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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방랑자

[박동섭] 수업이라는 환상을 어떻게 재디자인할 수 있을 것인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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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섭] 수업이라는 환상을 어떻게 재디자인할 수 있을 것인가?

gunbbang 2016. 5. 17. 11:13

우리가 디자인된 현실 속에 살고 있다는 논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내가 참여 관찰한 어느 수업 장면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초등학교 4학년의 수학시간에 도형의 정의를 공부하면서 아이들은 삼각형 형태 색종이로 어떤 모양을 만드는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 마음에 드는 모양이 완성되면 손을 들어 교사를 부른다. 교사는 완성된 모양을 확인한 후 B5 크기의 종이를 건네면 아이들은 거기에 자신이 만든 작품을 붙여서 제출한다. 이 수업을 관찰하던 필자는 서서히 아이들의 손이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자신만만하게 힘차게 손을 들어 올리는 아이들 속에 끝까지 손을 들지 않는 한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주위 친구들은 종이에 자신의 작품을 채워가고 있는데 이 친구만 아직 만들고 있는 중이다.

 

 

 

아이의 능력을 가시화시키려 학교는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일에 열중해서 무언가를 달성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 또 무엇인가를 달성하는 속도도 보인다. 또한 아이들 작품의 창의성 유무와 잘되었는지의 여부도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객관적 사실로서의 아이의 능력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관찰하고 있는 것은 아동 내부에서 일어나는 학습의 모습일까?

혹 우리는 아이 내부에 붙박여 있다고 생각되는 소위 능력능력차라는 것을 가시화시키기 위해 외부에서 부단히 뭔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여기서 관찰된 아이들의 내부 모습(예컨대 능력)’은 실은 바깥의 수업 디자인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과제를 완성하면 손을 드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정해서 동시에 과제를 회수하면 아이들 사이의 작업 속도 차이라는 현실과 끝까지 손을 들지 않는 아이의 모습은 실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아이들에게 개별 작업을 시켜 일대일 지도를 하는 경우나 반에서 통틀어 한 장만을 만들어 내는 수업 디자인의 경우도 그러했을 것이다.

 

 

 

능력 가시화를 위한 특정 관찰 테크놀로지

 

이러한 시각은 수업 디자인아이의 능력에 관한 흥미로운 관계를 시사한다. 즉 교사의 눈앞에 있는 아이가 예컨대 공부를 잘하는 아이인가, 못하는 아이인가하는 것은 아이가 내부에 갖고 있는 즉 원래부터 갖고 있는 개체의 속성이 아니라 특정한 수업 디자인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우리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수업 디자인이란 단순히 수업교재와 과제, 목표 설정에 그치지 않고 아이를 어떤 존재로 만들고 다룰 것인가하는 정체성의 디자인인 것이다. , 학습 환경을 디자인하는 것은 아이를 어떠한 존재로 다루고 싶은가?’ 그리고 어떤 존재로 만들고 싶은가?’라는 지극히 사회문화적인 의사결정의 과정을 내장하고 있다.

예컨대 단순히 읽고 쓰고 셈하는 능력만을 학력學力으로 정의하면 학력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지식을 주입하고 그것이 아이 내부에 제대로 정착되었는지를 알아보는 수업 디자인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즉 아이 내부에 있다고 여기는 학력이라는 것을 가시화시키기 위해서는 아이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아이의 바깥즉 특정한 관찰의 테크놀로지(예컨대 다음과 같은 말하기 방식; 교사: 지금 몇 시입니까? 학생: 1050분입니다 교사: 참 잘했어요!)를 사용한 수업 디자인을 구성하면 된다. 이 경우 아이는 필연적으로 학력을 담고 있는 그릇혹은 용기로서 다루어지게 될 것이다.

 

 

 

성적표라는 능력 가시화 장치

 

아이가 내부에 갖고 있다고 보는 학력을 가시화시키기 위해서 이러한 관찰의 테크놀로지 외에 또 무엇이 필요할까? 아이의 학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사람들이 알고 싶은 마음이 생길 거니까 푸코M. Foucault식으로 말하자면 장부성적표라는 사회역사적 인공물artifact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성적표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한 또 다른 사회역사적 인공물인 평균’, ‘분산’, ‘표준편차와 같은 도구도 필요하겠다. 따라서 공부를 잘하느냐 못하느냐, 누가 우수하고 누가 뒤처지느냐라는 마음이 만연하는 현대 한국의 교실은 원래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 이러한 여러 사회역사적 인공물에 힘입은 근대 이후에 생겨난 디자인된 현실덕분인 것이다. 그리고 그 디자인된 현실 덕분에 학교가 없었던 시대의 개인과는 다른 종류의 개인도 탄생되게 된 것이다.

 

 

현대의 아동심리학이 추구해야 할 과제는 다름 아닌 영원한 아이(Eternal Child)가 아니라 역사적인 아이(Historical Child), 혹은 괴테의 시적인 말을 빌려서 말해 보면 순간순간을 사는 이(Transitory Child)를 밝히는 것이다. 건축가가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돌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건축가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것이다 -Vygotsky, 1934.

 

 

 

가시화 하기 위한 디자인이 바뀌면 분위기도 바뀐다

 

유럽에 유학하고 있는 어느 한국인 여고생이 교실에서 느낀 이질감의 정체도 그녀가 현대 한국의 교실과는 다른 디자인된 현실에 살고 있음에 연유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선생님이 성적표를 나눠 주기 위해 학생 이름을 한 명씩 부릅니다. 자신의 성적표를 받아든 학생들 대부분이, 성적표를 보곤 (만족스럽다는 듯이)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릅니다. 유럽에서 공부 중인 우리나라 여고생이 전하는 한 교실의 풍경입니다. 처음엔 겨우 두세 개만 틀려도 시험을 잘 못 봤다며 유럽 친구들 앞에서 울상을 짓다가 거의 왕따 수준의 공격을 받을 뻔했던 한국 여고생은 이제 그들을 이해하는 눈치입니다(정혜신 이명수 저, 홀가분중에서).

그 한국인 여고생이 재학 중인 유럽의 어느 학교도 성적표는 확실히 존재한다. 그런데 모르긴 해도 그 성적표에는 점수는 나와 있되 반 석차전교 석차같은 우리에게 익숙한 사회역사적 인공물은 포진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그 도구는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인데, 그러한 것들이 없다 보니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신의 성적표를 보고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울상을 짓는 것에서 그들을 이해하는 듯 바뀐 한국인 여고생.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A라는 디자인된 현실에서 B라는 디자인된 현실로 갈아타기를 통해서 얻은 성과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