷰가 있고, 책을 함께 읽으면서 책 내용을 주제로 인터뷰를 하는 책 속 인터뷰가 있다. 놀이를 하듯 아이의 속마음을 끄집어내려면 책 속 인터뷰가 제격이다. 하지만 책 내용과 평소 아이에 대해 궁금하던 점을 연결해야 하기 때문에 간단치 않다. 아이의 속마음을 열 수 있는 결정적 질문을 뽑아내려면 무엇보다 평소에 그냥 흘리곤 하는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리빙 라이브러리(Living Library)

 

200910월 어느 날, 프리랜서 작가 김수정이 쓴 <나는 런던에서 사람책을 읽는다, 도서출판 달>을 발견한다. 공부를 위해 런던에 머무는 작가가 신문 광고를 보고 참가한 리빙 라이브러리(Living Library) 참관기를 묶어 편집한 에세이집이다. 재밌고 신선하고 조금 충격적이다. 바로 이거야! 읽고 나서 무릎을 치면서 외친 말이다. 아르키메데스가 이런 감정이었을까?

난 대안학교 운영자이자 선생이다. 도대체 왜 많은 청소년들이 학교를 떠나는가. 서울만 1년에 1만 명이 자의든 타의든 학교를 떠난다. 믿어지는가. 1천 명이 아니라 1만 명이다. 88년 올림픽을 치른다면서 빈민촌을 강제 철거하면서 그곳 주민들은 서울 전역의 빌라 지하방으로 스며들었다. 탈학교 청소년도 마찬가지. 그렇게 많은 탈학교 청소년들이 보이지 않는다. 빗물 스미듯이 보이지 않는 곳에 가려져 있을 뿐.

청소년이 학교를 떠나는 것과 경제적 배경은 높은 상관관계를 가진다. 교사 입장에서는 그것만으로 해명되지 않는다. 고민은 계속된다. 프레임의 문제로 해석했다. 문자 프레임의 제도교육과 비()텍스트 프레임의 청소년들이 갈등을 겪는 현실이다. 내가 몸담은 대안학교는 탈()텍스트 교육과정을 지향한다. 결국 대화이다.

교사와 학생의 대화가 배움을 주고받는 과정일 수 있을까?(*배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것이다) 대화를 통한 교육과정은 결국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쌍방은 서로 다르다. 둘째 다르지만 조건 없이 상대를 인정한다.

리빙 라이브러리는 덴마크 사람 로니 아버겔이 2000년에 시작한 청소년 이벤트였다. 청소년 갈등 해결을 위한 흥미로운 프로그램으로 마련됐다. 그 단초는 아버겔이 어릴 적 많이 했던 진실게임’. 편견과 오해를 받기 쉬운 사람이 책으로 비치된다. 런던의 리빙 라이브러리는 미혼모, 깊은 우울증환자, 정신분열증환자의 가족, 종교 폐지운동가,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완전 채식주의자 등이 서가에 있다. 대화는 책과 대여자 모두를 행복하게 한다. 어떤 정보소통 통로보다 얼굴 보며 얘기하는 것이 명확하다. 대화하자는 사람은 싸우지 않는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우리 아이들은 오해를 산다. 그들이 먼저 대화를 제안하고 오해와 편견을 불러일으킬만한 분들을 책으로 모신다. 청소년 친구들은 장소와 사람책을 섭외하고 온라인 포스팅을 통해 광고한다. 자 어떤가? 짜릿한 관심이 생기지 않는가.

지난 226일 신촌 한 구석에서 책은 살아서 말을 했다. 유럽에서 쌓아올린 명성을 버리고 귀국한 광주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구자범, 민간인으로 가장 많이 평양을 방문한 민주노총통일위원장 황수영, 일본 내 조선족학교를 다룬 <우리학교>의 다큐멘터리 감독 김명준, 900일간 천막농성을 이어가는 대학강사 교원지위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본부장 김동애, 한국성적소수자 문화인권센터 활동가 리언, 일제고사로 해직된 초등교사 최혜원 등 14명의 책을 준비해서 살아 있는 도서관을 열었다.

