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방랑자
[박동섭] 제자가 된다는 것 본문
일본의 전통 악극인 능악(能楽)에 『장량(張良)』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중국 한나라 시대에 이름을 떨친 장군인 장량이 젊은 시절에 황석공이라는 노인으로부터 『태공망비전의 병법 극의』를 전수받았을 때의 에피소드를 극화한 것입니다. 중세의 일본에서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 예술 전수의 깊은 비결에 관해 말할 때 자주 드는 일화입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입니다(아주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무예를 익히며 낭인처럼 지내던 젊은 장량이 황석공이라는 비칠비칠한 노인을 만납니다. 노인은 젊은데도 열심히 수행하는 장량을 갸륵해하며, 자신이 꿰뚫고 있는 태공망비전 병법을 전수해주겠다고 말합니다. 이에 장량은 기꺼이 ‘선생님, 선생님’하고 몸을 아끼지 않고 바지런하게 봉양을 하게 됩니다만 이 노선생은 그렇게 말만 하고 그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 무엇도 가르쳐주지 않자 장량은 점점 초초해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량이 거리를 걷고 있노라니 저쪽 편에서 황석공이 말을 타고 오고 있었습니다. 장량 앞에까지 오자 노인은 ‘툭’하고 오른쪽 신발을 떨어뜨렸습니다.
“주워서 신겨.” 노선생은 명령했습니다. 장량은 내심 화가 치밀었지만 이건 제자가 마땅히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묵묵히 신발을 주워 노선생에게 신겨줬습니다.
시간이 흘러 또 그 거리를 걷던 장량은 말을 탄 석공과 다시 우연히 마주치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양쪽 신발을 툭툭 떨어뜨려서 주워서 신기라고 명령하는 게 아닙니까. 장량은 이전보다 더 화가 치밀었지만 이것도 병법 수행을 위한 것이라고 화를 참고 신발을 주워서 신깁니다.
그 순간, 장량은 모든 것을 깨닫고 순식간에 태공망비전 병법의 깊은 뜻을 만나 무사히 스승의 기예를 전수 받게 됩니다.
이상한 이야기지요? 도대체 장량은 무엇을 터득한 것일까요? ‘병법의 비법’을 구체적인 기술과 지식이라고 생각하면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들을 한순간에 터득할 수 없기 때문이죠. 구체적인 기술과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면 ‘병법의 비법’이라는 것은 지식과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소통하는 방법과 관련된 ‘수수께끼’라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황석공은 장량에게 무엇을 전했을까요? 떨어진 신발을 주워서 신기게 했을 뿐이죠. 그러면 그 순간 장량이 무엇을 깨우쳤을지를 상상해 보기로 하죠.
황석공이 처음에 신발을 떨어뜨렸을 때 장량은 아마도 그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뭐, 실수로 떨어트린 거겠지.”
하지만 같은 일이 또 일어났습니다. 두 번째도 툭 신발을 떨어뜨렸습니다. 이리 되었으니 그것은 더는 우연이 아닙니다. 그러면 장량은 이때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만화처럼 말풍선으로 그려보자면 “?”가 되겠죠.
이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수께끼’의 생성이라는 경험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이를 통해 무엇을 전하고 싶은 걸까?”
장량은 그런 식으로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즉 ‘신발 떨어뜨리기’와 ‘병법의 전수’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음에 틀림없다는 추리를 가동시켰을 겁니다(왜냐하면 두 사람 사이는 ‘병법의 전수’라는 이해관계니까요. 어떤 신호를 황석공이 보냈다면 그것과 관련된 것일 테지요.)
