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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방랑자

[박준규] 전에 없던 어린이 청소년의 새로운 행동 본문

책/[책]좋은 글은 심금을 울린다

[박준규] 전에 없던 어린이 청소년의 새로운 행동

gunbbang 2016. 3. 9. 09:31

전화기가 울린다. 지인으로 등록된 번호가 아님에도 스마트한 전화기는 발신자가 누구인지 알려줬다. “○○초등학교개인이 아닌 학교의 번호였다.

 

 

 

아이가 복귀한 학교에 걸려온 전화

 

전화한 분은 내게 와서 4개월 동안 공부하고 일반학교로 복귀한 아이의 새 담임선생님이라고 소개했다. 원래 다녔던 학교에서 인근 학교로 전학한 모양이다.

아이가 32일 첫날부터 삼일 내내 급우들을 때리고 수업 시간에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자기를 제지하는 담임선생님의 팔을 물었다고 한다. 나와 지낼 때 문제없이 잘 지냈다고 들었는데 아이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 전화했단다.

교직 경력 20년이라는 중견 여자 선생님에게 많이 힘들었겠다고 위로의 말을 전했다. 20분 정도 여러 얘기가 오고 갔다. 힘으로도 감당이 안 되고 무엇보다 학부모들의 항의가 빗발칠 게 분명하기 때문에 아이를 계속 맡는 건 어렵다는 말을 한다. 한 치 건너 있는 내가 들어도 아찔한 기분인데 아이의 엄마가 이런 담임 전화를 받을 때 아연실색할 게 뻔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상황에 따라 연기할 줄 아는 아이

 

이 아이가 4개월 만에 내 곁을 떠난 이유는 교육비를 낼 형편이 못 되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내 형편이 매우 어려우니 공교육 학교로 돌아가도록 했었다. 못난 딸 시집보내 듯 아이와 엄마에게 따로 주의할 사항, 유념할 내용을 한 보따리 딸려 보냈다. 특히 엄마에게 매우 냉정해져야 하고 중장기적으로 아이와 인연을 끊는 과정을 수행해야 할 것이라고 당부 아닌 경고를 했다.

왜냐하면 이 아이의 도발이 모두 엄마에게 수렴되는 사이클로 보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급우와 처음 보는 놀이터의 또래는 물론이고 박물관 관리요원이나 방과후교실 선생님 등 어른에게도 악다구니를 쓰며 소리 지르고, 어른이 제지하면 몸부림을 치고 발로 차기도 한다. 물론 가끔 일어나는 일이다. 가끔 일어나는 일이 32일부터 3일 연속 일어났다고 하니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그런데 이 아이가 자기를 완벽하게 제압하는 상대에게는 절대 도발하지 않는다. 어른 중에는 나에게 도발하지 않고, 또래 중에는 가장 완력이 세고 고민 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친구에게는 억울한 일을 당해도 웃음으로 처리한다. 이 아이는 스스로 분노조절장애’ ‘트라우마단어를 쓰면서 자신을 변호했었다. 초등3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즉 자신은 일단 분노가 일어나면 자기 힘으로 조절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니 이해해 달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아이의 거짓말이라고 봤다. 여기 저기 치료소를 전전하며 주어들은 말을 조합해서 아이가 자기변명을 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왜냐하면 자기가 당장 제압당하고 확실한 불이익을 당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대에게는 분노조절이 매우 잘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허세 작렬과 허세가 꺾일 때 희생양을 만드는 방식

 

생활의 대부분은 똘똘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배려 깊은 아이가 가끔 이해 안 되는 발작 수준의 도발을 한다. 도대체 왜 그럴까. 나에게 큰 공부가 된 사례다.

이 아이는 허세가 작렬이다. 세배로 받은 현금 7만원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주변 아이들에게 슬쩍슬쩍 보여주면서 으스댄다. 마치 큰돈의 일부를 쪼개어 주변 친구들에게 선심을 쓸 것처럼 분위기를 만든다. 대개 아이들은 자기에게도 떡고물이 떨어질 것 같은 소비 능력이 있는 사람(어른이나 아이나)에게 친절을 베푼다.

이 아이는 감당이 되는 수업 내용에는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비교열세에 있는 수업에는 강한 반발을 한다. 수업에 대한 호불호가 교사에게 칭찬 받을 가능성 여부로 결정된다. 사정권 안에 있는 수업은 우등생으로 인정받으려고 애를 쓰지만 그렇지 않다고 판단되면 수업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런 아이들이 보통의 경우 칭찬보다는 지적을 받는 일이 많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평가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뜻대로 인정을 받지 못할 때 자존감이 크게 추락하는데, 이를 감추기 위해 희생양을 만든다. 자신의 실패를 제공한 원인제공자를 만들어 내는데 가장 많은 경우가 엄마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게 모두 엄마 때문이야.” 엄마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다. 발달에 대한 퇴행적 형태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나이에 비해 어린 단계에 머무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아이가 사춘기에 이르면 엄마에게도 폭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다.

대부분 어른들은 처음 보는 현상이기 때문에 무척 당황한다. 아이들이 밖에서 사고를 쳐도 집에서는 자신의 행동을 숨기는 법이었지만, 이제 밖에서 하는 행동을 집으로 끌고 들어오는 아이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아이가 정신과 질환 판단을 받으면 오히려 엄마는 좋아한다?

 

내가 소개한 아이도 늘 엄마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한다. 과연 진실일까. 사랑하기에 미워한다는 말장난 같은 모순적 표현을 어찌 해석할 수 있는가.

