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방랑자
[박동섭] “지금 유인물을 읽고 있습니다”의 현상학 본문
가다머의 표현을 빌리면, 현상학자로서의 우리의 작업은 “과학의 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재단(裁斷)하고 처분할 수 있게 된 객관적인 기술의 세계를 우리 존재의 근본적인 질서—작위적이거나 조작 가능한 대상이 아니라 그저 우리들의 존경을 받을 뿐인 질서---와 재결합시키는 일이다.” 환언하자면, 이는 ‘체험(lived-experience)’의 세계 속에 침윤되어 있는 경험적 토대를 다시 찾는 것이며, 이 토대의 발견과 회복은 인간의 문화적 가능성들과 그 체현(體現)이 궁극적으로 의지해야 할 의미의 원천이 될 것이다
-김영민 저 『현상학과 시간』 중에서
이 가다머의 ‘조작 가능한 대상이 아니라 그저 우리들의 존경을 받을 뿐인 질서’를 어떻게 우리의 일상에서 있는 그대로 건져 올릴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갖고 임하고 있는 요즘 일상에서 가다머의 이야기를 예증할 수 있는 데이터를 몇 가지 얻을 수 있었다.
사회학은 일상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윤곽을 그리는 일
여기서 말하는 ‘우리들의 존경을 받을 뿐인 질서’라는 말은 사회학자 혹은 심리학자 그리고 드물게는 교육학자의 어떠한 외부적인 개입이 있기 전에 혹은 그들이 갖고 있는 연구 잣대로 뭔가를 분류하고 조작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가 타인과 만나서 어떤 말을 나누면서 동시에 특정한 사회적 질서를 구성할 때(예를 들면 교사와 학생으로서의 사회적 질서를 구성할 때)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내고 관찰가능하고 설명도 가능하면서도 단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질서(seen but unnoticed)를 말한다. 현상학자 슈츠Schutz의 표현을 빌면 우리는 모두 ‘실천적인 사회학자’인 것이다.
EM(Ethnomethodology)은 이러한 ‘우리들의 존경을 받을 뿐인 질서’를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보자고 하는 발상이다. 물론 있는 그대로 본다고 해서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일상의 용어로 그것을 무한정 기술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평소에 무자각 혹은 무반성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일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 과정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하나의 선명한 윤곽을 그려내려는 발상이다.
회화의 이론적인 분석
대학 수업 중 학생들에게 자료를 나누어주고 그 자료를 읽게 한 후 어떤 학생에게 질문을 하였을 때에 그는 약간 겸연쩍은 얼굴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 “지금 유인물을 읽고 있습니다.”
그 학생이 그 때 유인물을 읽고 있었다는 것은 물론 사실로서 옳다. 그러나 그가 그 때 그 장에서 그렇게 말한 것은 그것이 옳기 때문만은 아니다(언어는 지금 눈앞에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교사(나)의 질문은 사람들의 사회학Ethnomethodology을 창시한 해롤드 가핑클의 제자이자 연구 동료인 하비 삭스Harvey Sacks에 따르면 ‘인접쌍 혹은 인접짝adjacency pair’의 제1성분을 구성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인접쌍’의 특징을 한 마디로 하자면 그것은 우리의 직관으로 나타나는 가장 단순한 행위유형으로서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물음’과 ‘대답’은 함께 인접쌍을 이루고 ‘물음-대답’은 하나의 완결된 행위 유형이다. 삭스와 그의 동료들은 다음과 같이 인접쌍의 특징을 요약하고 있다.
즉 인접쌍은 (1) 두 가지 발화로 성립되고, (2) 이 구성요소로서의 두 가지 발화(예를 들면 ‘물음’과 ‘대답’)은 서로 인접해서 위치하고, (3) 각각의 발화를 각각 다른 화자가 만들어 낸다. 즉 ‘물음’을 발하는 자와 ‘대답’을 발하는 자는 각각 다른 사람이다.
