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방랑자
[박동섭] 스승을 갖지 못한 자는 <비고츠키>를 이해하는 것이 절망적으로 어렵다 본문
‘비고츠키=협력의 교육학’을 외치고, 비고츠키를 가져오면서 ‘경쟁이 아닌 협력이 가장 효과적인 교육방법이다’는 말을 아무런 주저함 없이 일제히 외치는 사람들이 이 땅에는 제법 있다.
그리고 이 멤버들이 주축이 되어 전국의 혁신학교에 비고츠키 교육학이 마치 복음(?)처럼 전파되고 있는 모양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OO원격연수원에 온라인 연수까지 개설되어 성황리에 강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새다.
비고츠키를 교육붕괴의 구세주로 인식한 한국교육계
이들의 활동과는 별개로 비고츠키는 소위 교육학을 전공하는 교수들이나 각 교과교육학(예컨대 수학 등)을 전공하는 교수들에 의해 한국에서 일종의 수업기법으로 재탄생한 구성주의와 맞물리면서 한 때 각광(?)을 받았던 시기가 있었다.
마치 ‘비고츠키=사회적 구성주의’가 한국의 교육을 구해 줄 메시아처럼 인식되던 시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어찌된 영문인지 그렇게 ‘비고츠키=구성주의=한국 교육의 구세주’를 외치던 사람들이 다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비고츠키를 대한민국에서 퍼뜨린 이 두 세력이 뭔가 다른 것 같으면서 완전히 일치하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벌써 간파하였는가?
그것은 각 세력 내에서는 비고츠키를 말하는 어법이나 비고츠키를 이해하는 패턴 그리고 비고츠키를 교육에 무리하게 적용하려는 자세 또한 너무나도 동일하다는 점이다. 이렇게 각 세력에서 비고츠키를 말하는 어법이나 이해하는 패턴이 동일하다고 하면 각 세력에서 한 명씩만 남으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스승은 나의 이해로는 절대 닿을 수 없는 타자성을 지닌 존재다
나는 이번 글에서 ‘스승을 갖지 못한 자는 <비고츠키>를 이해하는 것이 절망적으로 어렵다’는 부제를 달았다.
이 문제를 내가 경애해 마지않는 스승인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의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및 그 동안 내가 읽었던 선생님의 사제론師弟論에 기초해서 풀어보도록 하겠다.
여러 책에서 우치다 선생님은 ‘사제관계는 어떤 정량 가능한 학지學知와 기술을 전승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학습하는 경험’이라고 말한다.
‘나 자신의 지적능력을 아무리 양적으로 확대해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타자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타자와 나 사이에는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unique 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는 관점을 학습하는 것이 ‘스승을 갖는다’는 것의 교육적 의미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스승’은 레비나스의 철학의 문맥에서 ‘타자Autrui’라고 부르는 것이고, 프로이트가 전이에 관해서 논하면서 ‘분석가’라고 부른 것과 동일한 기능을 하고 있다.
스승은 우리가 성장의 과정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타자를 가리킨다(레비나스).
철학자 레비나스는『전체성과 무한』이라는 책에서 딱 한 번 ‘스승으로서의 타자’라는 인상 깊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스승으로서의 타자’는 우리에게 타자성의 한 가지 모델을 제공해 줄 것이다. 스승의 타자성은 단지 나와의 관계에서 외부적인 것이 아니다. 스승의 타자성은 ‘외부적인 것’의 본질에 속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나’를 기점으로 해서만 형태를 취할 수 있는 그러한 타자성인 것이다.
‘스승의 타자성’은 단지 ‘이 사람은 나와는 다른 사람이다’는 종류의 타자성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나의 이해가 도무지 닿지 않는, 따라서 영문을 알 수 없는 경위에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 ‘이해의 닿지 않음’은 제자인 ‘나’에게만 고유한 것이라서 나 이외의 누구도(스승의 친구도 다른 제자들도) 그것을 말할 수 없는 종류의 ‘대체불가능한 이해의 닿지 못함’이다.
스승은 나의 이해가 닿지 않는 존재이기에 다양한 이론이 성립된다
실제로 서구의 비고츠키 학파들이나 가까운 일본의 비고츠키 학파들의 면모를 보면 이 ‘스승의 타자성’이라는 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들은 똑같이 비고츠키를 원전을 읽고 공부하고 자신의 것으로 해 나가는 과정에서 각자 고유한 말로서 비고츠키를 논하고 있다.
때론 그 고유한 말들 사이에 충돌도 있고, 서로를 비판하는 경우도 물론 일어난다.
심지어는 비고츠키의 ‘내면화internalization’ 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학자들 사이에 격한 논쟁이 있었고, 그 결과 어떤 학자(Rogoff나 Wertsch)들은 내면화라는 말 대신에 전유appropriation라는 말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고, 또 어떤 학자Valsiner는 내면화라는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비고츠키 아이디어의 본질에 가깝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각자의 비고츠키에 대한 대체불가능한 이해의 고유성을 담보하는 것은 각자 비고츠키라는 스승에 대한 ‘대체불가능한 이해의 닿지 못함’에 의해서이다.