이 ‘신발 떨어뜨리기의 기호’(첫 번째는 왼쪽 신발, 두 번째는 양쪽 신발)는 병법 전수와 관련된 인간관계의 문맥에서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장량은 생각합니다. 아니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면 그것은 황석공이 두 번이나 신발을 떨어뜨렸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우연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똑같은 신호가 반복되면 우리들은 거기에 어떤 ‘메시지’가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뭐야 이거? 뭐지? 도대체 무슨 의미지? 신발과 병법, 비법은 대체 무슨 관계지?’라고 장량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아 그렇군!”하고 깨달았던 겁니다(여기서 장량의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무엇을 알았느냐 하면, 이것은 ‘병법 전수에 관련된 수수께끼 놀이’라고 해석한 것은 장량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황석공이 “자 그러면 지금부터 수수께끼를 낼 테니까 열심히 풀어보도록”하고 고지한 것은 아닙니다. 노선생은 단지 툭툭 두 번 신발을 떨어뜨린 것뿐입니다. 그것을 병법의 비법 전수와 관련된 메시지라고 생각한 것은 장량의 ‘오해’였습니다.
노선생의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몸짓을 본 장량은 홀린 듯이 그 메시지 해독에 빠져들었습니다. ‘홀린 듯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장량이 홀린 이유는 거기에 ‘수수께끼’가 있다고 믿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전후 관계로 봐서 이것은 수수께끼 놀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정답일 거야’라고 노선생의 메시지를 오독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장량 혼자서 묻고 답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다름 아닌 그 때에 장량은 소통의 본질과 병법 극의를 동시에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우치다 타츠루 저, 박 동섭 역, 『스승은 있다』
이렇게 강의준비를 위해 다시 읽어봐도 희한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스승이 떨어뜨린 신발을 신겨주는 것만으로도 장량은 병법의 극의를 터득하고 말았다.
배움은 무엇을 배우는가하는 것이 아닌, 어떻게 배우는가하는 것이다
‘병법의 극의’를 실증적인 스킬이나 정보라고 생각하면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무술의 고수가 보여주는 몸놀림 같은 것은 오랜 시간 숙성의 시간을 거치는 것을 통해서 비로소 완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량은 병법의 극의를 전달받은 바로 그 짧은 순간에 병법의 극의를 터득한다.
이것은 ‘병법의 극의’라는 것은 ‘실증적인 지知’가 아니라 ‘지를 전달하는 방식에 관련된 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량은 황석공에 대해서 무엇을 한 것일까?
‘떨어트린 신발을 주어서 신겼을’ 뿐이다.
장량은 한나라 재상의 아들로서 그 당시 진시황의 암살에 실패해서 망명중인 몸이었다. 그 세력이 막강한 집 귀공자가 출신도 성분도 모르는 노인에게 그가 약속한 병법 전수를 위해서 여기까지 자신의 몸을 낮추는 것의 ‘의외성’이 아마도 이 일화를 읽어내는 최초의 단서일 것이다.
장량이 한 것은 우선 하나의 몸짓으로 집약된다. 그것은 자신의 그때까지의 가치관과 자부심을 일단 괄호 안에 넣고 어디에서 온 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이 ‘지자智者’ 앞에 굴복한 자신을 보여준 것이다.
이 방법을 실천한 순간에 장량은 일종의 breakthrough획기적 발전를 경험한다.
‘병법의 극의’라는 것은 어떤 형태가 있는 지식과 기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그때까지의 가치관과 자부심을 일단 ‘괄호 안에 넣는’ 방식인 것이다. 적어도 능악 작가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장량』의 코가키(能楽에서 曲名 좌측에 작은 글씨로 써 넣는) 특수한 연출(에 관한 지정) 중 하나에는 장량이 황석공으로부터 전수받은 병법의 극의가 쓰여 있는 책을 펼쳐보면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코가기는 ‘배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배우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단적으로 가르쳐 준다.
스승은 제자에게 ‘배우는 방법’을 즉 ‘외부로부터 도래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방식만을 가르치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욕구와 욕망의 차이
철학자 레비나스는 ‘외부로부터 도래하는 것에 대해서 개방상태가 되는 것’을 ‘욕망을 갖는다’는 말로 바꾸어 말하고 있다.