그리고 왜 ‘물음’과 ‘대답’이 밀접히 관련되는가 하면 회화참가자가 양자(물음-대답)를 하나의 유형화로 여기기 때문이다. 즉 어떤 인접쌍의 유형은 인접쌍의 제1성분(예를 들면 ‘물음’)과 제2성분(예를 들면 ‘대답’)을 관련지어서, ‘물음/대답’이라고 유형화함으로써 형성된다. 따라서 (4) 각각의 성분 사이에는 상대적인 순서가 존재하고(즉 제1성분이 제2성분의 앞에 온다), (5) 어떤 성분은 또 하나의 성분에 무엇이 올 것인가를 특정한다. 즉 어떤 제1성분을 구성요소로 하는 인접쌍의 유형은 그것에 대응한 제2성분의 선택에 영향을 준다.
이러한 회화상의 흐름을 회화에 참가하는 사람의 시점으로부터 고쳐서 말해보면 어떤 발화를 특정한 사회적 행위(예를 들면 ‘질문’으로서) 인식한 회화참가자는 처음의 발화(제1성분)와 인접이 되는 제2성분(즉 ‘대답)을 만들어 내게 된다. 혹은 말을 바꾸면 여기서 제1성분의 상대가 되는 사람은 다음 순서에서 제2성분을 산출하는 것이 강하게 기대된다. 물론 이것은 기대이기 때문에 반드시 실제로 그렇게 된다고는 단정 지을 수 없다.
관계에 따라 대답이 달라진다
실제로 (1-지금 유인물을 읽고 있습니다)은 교사(나)의 질문에 대한 제2성분 즉 대답은 아니다.(그 사실은 분석자인 나의 눈에도 보이고 독자인 여러분들 눈에도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성분이 본래 여기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 학생은 (1)을 발하면서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말을 바꾸면 그것을 일종의 도덕적 규범으로서 느끼고 있다). 즉 그는 지금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을 혹은 대답하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필요한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정확한 기술을 하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이른바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유)에 대한 설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1)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사안은 발화가 이러한 행위를 구성한다고 내(연구자로서)가 분석할 수 있는 것은(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 또한 분석가능한 것은) 나와 그가 그 장에서 ‘교사’ ‘학생’으로서 만나고 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보통 ‘유인물을 읽는다’는 것은 상황에 따라서는 대답하기 위한 준비도 될 수 있다. 만약 교수회의같은 곳에서 내가 동료에게 질문을 하였을 때 (1)과 같은 말이 돌아왔다고 하면 나는 다른 동료에게 질문을 하지 않고 그대로 처음 질문을 한 동료로부터의 대답을 기다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1)이 대답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대답의 회피가 된 것은(대답의 회피로 나의 눈에 비친 것은 혹은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의 눈에 비친 것은 나아가 그 회화를 나누고 있는 나와 그 학생의 눈에 비친 것은) 처음의 (나의-교사로서의) 질문의 성질에 의한다. 따라서 그 학생이 ‘대답을 회피’할 <의도>를 갖고 있다는 것이 우리 눈에 훤하게 보이는 것이다. 상식적인 편견과는 달리 ‘의도’라는 것은 우리가 접근 불가능한 이른바 금고나 상자처럼 유폐된 개인의 내면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특정한 사회적 행위를 구성함으로써 접근 가능한 것이다.
나의(교사로서의) 질문은 나 자신이 이미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고 있는 자(quasi-question)로서 거기에 등장하고 있고, 그 질문은 길거리를 지나가면서 누군가에게 시간을 물어보는 사회적 행위(실제로 시계를 차고 있지 않아서 모르는 정보를 타인에게 구하는 것)가 아니라 상대의 능력을 알아보기 위한 특별한 사회적 행위를 구성하고 있다.
한편 ‘유인물을 읽고 있다’라는 것은 그 응답자의 능력에 관한 상태를 함의한다. 특히 그의 말이 현재진행형 표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의 말은 적어도 지금까지 유인물을 시간을 내어 읽어 봤음에도 조금 더 유인물을 읽을 시간이 필요할 정도로 수업시간에 배우는 내용을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만약 응답자의 능력이 어떤 특정한 발화를 통해서 시사된다고 하면 나의(교사로서의) 질문의 소기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 된다. 그리고 두말할 필요도 없이 특히 수업 중에 교사가 학생에게 던지는 질문은 ‘학생’의 능력을 측정하기 위한 질문이라고 일반적으로 기대되고 있다. 학생은 또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교사인 내가 알고 있다고 기대하고 있다. 그가 (1)처럼 말함으로써 대답을 회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학생으로서 거기에 등장하였기 때문에 다름 아니다.