찾아온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고 질문했다. 때론 반박도 했다. 대여자는 40분간 한 권의 책을 대여하고 사람책은 네 차례에 걸쳐 다른 대여자와 얘기했다. 그들은 즐거웠고 행사 주관자로서 아이들은 가슴 벅차다.

지리산 토굴에서 개인 정진을 하는 비구니가 있다. 아이들이 책으로 모시려고 찾아 갔지만 동안거로 인해 모시지 못했다. 그 분을 작년 늦가을 지리산 둘레길에서 만난 인연이 있다. 당시 누구나 한 권의 책이다를 리빙 라이브러리 소개를 위해 꺼냈다. 비구니는 듣자마자 굵은 눈물을 흘린다. ‘누구나 한 권의 책이다는 말이 가슴을 울린다면서.

우리 아이들은 리빙 라이브러리를 희망제작소의 사회창안대회에 제안 내용으로 제출해서 상을 탔다. 창안 내용을 실천하고 보고하는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명사와 만남과 리빙 라이브러리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

이렇게 대답했다.

"명사와 만남은 일방적인 강의나 강연이지만 리빙 라이브러리는 사람책과 대여자가 어떤 사람이든 둘 사이가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화 당사자 간 평등한 경험이 없습니다. 부부 간, 부모 자식 간, 형제 간, 교사 학생 간 모두 위계를 가진 사이에서 일어나는 주장과 지시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리빙 라이브러리의 단순한 포맷에서 이루어지는 평등한 대화는 사람들에게(책이든 대여자든) 감동을 안겨줍니다. 그 감동은 서로를 이해하고 손잡고 평화로 나아가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리빙 라이브러리 서가로 오시라.

 

운동/독서/여행/놀이

 

운동 : 10대에게 가장 중요한 네 가지는 운동, 독서, 여행, 놀이라고 합니다. 순서는 의미가 없지만 굳이 따지자면 운동이 먼저라고 생각됩니다.

운동이 몸을 건강하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뇌 발달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항목입니다. <브레인룰스>에서는 런닝머신 위에서 걸으면서 업무를 보거나 공부를 하라고 할 정도로 운동과 뇌활동은 밀접하게 연동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학교에서는 어떻게 아이들과 운동을 할 것인가? 그리고 운동을 교육과정에서 어떻게 위치시키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입시에 시달리는 아이들은 운동을 포기하거나 자정에도 문을 여는 헬스장이나 검도도장에서 잠시 땀을 흘리는 형편입니다. 업무에 치이는 종합상사 영업직원이나 일일드라마 PD보다 더 바쁜 게 입시생들입니다.

매일 산책(빨리 걷기+명상 걷기)을 일정 시간 하고, 테니스처럼 기능이 필요한 경우는 '레포츠 프로젝트'를 마련하여 누구나 한 가지 이상 특기라 말할 수 있는 수준의 운동종목을 갖도록 합니다. 청소년에게 수영은 가장 이상적인 운동으로 적극 권장합니다.

 

독서 : 운동, 독서, 여행, 놀이-이 네 가지는 청소년 시기(12~18)에 빼놓을 수 없는 실천과제입니다. 12세 이전 아동들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청소년시기에는 반드시 해야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성적 성장을 위한 전두엽(특히 전전두엽)의 발달이 12세에서 18세 사이에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청소년 시기는 그동안 뇌과학에서 사각지대였습니다. 해부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90년 이후로 각종 장비의 발달로 살아있는 청소년의 뇌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됐습니다. 비로소 전두엽 발달 시기에 대해 알게 된 것입니다.