이 ‘욕망desir’이라는 말에 레비나스는 특수한 함의를 부여하고 있다.
우리는 보통 ‘욕망’을 ‘욕구besoin’와 무반성적으로 혼동하고 있지만 이 두 가지 개념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전혀 별개의 개념이다.
‘욕구’라는 것은 ‘본래 있어야 할 것이 결여된 상태’를 말한다. 원초의 만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원상회복을 추구하는 것이 욕구이다. 그래서 ‘욕구는 본질적으로 향수이고 homesick’이다.
이에 비해서 ‘욕망’은 앞을 알 수 없는 이향감異鄕感, 채워졌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는 불만족감을 가리킨다.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것에 의해서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충족의 확신, 결코 치유될 수 없는 결핍감에 끝없이 둘러싸이는 것, 그것이 욕망을 갖는다는 것이다.
욕구 |
욕망 |
본래 있어야 할 것이 결여된 상태 |
채워졌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는 불만족감 |
만족의 원상회복을 추구하는 것 |
소유에 의해 채워질 수 없다는 불충족의 확신 |
결코 치유될 수 없다는 결핍감에 쌓이는 것 | |
향수 |
이향감 |
장량이 황석공의 신발을 주은 일화에는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욕망’의 징후는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본 것은 단지 장량이 마치 어디에 홀린 듯이 신발을 줍는 장면뿐이다.
그러나 다름 아닌 이것이야말로 ‘욕망’의 효과인 것이다.
무엇인가가 장량 안에 황석공에 대한 ‘욕망’을 발동시켜서 장량은 홀린 듯이 신발을 줍는다.
자신도 모르는 게임의 규칙을 스승은 알고 있다고 착각할 때, 욕망이 인다
장량은 왜 홀린 것일까?
황석공이 신발을 두 번 떨어트렸기 때문이다. 황석공이 한 번 왼쪽 신발을 떨어트렸다고 하면 그것은 우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번째의 만남이었을 때 양쪽 신발을 떨어트렸다고 하면 그것은 더 이상 우연일 수 없다.
장량은 이 때 황석공이 “내가 규칙을 모르는 게임”을 시작했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리고 그 때 장량은 ‘제자’가 되고 동시에 ‘병법의 극의’를 터득한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내가 모르는 게임의 규칙을 알고 있다고 상정된 인간, 그것이 바로 ‘스승’이다. 문득 자각해 보니 자신이 그 규칙을 모르는 게임의 플레이어‘가 된’ 인간, 그것이 ‘제자’이다. 그리고 ‘게임의 규칙’을 알고 싶다고 바라는 것, 그것이 ‘욕망’이다.”
제자 안에 ‘전혀 외부적인 무엇인가 즉 절대적으로 외부적인 것’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욕망’이 점화하는 것은 늘 그런 상황이다. 이 때 제자는 ‘그것’이라고 자각하지 못하고 ‘아이’의 입장 즉 ‘묻는 입장’에 몸을 두게 된다. 그리고 “당신은 무엇을 말하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하는가?”라는 물음을 발하는 것을 자제할 수 없다. 라캉이 가르쳐주듯이 ‘아이의 물음’을 발한 순간에 제자는 스승에 대한 ‘절대적인 늦음’에 이미 말려들고 마는 것이다.
장량은 두 번째 신발을 떨어트렸을 때의 황석공이 ‘자신은 모르는 규칙의 게임을 하고 있다’고 믿고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욕망’하였다. 그리고 ‘당신은 그렇게 말함으로써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가?’라는 물음이 장량 안에서 싹튼 순간에 그는 황석공에 대한 ‘절대적 늦음’이 그 안에 각인된 것이다.
장량의 물음이 해소된 것은 ‘절대적 패자’의 위치를 그 누구도 아닌 그 자신 스스로 바래서 선택했다는 것을 자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 때에 ‘욕망하는 자는 욕망받는 자에 절대적으로 늦는다’는 라캉의 지견을 간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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