나는 솔직히 한국에서 이런 비고츠키에 대한 다양한 이해의 variation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비고츠키가 뭘 말하고 싶었는지 그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논의하는 정도의 장이 여기저기서 마련되어서, 심리학의 자본론을 꿈꾼 비고츠키 심리학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점이 어느 정도의 시민권을 획득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갖고 있다.
스승이 이해불가능할 때, 제자의 유일무이성이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레비나스의 관점에 따르자면 제자가 스승을 이해한다는 것은 ‘타자로서의 스승’의 정의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제자는 스승에 대해서 ‘나의 이해가 도무지 닿지 않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이라는 것밖에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이해의 닿지 않음’의 양상은 제자 한 명 한 명이 달라서 각자에게 있어 아주 고유한 것이다. 스승의 기능은 제일 먼저 그러한 형태로 ‘나는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도 대체불가능한 형태로 스승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자기승인을 제자에게 심어주는 것이다.
만약 뛰어난 제자는 스승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면 이론적으로는 제자가 전원 뛰어난 경우 그들의 ‘이해’는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귀착되게 된다. 그러한 n명의 제자들 사이에 균질한 이해가 성립하였을 때 제자들 한 명 한 명의 존재가치는 단박에 1/n으로 급락한다.
“당신의 대체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당신은 없어도 된다”
즉 사제관계에서 스승의 제일 첫 번째 일이 ‘제자를 둘도 없는 존재로서 승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스승이 제자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은 필수의 조건이다.
‘스승의 타자성’은 제자의 ‘유일무이성’에 기초해서만이 즉 ‘나’를 기점으로 해서만이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이 레비나스의 말은 거꾸로 읽으면 ‘스승의 타자성’ 즉 ‘스승의 이해불가능성’을 빼고는 제자의 ‘유일무이성’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비고츠키를 따라하는 건 자신의 고유성을 죽이는 일이며, 비고츠키를 저주하는 일
그런데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없애라’는 의미도 아니고 머리를 숙이고 잠자코 있으라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스승의 말을 그대로 앵무새처럼 흉내내라는 것도 아니다.
(2 년 전에 전교조 부산지부에서 비고츠키 강의를 하는데 어느 수강생으로부터 이런 질문이 있었다. “왜 선생님은 비고츠키가 직접 한 말을 우리한테 이야기 하지 않는가요?”라는 그 말을 듣고 아연실색한 경험을 갖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스승의 말을 있는 그대로 읊게 되면 나의 유일무이성 혹은 고유성이 심각하게 손상을 받기 때문이었으리라.)
왜 자신을 없애라는 의미도 아니고, 머리를 숙이고 잠자코 있으라는 것도 아니고 스승의 말을 그대로 앵무새처럼 흉내내라는 것도 아닌가 하면 그렇게 해서는 제자의 고유성uniquness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비고츠키 교육학=경쟁 말살 협력 만세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비고츠키=사회적 구성주의=교실수업개선’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어떤 경우일까?
그것은 교육이라는 것은 ‘이래이래하면 아이가 이렇게 이렇게 바뀐다’라는 교육만능주의적 발상 즉, 역설적으로 비고츠키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행동주의’를 ‘앵무새처럼 흉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말을 하는 사람이 스승을 가지며, 스승이 될 수 있다
제자의 책무는 스승과의 ‘대화적 운동’ 과정에서 ‘유일무이한 것’ ‘그때까지 누군가에 의해서도 말하여 진 적이 없는 것(나는 비고츠키를 논하는 데 있어서 지금까지 (제대로 된) 서구와 일본의 비고츠키 학자들이 말하지 않은 것을 선택적으로 말하려는데 나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 편이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취하는 전략은 비고츠키 학파 바깥에 있는 사상가들의 말을 차용하는 것이다.)’을 가져오는 것에 있다.
제자는 그 고유성을 통해서 비고츠키 학파 안에서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 이외의 누군가에 의해서 말한 적이 없는’ 말을 발発하기 위해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형태로 스승과의 관계를 맺은 사람은 ‘타자와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의 본질’과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제자는 ‘스승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도 또한 누군가의 스승이 되어서 ‘제자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제관계는 역설적인 관계이다.
비유를 하나 들자면 “여러분들 全員 암호는?”이라는 질문을 받고 술술 ‘열려라 참깨’라는 대답을 하면 문이 열리지 않고, “앗 미안합니다. 아직 전원이 아니라서 암호를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대답한 자에게만 문이 열린다.
그러니 제자 전원에게 열리는 똑같은 암호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혹은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자 전원이 갖고 있는 카드 키가 전원 달라서 그 카드의 소유주가 카드를 사용해야 만이 문이 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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