아동기에 정서적 안정으로 뇌발달의 토대를 마련하면 청소년 시기에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전두엽이 본격적으로 발달합니다. 흔히 말하는 공부머리는 아동기가 아닌 청소년기에 발달합니다. 아동기의 정서적 안정(사랑받고 자라는 것)이 청소년기에 직결되므로 아동기가 매우 중요한 것은 당연합니다. 다만 아동기에 학습력이 뒤떨어진다고 해서 끝까지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보편적이 경우보다 학습력을 뒤늦게 끌어올리는 친구들에게 핵심적인 실천과제가 독서입니다. 우리는 "독서"에 대하여 매우 세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독서가 독으로 작용하지 않지만 독서 때문에 상처가 더욱 커지거나 학습부진이 심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서를 책읽기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Reading"은 책읽기 범위를 넘어서 "해석""분석"을 포함합니다. 개념의 구조화와 재구조화가 목표지점입니다. 그렇기에 독서는 언어를 도구로한 정보소통을 의미하며, 음성언어 즉 듣기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다시말해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를 모두 포함한 정보소통을 독서로 표현한 것입니다. 인류 문화사를 10만 년으로 볼 때 문자를 활용한 정보소통은 길게 잡아 4천 년, 짧게 잡으면 1천 년 미만입니다. (1945년 해방 당시 우리 문맹률은 90%, 즉 문자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인구는 전체의 10% 정도였다) 1천 년 전으로 돌아가면 독서 대신 대화를 청소년 필수과제로 바꿔 말해야 할 것입니다.

학습부진을 보이는 청소년들은 거의 대부분 결정적 시기(생후 1~4)에 말하기, 듣기가 절대부족했던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시기를 지나 강제적으로 읽기가 진행되면서 이미지이자 기호인 문자에 대한 반감이 극대화한 경우입니다.

쉽게 풀어 말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악보를 보고 노래하지 못합니다. 악보독해력이 매우 약한 경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뮤지컬처럼 노래를 부르며 의사소통을 하는데, 교사는 악보를 계속해서 제공하며 왜 노래를 부르지 못하냐고 여러분 자신을 몰아세운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여러분은 비웃음을 받으며 연달아 악보로 된 시험지를 받습니다. 4분 음표와 8분음표, 쉼표를 구분할 수 있지만 그것을 연결하여 노래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바보가 됩니다. 원인은 여러분이 결정적 시기에 충분한 노랫소리를 듣지 못했고 스스로 노래를 부르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노래를 부르려고 하면 시끄럽다고 늘 야단맞았기 때문입니다. 제도학교는 늘 2분쉼표와 온쉼표를 구분하는 문제만 들어있는 페이퍼 테스트로 평가를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학습부진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학습단계에서 뒤쳐진 청소년이 얼마든지 공부 역전할 수 있지만 그 방법이 책을 읽게 하는 것은 문제를 악화시키는 길입니다. 한동안 책이나 학습페이퍼를 보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대화를 통해 그들이 충분히 말할 수 있게 해야합니다. "졸라~"를 접두사로 붙이는 말하기가 아니라 관찰한 것(사물, 상황, 감정, 맥락)을 자기 언어로 표현하게 하고, 표현 후 다시 관찰하게 하며, 일차 관찰과 이차 관찰의 차이를 다시 표현하게 해야합니다. 즉 처음 일 년간 교육과정은 비문자로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쓰기가 가능합니다. 쓰기 분량이 충분히 늘어나면 읽기가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듣기는 전 과정에 걸쳐 작용합니다.

독서는 꼭 필요한 전략적 목표입니다. 다만 학습부진을 보이는 청소년(아동도 마찬가지지만 구체적 치유방법은 다르다고 봅니다)들에게는 독서에 도달하기 위한 전술을 탄력있게 적용해야합니다. "독서를 위한 비독서"가 충분히 용인되는 배움터가 필요합니다.

 

여행 : 전두엽은 생후부터 꾸준히 발달하지만 12세에 이르면 그 구조와 네트워크의 재탄생이 이루어지는데 본격적인 공부를 위한 일종의 물갈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피아제가 말한 구체적 조작단계에서 형식적 조작 단계로 넘어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층 높은 사고력을 위한 뇌(전두엽)의 재탄생입니다.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이 위의 4가지라는 얘기입니다.

여행은 언제, 어떻게, 왜 교육과정에 편성되는가?

