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방랑자
[박동섭] 가르침에 관해서-선택받지 못하는 리스크를 감수할 용기 본문
어디를 가도 혁신학교운동과 짝으로 <학생중심수업> <배움중심수업>이라는 말들과 실천(?)이 난무하는 작금이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배움중심수업>=‘비고츠키 교육학을 통한 교실수업개선’이라는 말도 아주 자연스럽게(?) 정착된 듯하다(그런데 ‘교실수업개선’이라는 wording 이외에 교실을 새롭게 볼 수 있는 wording이 분명히 있을 터인데, 예를 들면 이런 wording 말이다. 학교를 학교적이지 않은 곳으로 하기 위해서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교육을 시킬 수밖에 없다
나는 이 <학생중심수업> <배움중심수업>이라는 말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고, 그렇다고 해서 알고 싶은 마음도 솔직히 전혀 없다.
교육에서 뭔가 한 쪽에 '중심'을 둔다는 것에 대한 위화감 때문에 그러하리라.
그리고 이러한 나의 생각은 듀이든 비고츠키든 사에키 유타카든 우치다 타츠루이든 그리고 오자와 마키코의 교육론으로부터 사사받았다.
이러한 스승들의 교육을 논하는 공통적인 wording의 핵심은 ‘자기교육론’ 즉 ‘사람은 자기 스스로 교육을 시킬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 정말 주의해야 할 점은 그들을 ‘배움중심수업’이라는 원조라고 함부로 단정 짓지 말기 바란다.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의 관계는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일단 그건 그렇고, 배움중심수업/학생중심수업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배움중심수업: learning-centered instruction> <학생중심수업: learner-centered 혹은 learner-oriented instruction>
여기서 이런 물음을 한번 던져보자.
그럼 가르침과 배움을 논하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발상을 가진 나와 같은 사람의 관점은 <교사중심수업>이라는 카테고리에 포함되는가?
태초에 가르치고 싶은 게 먼저 있었느니라
‘가르침과 배움은 어떻게 성립하는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답하고자 한다. 배우는 자의 욕구, 동기, 흥미 그리고 관심사가 먼저 있고(말을 바꾸면 수요가 먼저 있고) 나서 “아 알겠습니다. 그런 욕구와 동기와 흥미와 관심사가 있었군요. 그러면 그런 수요에 마차서 이러이러한 것을 가르치도록 하겠습니다(즉 수요가 먼저 있고, 공급이 나중에 따라 붙는)”와 같은 식으로 가르치는 자의 대응이 있는 것으로 가르침과 배움이 성립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니라 먼저 ‘공급’이 있는 것이다.
먼저 어쨌든 가르치고 싶은 것이 있다. 물론 이 말을 내뱉은 시점에서는 그리고 실제로 가르침을 기동하기 시작한 시점에서는 ‘배우고 싶은 사람’이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을 리스크도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가르치고 싶으니까, 무상無償으로라도 가르쳐 줄테니까, 내가 지금 흔들고 있는 깃발 아래로 모여라.
수요자의 요구에 따르는 게 아닌, 요구를 창출하는 것
<고객의 욕구>가 만약 정량적, 정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라서 그것에 딱 100% 딱 들어맞는 서비스라든지 상품을 제공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100% 생산적인 거래가 성립한다고 만약 믿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비즈니스맨으로서 유치원 아동 수준이다.
‘고객의 수요’같은 거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일상에서 당연한 듯 사용하고 있는 스마트폰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유선 혹은 무선으로 연결된 PC가 있음으로서 비로소 연결 가능한 인터넷 세계를 넘어서서 길을 걷는다든지 KTX안에서 혹은 지하철 안에서 언제든지 누구와도 인터넷 공간을 매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싶은 수요자의 욕구가 먼저 있어서 스마트폰이 나온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이라는 첨단 테크놀로지가 만들어지고, 그것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스마트폰 비즈니스가 만들어지고 와이파이와 3G 그리고 LTE 같은 네트워크 기술이 체계화되고 나서야 비로소 ‘스마트폰 수요’ 즉 스마트폰을 갖고 싶고 이용하고 싶은 수요자의 욕구가 등장한 것이다.