활동은 관계사와 동사로 인해 이루어진다
나와 그와의 관계가 적절히 ‘교사/학생’인 한 (1)은 대답의 회피라는 사회적 행위를 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일의 순서에 관해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결코 먼저 적절한 아이덴티티 카테고리가 부여되어서 그것에 기초해서 어떤 활동이 이루어지는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특정한 마음이 있고 그 마음에 기초해서 활동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그러한 발상은 명사적 사고를 되풀이 할 뿐인 것이다.
상식의 편견(명사적 사고에 묶인 상식인들의 습벽)과는 사뭇 다르게, 내재적 속성 자체가 곧 의미나 가치의 원천이 되는 사물이나 사태는 극히 드물다. 예를 들어, 선생, 아버지, 애인, 사랑, 고독, 애국심 등등의 개념들은 스스로의 의미를 자기충족적으로(self-sufficiently) 담지하고 있는 독립된 실체를 가리키는 보통 명사가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는 한결같은 관계사인 것이다. 가령, '장모님'이라는 명칭은 어떠어떠한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여건들을 갖추고 있는 특정한 여인을 가리킨다기보다 오히려 그 이름이 사용되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태를 드러낸다. 위의 “지금 유인물을 읽고 있습니다”라는 회화에 대한 분석에서 볼 수 있듯이 ‘선생’이라는 것은 보통 명사가 아니라 관계사 혹은 ‘선생 일을 하고 있는 것(doing teacher)’과 같은 동사이다.
즉 우리는 특정한 활동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성원 카테고리(예를 들면)교사 혹은 학생을 관리하고 자신들의 카테고리를 관리하면서 그때 그때 해야 할 활동을 수행하는 것이다. 즉 카테고리와 활동과의 관계는 동적이다.
이 분석에서 얻은 식견을 하나의 예화를 통해서 다른 각도에서 예증해 보고자 한다.
이것은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미국 영화에서 찾아낸 것이다.
주인공은 마리아라는 이름의 견습 수녀인이 어느 퇴역해군 대령 집에 아이들의 가정교사로서 일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 집 아이들에게는 마치 군대처럼 규율이 강제적으로 부과되어 있다. 모두 제복을 입고 호각에 맞추어서 진열을 맞추어서 걸어가야 하는 등.
그래서 마리아는 대령에게 아이들에게 놀이할 때 입는 옷이 필요하다고 요구한다. 사주는 것이 어려우면 천이라도 주면 자신이 만들겠다고 말한다. 대령이 마리아의 요구를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할 때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어진다.
(2)
마리아: 하지만 그들은 아이입니다(But they are children.)
대령: 말씀하신대로. 그리고 나는 아버지입니다.(Yes. (And) I am their father.)
여기서 마리아가 말하고 있는(행위 하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어떤 성원카테고리가 언급될 때 단지 그 카테고리뿐만 아니라 그 카테고리에 속하는 집합이 동시에(그 장에 적절한 것으로서) 언급된다. 마리아가 “그들은 아이이다”라고 말할 때 마리아가 ‘아이’라는 카테고리와 함께 언급한 것은 ‘인생단계의 집합’ 즉 ‘아기, 아이, 청년, 어른, 노인....’과 같은 집합이다. 그 때 마리아와 대령에 대해서 적절하게 사용해야 하는 카테고리는 함께 ‘어른’임에 틀림없다.
마리아가 (2)와 같이 말할 때에 ‘어른은 아이에게 구김살 없는 생활을 보장해야 한다’라는 ‘어른/아이’관계에 관한 일반적인 기대를 품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들린다(우리에게 들릴 것을 기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대령에게도 그렇게 들릴 것을 기대하고 있다).
즉 마리아가 대령을 향해서 ‘그들은 아이다’라는 사실을 말할 때 그녀는 ‘어른’인 대령의 아이에 대한 태도를 똑같은 ‘어른’의 입장에서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리아의 이러한 비난에 대한 대령의 대응은 아주 교묘하다.