공부는 '세상에 대한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행으로 단박에 깨닫는 '돈오'처럼 '해석'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학습을 통해 해석의 넓이와 깊이가 점점 커집니다. 해석학의 태두 가다머(1900~2002)는 학습을 "낯선 것과 친숙함의 변증법적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낯선 것과 만남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경험을 부단히 확장시키고 풍부하게 해나가는 것을 해석학의 중심으로 삼은 것입니다. 낯선 사실이 이해가 되면 그것은 나에게 친숙한 것이 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이해의 폭을 계속 넓혀가는 것입니다.(손승남, 가다머의 해석학과 교육, 2004)

가다머의 생각이 헤겔의 변증법 틀을 사용한 것이라면, 헤겔이 말한 '스스로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하기(sich einhausen)'를 인용해야 합니다. 집처럼 편안한 상태로 스스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며 학습의 전제입니다. 불안한 상태에서는 어떤 학습도 진정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편안하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불편한 것에 의해 규정됩니다. 삶의 모든 시간이 편안하다면 어찌 편안함을 인식할 수 있겠습니까.

가다머가 말한 낯섦과 친숙함의 변증법적 발전과정은 낯섦을 마주하는 불편을 감수할 때 학습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새로운 세계와 기존 세계의 경계에 설 때 사고와 학습이 발생합니다. 공부과정은 그러한 경계의 연장선을 걷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행이 어떻게 학습이 되는가를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최근에 '로드스쿨러'라는 새로운 명칭이 생길 정도로 여행을 학습과정의 근간으로 삼겠다는 학생과 학교가 생겼습니다. 여행의 과정이 늘 새롭고 낯선 것과 대면하는 과정이니까요. 경계의 연장선이 여행의 '로드'가 될테니 여행은 곧 학습이라는 주장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행을 화두로 삼은 것은 청소년기 전두엽 발달을 위한 필수요소로 언급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행이 곧 학습이라는 명제는 하나의 은유입니다. 학습은 인간의 뇌에서 일어납니다. 여행은 학습이 가능한 뇌를 만드는데 적극 기여한다는 것이지 그 자체가 학습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학교 교육과정에서 여행의 자리매김을 위해 여행의 개념을 확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늘 집과 학교를 떠나 여행만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여행의 개념을 '학습자에게 "경계"를 제공하는 기회'로 확장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1주일 이내의 단기여행부터 보름 이상의 중장기 여행이 실행되어야 합니다. 학습효과는 여행을 다녀온 후가 더 중요합니다. 여행의 경험이 기존의 친숙함(기존 배경지식)과 부딪혀 변증법적 발전을 이루려면 언어의 역할이 절대적입니다. 여행과정을 기록하고, 정리하여 발표하며, 관련 도서를 찾아 읽어야합니다. 읽은 것은 다시 말과 글로서 정리하고 발표할 수 있어야합니다.

결국 대화(인터렉티브 글쓰기를 포함하여)를 통해서만 학습이 가능하다는 가다머의 주장은 옳습니다. 운동, 독서, 여행, 놀이를 모두 관통하는 것은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놀이 : 청소년기 전두엽 발달을 위한 필수요소-운동, 독서, 여행, 놀이-중 마지막으로 놀이의 중요성에 대해 살펴봅니다.

뇌과학자들은 인간관계의 협약, 사회적 규약을 자기 안에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사춘기 청소년들의 혼란을 정리하는데 가장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판단한 공정성의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흔들리지 않는 가치관을 형성하는 것은 정서적 안정을 가져오고, 정서적 안정은 전두엽 발달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뇌에 관한 이러한 과학적인 해명은 놀이의 중요성이 드러나는 일입니다. 놀이는 혼자서 하지 않습니다. 혼자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은 "놀이"로 보기 어렵습니다. 사방치기이든 자치기, 구슬치기이든 상대방이 있고 그에 따른 규칙이 있습니다. 규칙을 서로 합의하여 정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놀이요소입니다. 합의한 규칙은 권위를 가지며 아이들이 그 규칙을 지키려고 애쓰는 과정이 놀이입니다. 그래서 놀이는 아이들이 무의식적으로 인간관계 형성의 기본을 습득하도록 합니다.