욕구는 ‘욕구를 채워 줄 제도’가 출현한 후에 사후적으로 마치 쭉 이전부터 거기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처럼 가상仮象한다. 아무리 본인에게 있어서 그것이(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싶은 욕구)가 리얼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나타내 줄 언어기호와 그것을 채워줄 사회적 장치가 존재하지 않는 ‘결여’는 ‘결여’로서 결코 인지되지 않는다.
욕구는 그것을 채워줄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급자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배우는 것에 대한 욕구는 타자로부터 배울 수밖에 없다
그럼 ‘아이들의 배움동기’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배움의 동기는 일종의 ‘배우는 것에 대한 욕구’이다. 물론 그런 것은 ‘자연현상’으로서 아이들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소는 존재할지 모르겠지만 ‘배우려는 욕구’라는 것은 확실한 윤곽을 갖고 있지 않다. ‘먹는 것에 대한 욕구’와 ‘노는 욕구’와 섞여서 굼틀거리고 있을 뿐이다. 이 욕구만을 선택적으로 분리하고 기호화하고 그러한 욕구가 아이 안에 존재하는 것을 자각하게 하는 것은 공급자의 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배움에 대한 욕구를 자각시킬 수 있을까?
그것은 교사 스스로가 ‘배우는 것에 대한 욕구’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학생들 앞에서 온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아이들은 아직 기호를 발명할 힘이 없다(결국은 그것을 익히기는 하지만서도).
아이는 숙련된 한국어 화자인 엄마가 말을 거는 것을 통해서 비로소 모국어를 습득한다. 그것과 똑같이 ‘배우는 것에 대한 욕구’는 ‘배우는 것에 대한 욕구’를 실제로 살고 있는 교사로부터 밖에 배울 수 없다. 만약 아이들에게 배움의 동기를 불러일으키고 싶다고 바란다면 교사자신이 배움에의 동기를 활성적인 상태로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사 자신이 늘 활발한 호기심이 넘치고 다양한 수수께끼에 매료되고, 끊임없이 스스로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뒤집는 반증사례를 가져와서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데에 열중할 것(어느 때는 주입식 교육을 해보다가 어느 날은 ‘토론식 수업’을 해보다가 또 어느 때는 ‘거꾸로 수업’을 해보다가.....등등) 그것이 교육을 성립시키기 위한 필수 조건 중 하나이다.
배움의 동기를 잃어버린 교사도 교육적으로 기능한다
물론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교사도 많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금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들도 또한 자신이 ‘활발한 호기심을 잃어버렸다는 것’, ‘수수께끼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 ‘배움과 가르침을 둘러싼 가설과 그 가설을 뒤집는 반증사례를 모으는 것에 열중하는 의욕을 잃어버린 것’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서, 그것을 존재를 부식시킬 정도의 아픔으로써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체의 교육적 정열을 잃어버리고도 매일 아주 좋은 기분으로 자신의 일을 내팽개치는 교사를 당신은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없다(물론 그런 교사를 본 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런 교사는 일체의 교육적 정열을 잃어버린 것과 트레이드 오프로 대학에서 보직 맡기에 혈안이 된 인간들로 변모한다).
교육적 정열을 잃은 교사의 ‘나는 교육적 정열을 잃은 교사입니다’라는 자기 신고의 오버액션에는 경탄해야 할 것이 있다.
어두운 표정, 생기를 잃어버린 피부, 흐트러진 머리, 될 때로 되라 식의 복장, 무거운 발걸음, 허무적인 말.....그 모든 것이 ‘배우려는 동기를 잃어버린 것이 얼마큼 인간에게 있어서 비통한 일인가’를 온 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배우려는 욕구’를 잃어버린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대학을 다닐 때 그리고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에는 이런 ‘배우려는 욕구’를 잃어버린 사람들로부터 역설적이지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마음』이란 소설을 통해 본, 배움을 잃은 교사가 교육적인 이유
나츠메 소세키의 『마음』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선생’은 이러한 사태를 정말 잘 설명해 주는 아주 절묘한 예이다.