그는 “내가 아버지다”라고 말함으로써 마리아가 언급한 ‘아이’를 인생단계가 아니라 ‘가족’ 즉 ‘아버지, 어머니, 아이, 형제...’와 같은 집합의 요소로서 다룬다. 그 때 마리아가 (아직) 이 가족의 성원이 아닌 이상 그녀에 대해서 적절하게 적용할 수 있는 카테고리는 그 집합 안에는 없다. 즉 그녀는 ‘아무것도 아닌 자’ 혹은 기껏해야 ‘제삼자’ 밖에 되지 않는다. 대령의 발언에 의해서 마리아에게 환기되는 것은(우리에게도 환기되었다) ‘아버지가 아이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 혹은 ‘가족 일에 제삼자는 껴들어서는 안 된다’라는 일반적인 기대이다.
개체환원주의가 아닌, 어떤 성원카테고리를 구성하는가
대령은 때마침 ‘아이’라는 성원카테고리가 두 가지 다른 카테고리 집합에 속한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마리아로부터 아이들의 일로 대령에게 요구하는 권리를 빼앗는 사회적 행위를 구성하였다. 즉 대령은 마리아의 비난에 대해서 ‘당신하고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라고 응수하고 있다.
마리아와 대령은 자신들이 어떤 자로서(어떤 아이덴티티로서) 거기에 등장하고 있는지(‘아이’에 대한 ‘어른’으로서인지 아니면 ‘아이’에 대한 ‘제삼자’ 혹은 ‘아버지’로서 인지)를 서로 미세하게 조작하면서 게다가 다른 한편으로는 인접쌍이라는 유형화(이 경우는 ‘비난-정당화’)에 따라서 자신들의 행위를 조직하고 있다. 이처럼 어느 아이덴티티 카테고리가 그때 그때 적절한지는 일정한 행위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당사자들 자신에 의해서 그 장에서 관리되고 유지되고 갱신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아이덴티티’라는 것이 독립된 실체(명사)로서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는 심리주의 혹은 개체환원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도 기능한다.
상식적인 말에 불과하겠지만, 문학적인 묘사는 설명에 필연적으로 수반되어야 하는 개념적 분식(粉飾)과 절개(切開)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 따라서 체계와 도식과 형이상학적 사변과 자칫 공소(空疎)해질 수 있는 논리적 작업에 주안했던 철학적 전통이 그간 망실했던 <일상성>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일차적 준비는 아마도 섬세한 문학적 촉수가 될지도 모른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일상성의 회복—물론 그는 언어적 일상성에 국한시켜 논의를 전개하고 있지만—을 위해서는 “설명을 없애고 기술로써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 그의 적절한 지적처럼 설명과 기술의 차이는, 우선 후자가 삶의 일상성을 작위적으로 간섭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그대로 둔다”는 사실에 있다. 요컨대 삶과 경험의 원초성 속에서 인간에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들을 구성하는 방식에 기술적으로 관심하는 현상학적 시각이야말로 모든 인간의 문제를 절절하게 살아 있는 생활세계의 문맥에서 처리하고자 하는 문학적 감수성의 원야(原野)에 어울리는 촉수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문학이란 현상학의 가능성일 수 있으며, 아울러 문화와 학문이 빼앗아간 살아 있는 생활세계를 부단히 되돌려주는 작업으로서의 문학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영민 저,『서양철학사의 구조와 과학』
2002년에 일본을 방문한 미국의 EM 연구의 대표자인 Psathas는 “회화분석은 어떤 일상회화를 녹음해서 분석하는 현미경을 발명하였다. 그런데 일단 현미경을 들여다보니 거기에는 보는 사람을 점점 끌어들이는 미세한 문화장치가 전개되고 있었다”라고 말한 것의 의미를 최근에 와서야 좀 더 절실히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책 > [책]좋은 글은 심금을 울린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동섭] 수업이라는 환상을 어떻게 재디자인할 수 있을 것인가? (0) | 2016.05.17 |
---|---|
[박동섭] I-R-E라는 환상 세계 살고 있는 아이들 (0) | 2016.05.17 |
[박동섭] 가르침에 관해서-선택받지 못하는 리스크를 감수할 용기 (0) | 2016.05.02 |
[박동섭] 스승을 갖지 못한 자는 <비고츠키>를 이해하는 것이 절망적으로 어렵다 (0) | 2016.04.26 |
[박동섭] 제자가 된다는 것 (0) | 2016.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