놀이운동가 편해문의 말을 들어보는 것은 유용합니다.

 

놀이는 머리 좋아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놀이의 대명제를 망각하지 않기를 진정 바란다. 놀며 학습한다는 말만큼 기만적인 말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말은 사기로 물건 팔아먹는 장사꾼들이 하는 말이다. 놀이는 놀이일 뿐이다.(민들레 63)

 

놀이의 중요성은 놀이가 놀이일 뿐일 때 빛나는 것입니다. 놀이를 통해 학습내용을 외우거나 직접적인 태도교정을 바란다면 더 이상 놀이가 아닙니다. 놀이가 놀이일 뿐이라는 것은 여럿이 함께 일련의 과정을 수행하기 위해 사람들은 어떻게 관계를 맺을까를 배울 뿐이라는 말입니다. 아이들은 호혜 평등한 관계 맺기에서 많은 기쁨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놀이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노력을 통한 기술의 습득이 필요하지 내게 유리한 규칙이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놀이는 사회구성원으로 성장하기 위한 필수영양소입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컴퓨터게임을 떠올립니다. 게임도 놀이인가?

우리가 말하는 놀이는 아이들이 시간을 때우거나 스트레스를 푸는 모든 것이 아니므로 게임은 놀이가 아닙니다. 다시 편해문의 말을 들어봅니다.

 

아이들은 영혼을 팔아 점점 더 그 세계로 확실히 들어갈 수있는 입장권을 사려 하고 있다. 게임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게임 앞에서 필요악이라느니 부모도 공부해야 한다느니 하며 고상한 척 하지 마시기 바란다. 아이들은 이제 들고 다니며 게임하는 시대를 맞이했다. 나는 부모와 아이들을 둘러싼 전쟁은 이제 거의 끝났다고 본다. 아이들(게임산업)의 완전 승리가 눈앞에 있다. 이 불경기에도 게임산업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 들고 다니면서 하는데 어떻게 아이들에게 말을 붙이며 어떻게 따라 다닐 것인가. 그리고 그런 아이들과 어디까지 대화할 수 있겠는가.(중략)

나는 컴퓨터게임이 가진 폭력성에 걱정의 무게를 크게 두지 않는다. 폭력성을 이야기하다 보면 더욱 중요한 폐해를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진짜 위험은 그런 대 있지 않다. 그것은 관심 없음에 있다. 인간이 느끼는 이러저러한 사랑, 우애, 슬픔, 연민 등의 감정에 그만 무심해진다는 말이다. 이것이 컴퓨터게임이 지닌 가장 큰 해악이다. 그러다가 문을 닫고 들어간다. 부모로서 그 뒷모습을 본다는 것은 참 힘겨운 일이다. 감정의 쪼글쪼글한 골들을 밋밋하게 만드는 게임을 무엇으로 벌할 수 있단 말인가.(민들레 63)

 

확실히 컴퓨터게임은 어울려 사는 세상을 만드는데 방해꾼입니다. 놀이는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만드시 거쳐야하는 관문입니다. 게임과 놀이는 이렇게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아이들과 노는 시간을 반드시 갖길 바랍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아이들끼리 놀 수 있도록 놀이판을 깔아주는 것이며, 새로운 학교는 제도학교와 달리 놀이를 교육과정 안으로 가져와야 할 것입니다.

 

# epilogue

 

흔히 혁신학교와 대안학교의 공통점을 말씀하십니다. 사실상 혁신대안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혁신은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일 테니까요. 여기서 우리가(대안교육진영이) 자주 오류에 빠진 경우를 끝으로 말씀드립니다. 무수히 많은 실례들을 말씀드릴 수 없기에 <소유는 춤춘다>의 저자인 경제학자 홍기빈의 얘기를 옮깁니다.

제가 2009년에 홍기빈 강연에 참석해서 들은 경험입니다.