“내가 있는 곳에 오더라도 아무것도 배울 게 없다”고 말하는 선생의 언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있어 교육적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이 사람은 과거에 격한 배움에의 욕구에 끌린 적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것을 잃어버리고 폐인처럼 되어 버렸다.’, ‘어떠할 때에 인간은 배우는 열정을 잃어버리는 것일까 내가 이 선생은 내가 배우는데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한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이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선생’이 배움에의 동기를 잃어버린 후도 이전과 변함없이 유쾌하게 살고 있다고 하면 ‘선생’은 조금도 교육적으로 기능하지 않을 것이다(요즘 대학에서는 이런 선생을 만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선생’이 배우는 것에 대한 동기를 잃어버린 후도 계속해서 ‘선생’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은 배움에의 정열을 잃어버린 것이 얼마큼 견디기 힘든 고통인가를 온 몸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같은 사람으로부터 배울 것은 아무것도 없어’라는 언명은 “왜 이 사람은 이 정도로 확신을 갖고 이 정도로 절망적인 자기비하의 선고를 할 수 있을까?”와 같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의문 속으로 아이들을 이끈다.
그 때 이미 아이들 안에는 ‘배움에의 욕구’가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지견 중 하나는 <선생은 ‘선생이려고 할 때’에도 이미 선생이고, ‘나는 이미 선생이 아니다’고 선언한 후에도 이미 선생이다.>
‘배운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가르치는 것은 어떤 것일까. 자신은 과연 지금도 배우고 있는 것일까. 자신은 사람을 가르칠 자격이 있는 것일까. 그러한 일련의 물음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교사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자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이 있다
배움에 대한 욕구 혹은 수요 같은 것은 자존(self-contained)하지 않는다.
‘배움에 대한 욕구’라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태어나고 죽는 것일까 와 같은 것을 전일專一적으로 철저하게 생각한 ‘내’가 등장한 후에 아이들 안에 그것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2006년에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국내의 오랜 관행으로 굳어버린 비고츠키에 대한 왜곡과 오해를 바로 잡기 위해서 서울까지 내가 차비를 내고 비고츠키 강의를 하러 다닌 적이 있다.
어쨌든 이러이러한 중요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으니 그들의 소매를 붙잡고서라도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고 생각해서 서울까지 찾아 간 것이다.
가장 가까운 예를 하나 들자면 2월 1일에 강화고등학교에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였다. 15명 정도 내 강의를 들을 거라고 담당교사가 말해주었던 것과는 달리 실제 강의에 참석한 학생은 총 6명이었고, 그 중 한명은 강의 내내 때로는 졸면서 때로는 엎드려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이 강의를 위해서 내가 하루 만에 이용한 탈 것의 횟수는 총 6번이었다.
(일반버스/KTX/공항철도/지하철/3000번 직행버스/택시)
집에서 부산역까지 버스→부산역→서울역(KTX)→공항철도를 이용해 김포공항→김포공항에서 5호선으로 송정역→송정역에서 3000번 버스를 타고 강화터미널→강화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강화고등학교.
그래서 내가 받는 강의료는 고작 30만원이다. KTX 왕복비용만 12만원이 넘는다.
내가 이 강의를 하겠다고 수락한 것은 강태원 선생님의 부탁도 물론 중요하게 작용하였지만, 그것 이외에도 고등학생들에게 그들이 듣고 싶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혹은 들을 것이라고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배움이 성립하는 과정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가르치고 싶은 사람’이 먼저 몸과 마음을 움직일 필요가 절대적으로 있는 것이다.
배우고 싶은 수요가 먼저 있고, 그 수요와 요구에 맞추어서 가르치는 사람이 등장하는 일종의 등가교환으로서 교육을 보는 것과는 달리 ‘증여로서의 교육론’을 주창하는 우치다(2015)는 교육을 위해 가르치는 것(공급)이 먼저 있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런 그의 주장은 무도를 가르치는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느 날 태풍이 온 날이 마침 합기도 수련을 하는 날이었는데, 대학에서 빗속을 오토바이로 달려서 그대로 체육관까지 달려갔습니다. 하늘은 완전히 시커멓고 바람도 강했습니다. 수련 중지의 연락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가 올지도 모릅니다. 체육관을 열고 혼자서 18장의 다다미를 깔고 사람들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수련 시작시간이 되어도 아무도 오지 않는 겁니다. 당연히 오지 않지요. 바깥은 심한 바람이 불고 있고 추운 체육관의 한 가운데에 혼자서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기를 한 시간, 그렇게 앉아 있다가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도 나에게 ‘배우고 싶다’고 말하는 것도 아닌데, 혼자서 ‘가르쳐 주겠다’고 말하고 체육관을 빌려서 일을 마친 후에 흠뻑 젖은 몰골을 하고 달려와서 혼자서 다다미를 깔고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아무도 배우러 오지 않는다. 그 때 “나는 바보가 아닐까?”라고 혼자서 다다미 위에 앉아서 생각했습니다.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하고 말이지요.