아이들과 오랜 시간 가까이서 생활하면서 관찰한 내용은 무척 당혹스런 내면을 보여준다. 아이들의 행동을 해석한 후에도 한동안 확신할 수 없었는데, 로버트 트리버스가 쓴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진화생물학의 눈으로 본 속임수와 자기기만의 메커니즘)”를 읽으며 판단을 결정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휴.... (숨 한번 쉬고 갑시다)

사랑한다. 사랑하는 그 사람이 원한다. 그래서 미워한다.”

엄마와 아이가 처한 상황이 비슷하다면 엄마와 아이가 공생한다. 우리는 아이의 상황만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이가 자신의 욕망에 스스로 부응하지 못할 때 탓을 할 수 있는 사람이나 상황을 만드는 것을 목격한다. 엄마에게도 마찬가지 기제가 작동한다. 엄마가 자신의 상황에 불만이 있을 때, 불만스런 상황을 제공한 사람이나 상황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에게 칼을 겨누며 너무 우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놈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꼬였어!” 이런 말이 큰 위안이 된다. 그 상대가 남편일 수도 있지만 때때로 자신의 아이인 경우가 의외로 많다.

특히 아이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서 아이도 힘들고 엄마도 힘들 때, 병원의 진단이 위로가 된다. 의사가 아이에게 ADHD 소견이 있다고 하거나 각종 병적인 장애(자폐/아스퍼거/뚜렛/학습지체 등) 판정을 받으면 엄마는 판정 전보다 훨씬 심리적인 안정을 취하는 경우가 있다. 아이의 문제는 현실인데, 그 문제에 대한 엄마 자신의 책임에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장애가 있다는 것은 엄마의 양육태도나 양육환경을 넘어서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판정을 받고 나서 엄마가 할 수 있는 대처방법은 열심히 병원에 데리고 다니고 약을 먹이는 것이다. 자신의 책임이 아니고 대응법도 명확해지기 때문에 심리적 안정을 얻는다.

 

 

 

아이를 무한책임 져야 하는 세상이 엄마와 아이 관계를 왜곡시킨다

 

이런 엄마들의 태도는 자녀에 대한 관리자 역할이 부각되는 환경에서 기인한 것이다. 90년 대 들어 세계화’, ‘무한경쟁시대’ ‘글로벌 인재등이 화두가 된 것은 마을의 소멸을 말하는 증표가 되었다. 드라마 응답하다 1988’의 쌍문동이 마지막 마을의 모습일 것이다. 드라마 속 인물들도 여유가 있다면 강남으로 이사하거나 분당이나 일산 신도시로 이주하듯이 이웃집 사정을 서로 알고 직접 교류하는 마을은 모두 사라져 버린다.

이제 아이들은 이웃집에 가지도 않고 가서도 안 된다. 다른 집 아이 소식을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다. 내 아이는 당연히 내가 무한책임진다. 어른이 된 내 아이의 성공과실을 내가 독차지 한다는 사회적 약속으로 부모의 교육투자가 당연하고 부모의 성격도 양육자에서 관리자로 변하게 된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엄마와 아이는 마치 기업의 마케팅팀장과 팀원의 관계로 만난다. 팀장과 팀원은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팀장의 리더쉽이 팀원에게 중요하다. 팀원의 영민한 활동이 없다면 팀장이 존재할 수 없다. 반대의 경우는 어떤가. 리더쉽이 흔들리는 팀장과 실적이 부진한 팀원이라면 서로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말이다. 흔히 예상할 수 있는 모습이 자신의 부진 원인을 상대에게 돌리는 것이다.

 

 

 

엄마가 사회구조적 궤변을 떨쳐내고 당당할 때, 아이도 성장할 수 있다

 

많은 엄마와 아이의 관계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팀장과 팀원의 모습이다. 엄마가 아이의 성공을 바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만약 아이가 엉망진창일 경우도 엄마에게 기여하는 것이 있다. 아이의 부정적 태도가 엄마의 부끄러움을 감춰주는 것이다. 엄마 인생의 꼬인 스텝의 원인제공자가 됨으로서 엄마의 심리적 책임을 면하게 해준다. 그것도 일종의 엄마에 대한 기여다. 엄마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아이의 역할에 기대어 동정을 받으려는 모습인 경우가 있다.

그건 엄마의 착각이라고 말하고 싶다. 처음부터 엄마의 책임이 큰 것이 아니다. 아이의 부정적인 행동에 대해 엄마가 책임질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건 네 새끼 네가 책임져야한다는 사회적 추궁에 의해 만들어진 궤변이다. 따라서 사회 구조적 궤변을 떨쳐내야 할 필요가 있다.

아이의 속상한 행동에 엄마가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아이는 더욱 엄마를 비난한다. 엄마도 아이의 나쁜 행동에 자신의 허물을 책임지게 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한국의 엄마라면 낳고 그 정도 정성으로 키운 것만으로 언제나 당당해도 된다. 아이의 문제는 엄마에게 있는 원인이 아니다. 아이에게도 엄마와 연결 고리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줘서 아이가 착각에서 벗어나도록 해줘야 한다. 다시 말해 엄마는 아이에게 난 네 행동에 대해 책임질 일도 없고 책임질 생각도 전혀 없다고 말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가 빨리 정신 차리고 부정적인 행동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원인-결과의 조합은 대개 거꾸로 인 것이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결과에 의해서 기존에 우리가 생각했던 원인이 만들어진다. 이것이 중학생이 되면 엄마가 정을 끊어야한다는 말의 이유인 것이다. 초등학생 때 지켜만 보고, 전폭적인 지원은 유치원 때까지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