홍기빈은 "울화와 돈"이라는 주제로 1시간 정도 떠들었습니다. 그는 한겨레21에서 해마다 벌이는 소위 인터뷰 특강4번 째 강사였지요. 그해 인터뷰 특강의 주제는 "". 진중권과 정재승은 분노로 를 해석했지만 홍기빈은 불로서 를 풀어냈습니다.

경제학자로는 놀랄만한 전통의학과 동양철학의 지식을 뽐내며 우리 사회 부의 편중을 비판하는, 매우 색다른 대중강연으로 이끌었습니다. 강연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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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불이 원만하게 순환해야 인간이든 사회든 건강해진다. 여기서 물과 불은 메타포이다. 돈은 불이라 할 수 있다. 돌고 돌아 돈이라는 해석이 적절하다. 불의 성질을 갖는 돈이 돌지 못하고 한 곳에 쌓이게 되면 울화가 돼서 사회의 건강을 해친다. 금융이란 돈을 모아두는 기능이 아니라 돈이 잘 돌게 도와주는 역할인데, 전세계적으로 은행들이 엉뚱한 이익사업을 벌려서 오늘의 글로벌 경제위기를 맞았다. 돈이 밑으로 흘러 (인위적이라도) 저소득 노동자의 주머니에 흘러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저소득 노동자의 구매력을 끌어올려야) 개인적 울화도 풀리고 사회적 건강성도 되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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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은 기발한 접근으로 신선했지만 감동적이진 않았습니다. 실제 하고자 하는 얘기는 1~2줄로 요약되는 얘기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감동받은 것은 강연이 끝나고부터. 강연 후에 20분 정도 청중의 질문을 받고 대답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청중의 질문 사이에 사회 보는 오지혜가 끼어들었습니다.

"비유적 표현은 많이 하셨으니 우회적이 아니라 경제학자로서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이 있나요?"

잠깐 동안 생각하던 홍기빈이 명품 대답을 했습니다.

"’대안이 있나요라는 말은 정치적으로 영국 대처 총리가 즐겨 사용했습니다. 이런 가정은 어떤가요? 새벽3시에 잠자는 아이를 깨운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폭탄주를 따라주며 같이 술을 마시자라고 권유 아닌 강요를 합니다. 이에 아이들은 잠이 덜 깬 채 아빠, 말도 안 돼!’ 하며 거부할 것입니다. 이 때 아이들에게 아빠가 하는 말, ’그럼 니들 대안은 뭔대?’ (청중들 폭소) , 이럴 때 아이들은 어떤 대안을 말할 수 있나요? 그러니까 이런 것이죠. 산하를 파헤쳐 운하를 파겠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절대 안 될 일이라고 반대합니다. 이 때 2MB가 말하는 겁니다. ’그럼 대안이 뭔 대?’ (또 다시 폭소)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비로소 잠이 깬 아이들이 아빠한테 폭탄주 대신 맥주를 마시자고 하는 겁니다. 대안으로 말입니다. 돈을 벌어야 경제생활이 가능하다는 프레임에 갇히면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대운하를 파겠다는 2MB니들 대안은 뭔 대?’하고 물었을 때, 대답해야만 하는 강박에 시달립니다. 돈과 관계없이 잘 돌아가는 경제도 있습니다.(후략)"

나도 한참을 웃었습니다. ’대안때문에 내 머리에는 대안교육’, ’대안학교가 따라왔습니다.

우리의 대안은 뭔 대? 늘 물어오지 않았던가.

우리는 그 동안 혹시, 폭탄주 대신 몸에 해가 덜할 것 같은 맥주를 대안으로 추천한 것은 아닐까?

마찬가지로 혁신을 운운한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여전히 혁신의 정체성과 혁신이 교사에게 적용돼야하는지 학생에게 적용해야하는지 또는 학교행정에 적용해야하는지 알 수 없는 미로에 빠져있다면 홍기빈이 말한 폭탄주와 맥주의 메타포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학교 밖에서 청소년을 만나는 또 다른 교사로서 공교육의 혁신 사업을 열렬히 응원합니다. 선생님 모두 늘 건승하시기 바라며 졸고를 마칩니다.

 

 

 

학교_혁신의_나아갈_길을_묻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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