일마치고 집에 돌아가서 천천히 목욕이나 하고 술이나 마시면서 만화를 보는 게 나았을 뻔 했는데 어떤 이득도 없는 것을 하고 있다. 그렇게 일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체육관 철문이 삐걱 열리면서 최근에 합기도에 입문한 근처에 사는 중학생이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앗 선생님 와 있었군요.” “태풍이라서 설마 수련은 없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한번 가보자 라고 생각하고 왔어요”라고 말해서 저는 “물론 수련 한다”라고 하고 그 아이와 둘이서 1시간 정도 수련을 하였습니다.
이때 저 안에서 뭔가 터져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가르친다는 것의 의미를 좀 알게 되었다고 할까요. 그 중학생을 상대로 수련을 하면서 가르친다는 것은 역시 ‘맨 땅에 헤딩’ 같은 행위와 비슷한 거구나 하고 무릎을 쳤습니다.
그때까지는 ‘선생이 갖고 있는 지식과 기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부탁드리니 가르쳐 주세요’라는 사람이 먼저 있고, “응 그러면 가르쳐 주겠다”라는 사람이 만나는 것으로 사제관계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즉, 한 쪽이 가르치는 기술과 지식이 있고, 그것을 배우고 싶은 사람이 있는 즉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면 사제관계가 성립하는 걸로 말을 바꾸면 일종의 상품거래의 ‘등가교환’ 같은 것으로 교육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가르친다는 행위는 먼저 ‘가르치고 싶다’라는 가르치는 쪽의 무조건적인 시작으로부터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맨 땅에 헤딩’이라고 해도 되고 증여라고 해도 좋습니다만 상대가 ‘필요하다’고 아직 말하지 않는 것을 ‘주겠다’라고 밀어붙이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로 어찌 보면 주제 넘는 짓인 것이지요.
처음에는 배우고 싶은 사람 같은 것 없습니다. 그 지식과 기술이 애당초 어디에 도움이 되는지 학습자는 모르기 때문에 그렇죠. 하지만 합기도뿐만 아니라 기술과 지식의 전승에서는 그것이야말로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지요. 시장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수요가 없는 곳에 공급이 먼저 있다’가 실은 ‘가르치는 행위’의 원점인거지요. 상품경제에서는 통상 먼저 수요가 있고 그것에 응해야 하는 공급이 생깁니다. 무도의 경우도, ‘무도를 하면 몸이 강하게 된다’, ‘예의바르게 된다’, ‘싸움을 잘하게 된다’라는 알기 쉬운 유용성을 추구해서 배우는 사람도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근처에 도장이 생겨서라든지 최근에 배 둘레가 신경이 쓰여서라든지 친구가 가자고 해서와 같은 이유로 도장에 발을 들여 놓습니다.
그러다 보면 거기에 “자네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 덕분에 ‘배우고 싶은’ 수요 혹은 욕구가 사후적으로 출현합니다. 그것이 사제관계의 기본이라는 것을 저는 그 태풍이 온 날 밤에 자각하였습니다(內田, 2015: 32-33).
여기서 잠시 <배움중심수업> <학생중심수업>을 목청껏 외치고 제도적으로 반영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나도 그렇고 우치다 타츠루도 그런 것처럼 ‘교사인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기 때문에 이런 수업은 <교사중심수업>인가?
가르치는 사람이 홀연히 나서고 난 다음 단계는 배우는 자가 움직일 단계이다. “내가 지금부터 무엇을 배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아니 무엇을 배우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스스로 무엇을 알고 싶은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 한번 배워보겠다”는 어떻게 보면 별 이유 같지 않은 이유이지만 그래도 뭔가 재미있을 것 같다. 뭔가 미지를 만날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감각으로 그 깃발 아래 모여 봤다.
