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방랑자
[박준규] 야매여 영원하라 본문
부산대 근처에 인문학 카페를 표방한 <카페 헤세이티>가 있다. 스타 철학자 김영민과 함께 공부하는 모임이 사용하던 공간을 황경민 시인이 이어받아 4년 동안 운영하고 있다. 황경민 시인은 카페를 열자마자 A자 모양으로 판자 두 개를 경첩으로 붙여서 입구에 세울 수 있는 입간판에 짧은 말(아포리즘)을 써놓았다. 카페 홍보물이 전혀 아니다. 쉬운 일상어와 부산 토박이말로 이루어진 100자 안팎의 경구는 새로운 장르의 글쓰기라 뭐라 공인된 이름은 없고 사람들 사이에 “입간판 시詩”로 통용됐다.
입간판 시의 내용
불안한 청년들을 위로하는 말, 사회적 약자를 대신 한 말, 청와대를 향한 날카로운 말,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를 드러내는 말, 학교교육의 근본적 한계에 대한 일침의 말, 가진 자 있는 자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의 말, 지역문화운동에 대한 애정 어린 응원의 말, 밀양/강정/쌍차/스타케미컬/부산생탁 싸움의 본질을 확인하는 말, 외로운 이들에게 건네는 연대의 말, 평화가 투쟁과 다르지 않다는 말, 세월호에 대한 통곡의 말, 박근혜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깃발을 각인시키는 말, 자본주의 속내를 까발리는 말들을 적다보니 2000장의 모조지가 쌓였다. 2000장 사이에 헤겔이 있고 맑스가 있고 니체, 쇼펜하워, 벤야민, 라캉, 푸코, 부버, 들뢰즈, 일리치가 숨을 쉰다. 또 노장이 있고, 쑨원, 최제우, 예수, 싯달타도 살고 있다.
‘야매’의 탄생과 성장
소문은 온라인을 타고 빠르게 번져서 <카페 헤세이티>와 운영자 황경민, 그리고 카페의 마스코트 고양이 헤세는 SNS의 유명세를 탔다. 돈도 없고, 자동차도 없고, 운전면허증도 없고, 아내 자식도 없는 중년의 황경민 시인은 작곡도 하고 기타를 치며 노래도 한다. 얼마 전 서울 망원동의 <카페 달빛홀린두더지>에서 단독 콘서트도 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야매 싱어송라이터라고 칭한다.
“야매”는 황경민의 유명세와 함께 황경민을 대변하는 아이콘이 돼버렸다. 야매정신에서 야매주의까지 발전하다가 지난 1월9일엔 <카페 헤세이티> 신년회 주제가 “야매란 무엇인가”로 결정됐다. 보고 싶은 얼굴 서로 맘껏 보는 것보다 더 좋은 신년덕담은 없을 것이란 생각이다. 영화 부러진 화살의 주인공 박훈 변호사가 “야매란 무엇인가”, <슬픔을 권함> 남덕현 작가가 “나는 어떻게 야매가 되었나”, 장흥에서 <게스트 템플> 불사를 일으키는 무영 스님이 “야매마실수행에 대해서”, 제주에 사는 이순호 시인이 “야매목수의 내집짓기”, 함평에 사는 박남일 작가가 “지역에서 야매로 사는 법”, 유현웅 관광요트 선장이 “야매코메디마술”을 펼쳐보였다. TED의 헤세이티 버전이라 할만하다. 야매 타이틀을 뗀 유일한 참가자가 김민서 낭송가의 시낭송이다. 그가 낭송한 문병란 시인의 <직녀에게>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한동안 김민서의 목소리가 전두엽에 찰싹 붙어있을 듯하다.
등급의 세계 밖에 사는 야매의 정신
서사시 『한라산』과 소설 『양철북』의 이산하 작가가 “야매가 필요한 이유”를 제목으로 이야기를 할 예정이었으나 작가의 사정으로 오지 못하여 이산하 작가는 만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야매가 필요한 이유를 생각하게 되었다.
야매란 낱말이 야매스럽다.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은 야매강사들은 야매野梅, 야매野昧, 야매冶每로 각각 풀어내기도 했다. 일상에서 쓰는 야매란 말은 보통 “B급”을 말한다. 야매가 야매로서 활약하려면 결코 C급이어서는 안 된다. 야매의 B급성은 A급을 거부하기 때문에 붙여진 등급일 뿐이고 야매는 등급을 거부하고 등급의 세계 밖에 있다. 등급의 세계 밖에 있다는 성격이 야매가 꼭 필요한 이유가 아닐까싶다. 야매는 등급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때문이다.
등급의 세계는 A급을 향해 달려가는 세계다. A급에게 권위를 쥐어주는 세계다. A급이 나머지를 지배하는 구조를 메리토크라시라고 부르며 민주주의의 참모습으로 착각하는 세계다. A급을 향해 노력을 경주하는 과정이 참된 경제라고 부르는 세계다. 그러나 등급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A급을 향해 달려도 A급이 없으며, A급의 권위 위에 A+급 권위가 존재하고, 메리토크라시는 클렙토크라시(깡패정치)의 가면일 뿐이며, A급을 향한 에너지로 돌아가는 경제는 실물 없는 금융지배체제로서 붕괴가 필연이다. 등급의 세계의 깔대기는 전쟁으로 수렴한다.
야매의 힘, 등급의 세계가 지닌 폭력성을 제거하다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 주인공 바스티안이 책 속의 판타지 세계 속으로 들어갔기에 현실의 세계를 구원한 것처럼 등급을 거부하는 야매의 세계가 등급을 신봉하는 세계를 도와준다. 당장의 지금여기가 붕괴되지 않도록, 부실하지 않도록, 웃음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자들이 야매들이다.
에르메스나 샤넬 가방이 아니라 야매 가방을 들고 다니는 자들이 에르메스와 샤넬의 권위를 낙후시킨다. 수천 만 원 가격표 라벨이 권위인 세계에서 야매 가방이 가격표를 무력화 시키지만 사람을 해치진 않는다.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시장통에서 돌아다니는 에르메스 샤넬 구찌 루이비똥 야매들은 웃으면서, 가볍게 세상을 구원한다. 황경민 시인이 자칭 야매 싱어송라이터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야매 예술인이 4가지 코드로 곡을 만들고 거칠게 노래를 부르는 것은 가창예술을 해방시킨다. 싱어송라이터가 TV상자 안에서 대형기획사 사장들 앞에서 심사 받거나 복면을 뒤집어쓰고 평가단 앞에서 등급이 매겨지는 상황은 고가의 가방을 든 사모님을 대부분 인민들이 부러워하게 하는 등급의 세계에서나 있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학교라는 권위를 웃으면서 해체하려면, 그리고 제도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와 학생들이 다치는 일 없이 구원하려면 학교 밖 야매학교가 필요하다. 등수가 없는 학교, 자기표현이 자유로운 학교, 어떤 꿈도 소중한 학교가 야매학교다. 대안학교의 이름은 오히려 촌스럽다. 야매에 대한 오해가 없다면 당연히 야매학교라고 일컫고 싶다.
상상해보라. 야매의 세계가 없는 A급 세계, 똘똘한 세계, 정상의 세계라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다. 낙후시키자. 야매가 “A급 세계, 똘똘한 세계, 정상의 세계”를 낙후시키지 않고는 모두 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야매가 더 뭉치고 야매가 더 많아져야 한다.
야매만이 희망이다. 야매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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