그런데 한참 배우다 보니까 지금까지 자신이 한 번도 뇌리에 떠올리지 못한 욕구, 욕망, 동기 흥미, 관심사 그리고 한 번도 뚫어보지 못한 사고의 회로(아니 뚫고 싶은 사고의 회로가 있는 것조차 몰랐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가 있다는 사실을 사후적으로 발견하는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가르치는 자는 배우는 사람을 만드는 존재
그러면 여기서 가르치는 사람, 즉 교사의 역할은 <배움중심수업> <학생중심수업>에서 말하는 교사의 역할인 보조자 혹은 촉진자(facilitator)의 역할에 머무는가?
천만의 말씀!!!
여기서 교사는 정말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먼저 비용을 부담하고 듣는 학생이 한 명도 없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 일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그 교사의 수업스타일이 설령 소위 말하는 ‘주입식방법’일 경우라도 말이다.
일단 가르치고 싶은 것이 있다. 이것은 너희들이 꼭 알아야 할 내용이니까, 내가 지금부터 어떤 말을 하는지 여러분들이 단박에 이해할 턱이 없다.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 ‘앞으로 알아야 할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 이유조차도 지금 여러분들은 모른다. . 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배워야하는 것이다.”
<배움중심수업> <학생중심수업>을 외치는 자들에게 있어서 이런 교사의 자세는 어떻게 다가올까? <교사중심수업>의 전형이라고 다가올까? 아니면 미처 이런 교사의 자세나 태도를 담아낼 어휘꾸러미를 준비하지 못한 덕분에(?) 그냥 카오스 상태로 멍청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일까?
배우는 자, 즉 학습자가 위처럼 배움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게끔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교사이다. 그 교사는 일단 맨땅에 헤딩을 하였다. 그리고 그 맨땅에 헤딩은 그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하는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이루어졌다. 이런 과정에서 교사는 무엇을 목표로 가르치는 것일까? 그건 다름 아닌 배우는 사람을 구축하는, 즉 만들어가는 일을 하는 것이다.
즉 이런 이야기다. 먼저 가르치는 사람이 나타나서 가르치고 싶은 것이 있으니 여기에 다 모여라. “내가 지금부터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가치나 잣대나 도량형으로는 도저히 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내 말에 귀를 기울여 봐라. 여러분들이 지금 갖고 있는 자가 10cm 자라고 하면 그것만으로는 20cm크기의 물건을 잴 수 없다. 나아가 빛과 소리와 냄새는 여러분들이 지금 갖고 있는 ‘자’로는 도무지 잴 수가 없다.”
배움의 목표 동기 그리고 관심도 같은 것 개나 줘버려라. 애당초 배움의 가장 본질은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잣대나 도량형에 기초한 목표가 얼마나 빈약하고 협소하고 얄팍하고 그리고 깊이가 없는 것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배움에 목표가 있다고 한다면 내가 배우는 시점에 갖고 있었던 배움의 목표의 삭제, 해체, 새로운 목표의 구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이야기 하고 있듯이 좋은 책은 기존의 독자들의 욕구needs에 철저히 맞춘 책이 아니라 새로운 독자들의 창출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새로운 독자들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적과흑』의 말미에 스탕달이 To the Happy Few라고 영어로 표기한 것은 동시대의 독자의 호응을 얻을 수 없음을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새로운 독자들과 만나기 위해 그 책을 쓴 것이다.
돌이켜보면 몇 년 동안 전국을 돌면서 내가 교사들(주로)을 대상으로 해온 강의는 기존의 수강생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함이 아니라 새로운 수강생들(새로운 배우는자)을 구축하기 위함이었다. 새로운 배우는 자는 그 정의상 배움의 시작 단계에서 자신이 배우려는 것 이상의 것을 그리고 배우려는 이외의 것을 배우는 자를 가리킨다.
가르치는 자는 선택받지 못할 리스크를 감수하는 자다
‘가르치는 것은 맨 땅에 헤딩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는 가르침론에 관해서 스승인 우치다 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기치를 내건다는 것은 <선택받지 못하는 리스크>를 감수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오세요”라고 말하는 학교는 ‘기치를 내걸지 않는’ 학교이다. 기치를 내건다는 것은 이 깃발에 호응하는 사람만 와주세요라는 의미이다. 그것을 위해서 깃발을 내걸고 있기 때문에. 깃발을 세우면 깃발을 본 순간 “아 이 학교에 가고 싶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온다. 그것으로 된 것입니다.
일본에는 대학이 700개 있다. 지원자가 자신이 가고 싶은 학교에 가서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울 수 있기 위해서는 모든 대학의 학부와 학과가 각각 명확한 기치를 세워서 “우리는 이러이러한 것을 가르칩니다. 그것을 배우고 싶은 사람은 오세요. 그런 것은 필요 없습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대학에 가시면 됩니다.”고 확실히 선언해야 합니다.
‘선택받지 못하는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을 통해서 만이 자신이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보낼 수 있습니다.
‘선택받지 못하는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과 ‘자신이 무엇을 하면 좋을지 모르는’ 지원자들을 향한 메시지 힘의 강함은 완전히 트레이드 오프의 관계입니다.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으면 메시지는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선택받지 못하는 리스크’를 감수할 수 없는 학교는 결국은 어떤 메시지도 발신할 수 없게 됩니다. “무엇을 가르치고 싶은지”를 확실히 하지 않는 학교는 무엇을 배우면 좋은지 몰라서 곤혹상태에 있는 고등학생들에게 어떤 메시지도 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모르는 고등학생”들을 야단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고등학생들이 대학에서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잘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학부에 가서 뇌과학을 전공하고 싶다”라든지 “경제학부에 가서 금융공학을 전공하고 싶다”라고 술술 말하는 고등학생이 훨씬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무엇을 배울지 잘 모르는 고등학생들에 대해서 그들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학문분야가 있고, 그들이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교육방법이 있고 그들의 일상어휘로는 말할 수 없는 종류의 건학이념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저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뭔지 잘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 기치에 ‘삐삐삐’하고 반응한 아이들을 한 명 두 명 건져 올려 가는 형태로 밖에 학교교육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치다(2015)는 그의 교육론에서 가르치는 사람은 일단 수요(예컨대 배움)가 없는 상태에서 여하튼 가르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교육은 먼저 수요가 있어서 그것에 대해서 “네 이것이 당신이 찾는 것입니다”라고 내어 놓고 그것을 대가로 뭔가를 받는 것이 아니다. 교육은 상품거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무상의 증여로부터 시작한다. 배우고 싶은 사람이 없어도 “나는 꼭 가르치고 싶은 것이 있다”는 사람이 어쨌든 가르치기 시작한다. “듣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지 가르쳐주겠습니다.”는 가르치는 쪽의 강한 한발의 내딛기가 있고나서야 교육은 비로소 기동한다. 먼저 가르치는 쪽의 ‘가르치고 싶다’는 내딛기가 있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배우고 싶다’는 학생 측의 내딛기가 있다. 가르치는 쪽의 내딛기와 배우고 싶은 측의 내딛기가 만났을 때 비로소 교육은 성립하는 것이다.
가르침은 배우려는 자를 기다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여기서 교육자인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예컨대 “자 그러면 이 선생님에게 배워 볼까!”라고 배우는 쪽이 생각하였다고 해서 절대로 무리하게 손을 잡고 끌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선생이 ‘가르치고 싶다’고 말하고 한 발 내딛기를 할 때, 학생이 뭔가 배우려는 반응 같은 것을 보인다고 해서 그/그녀를 강제로 끌어서는 안 된다. 그것보다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정녕 배우고 싶으면 미안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결단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배우는 결단만큼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쪽이 ‘배우지 않을련?’ 하고 먼저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야 한다. 그건 아주 중요하고 필요한 행위이다. 그런데 “그러면 나는 당신의 제자가 되어서 당신으로부터 배우겠습니다”는 배우는 쪽이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서 사제관계가 성립되려고 한다고 치자. 하지만 그럴 때조차도 가르치는 쪽은 경계선의 이쪽에 서서 지그시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마지막 한 걸음이 남은 상황에서는 학생이 자기책임으로 그리고 자기결정으로 경계선을 넘어서 들어오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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