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방랑자
[박동섭] 내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 1. 들어가며 본문
미래의 직인을 위한 석공일을 하던 석공
졸업논문의 최종수익자는 내가 아닌 모든 것
학술연구란 집합적인 일이다
나의 연구활동은 ‘end-user’가 아닌, ‘pass-user’일 뿐
모스의 증여론 1 - 마오리족의 하우에 대해
모스의 증여론 2 - 답례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길 때, 비로소 선물이 된다
레비스트로스의 커뮤니케이션론 1 - 답례는 다른 대상에게 하는 것
레비스트로스의 커뮤니케이션론 2 - ‘근친상간 금지’가 사회를 시작시켰다
레비스트로스의 커뮤니케이션론 3 - 침묵교역은 가치를 알 수 없는 것으로 유지된다
1. 들어가며
일본의 농어촌과 산야 지대를 살다간 서민들의 생활사를 직접 발품을 팔아가면서 극명하게 기록한 미야모토宮本의 <서민의 발견>(1987). 그 책에 다음과 같은 돌담을 쌓는 일을 업으로 하는 한 명의 석공 이야기가 나온다.
미래의 직인을 위한 석공일을 하던 석공
돈이 필요해서 하는 일이긴 하지만 결코 좋은 일은 아니다. 때로는 엄동설한 겨울에 때로는 강 한 가운데서 하는 일은 울고 싶어도 울 수도 없는 괴로운 일이다. 내 자식한테만큼은 석공 일을 시키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만큼은 이 일을 하면서 평생 살고 싶다. 시골길을 걷다가 훌륭한 돌담이 쌓여 있는 걸 보면 감동을 받을 때가 있다. 이런 곳에서 이런 돌담을 쌓은 석공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정성을 다한 일을 하였을까 라고 생각해 본다. 그 마을 사람 이외에는 봐주는 사람도 없는데....
그런데 석공 일을 하다 보면 역시 좋은 일을 하고 싶어진다. 두 번 다시 무너지지 않을....그리고 그것만 생각한다. 돌을 쌓고 나면 그것으로 그 토지와의 인연은 끊어진다. 그런데 좋은 일을 하고 나면 역시 즐겁다. 내가 쌓은 돌담을 보고 나중에 온 사람들이 새로운 돌담을 만들 때, 역시 허술한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전에 일하러 온 사람이 조잡한 일을 하면 뒤에 온 사람도 조잡한 일을 하게 된다. 또한 일을 하청 받아서 하는 경우라면 경비를 아끼려고 부실한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 역시 제대로 된 일을 하는 것이 좋다. 내가 한 일이 비 같은 걸로 무너질 리가 있나 하는 자신감이 실제로 비가 내릴 때에 맘속에서 샘솟는다. 결국 일을 잘 해 놓으면 그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나중에 온 사람도 그 마음을 이어주는 것이다.(宮本, 1987: 143).
“누군가로부터 칭찬받지 않아도 자신의 적성이 풀리는 일을 하고 싶다”고 이 석공은 말하고 있다. 이 석공의 말에 대한 화답으로 작가인 미야모토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누군가에게 명령받지 않아도 스스로 자신에게 명령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이 사람들은 자신의 말을 통해서 배우고 있는 듯하다.(宮本, 1987: 144)
이 글에 등장하는 석공은 시골을 돌아다니다가 훌륭하게 잘 쌓아 놓은 돌담에 감동을 받고, 자신이 쌓은 돌담이 미래의 석공의 눈에 띄었을 때도 부끄럽지 않은 일을 해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때 석공의 생각과 그의 작품인 돌담은 아직 만난 적이 없는 미래의 직인職人을 그 수신인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잠시 이런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은 어떨까? 실제 교육활동에 종사하고 있고, 교육학 연구를 하고 있는 우리는 아직 만나지 않은 미래의 교사 혹은 미래의 연구자를 그 수신인으로 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지금 아직 만나지 않은 미래의 세대를 향해서 이 석공처럼 부끄러운 일, 창피한 일은 할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졸업논문의 최종수익자는 내가 아닌 모든 것
연구자가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으로서 아직 만나지 않은 미래의 독자 혹은 연구자를 위한 글쓰기를 강조하는 다음의 우치다(內田, 2015)의 관점은 이름 모를 석공의 생각과 상당히 공명한다.
졸업논문은 자네들 대부분에게 있어 생애에 단지 한번 쓰고 마는 ‘학술논문’이다. 그것은 잠재적으로는 ‘만인’이 독자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졸업논문은 교수 혼자서 읽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만약 데이터 수치가 틀리거나 인용문헌의 서지정보가 틀리거나 사실오인이 있거나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이 쓰여 있는 경우, 설령 그것을 교수가 읽지 않고 넘어갔다고 하더라도 다른 누군가로부터 지적 받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이전 졸업생 중 자신의 논문을 인터넷에서 공개하였을 때,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글을 도용하였다고 지적한 경우가 있었다. 그 학생은 설마 도용당한 본인이 자신의 논문을 볼 것이라는 생각도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논문의 독자가 ‘만인’이라는 것은 글쓴이에게 그 나름의 긴장감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스트레스를 가져오는 긴장감이라고는 할 수 없다. 제군은 ‘자네들과 똑같은 주제로 졸업논문을 쓰게 될 몇 년 후의 우치다연구실의 후배’를 독자로 상정해서 논문을 쓰길 바란다. 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 것이다.
꼬치꼬치 따지는 평가를 의식해서 문장을 쓰는 것이 언제나 좋다고는 할 수 없다. 대개의 경우 평가자를 의식해서 ‘자신의 논문이 얼마큼의 점수를 얻을 수 있는지?’ 겁을 내면서 쓰는 것보다도 자신의 후배를 상정 독자로 해서 그녀들이 ‘자신의 논문으로부터 얼마큼의 이익과 유쾌함을 얻을 수 있는가’를 상상하면서 쓰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떻게 쓰는 게 좋을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자네들 자신이 이 주제로 졸업논문을 쓰려고 결정하였을 때에 “이런 선행연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그것을 그대로 후배들을 위해 쓰면 된다. 논리적인 기술에 신경을 쓰는 것도 인용에 정확함을 기하는 것도 데이터와 사료의 자의적인 해석을 자제하는 것도 그것은 자네들이 쓴 ‘선행연구’를 후배들이 그 위에 설 수 있는 ‘어깨’로 제공하기 위함이다. 자네들이 읽기 쉽고 논리적이고 데이터가 풍부하고 신뢰성이 높은 연구논문을 남기면 그것은 ‘public domain’으로서 많은 후속 연구자들이 반복적으로 이용하게 된다. 학술연구에서는 ‘피언급회수, 피인용회수’가 그 논문이 가진 영향력의 척도로서 평가를 받는데, 그것은 말을 바꾸면 그 연구의 ‘사회성, 공공성’이 높다는 것이다.
자네들이 지금부터 쓰게 될 논문의 가치를 판정하는 것은 지도교수인 내가 아니다. 지금부터 자네들의 논문을 읽게 될 ‘아직 존재하지 않은 독자들’이다. 논문은 그 사람들을 위해서 쓰지 않으면 안 된다. 리포터의 경우 아무리 질이 낮은 것을 쓰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인용문헌이 누락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읽고 실제 피해를 입는 독자는(절망적인 기분이 드는 교수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논문’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만약 자네들이 인용 출전의 페이지수를 잘못 기재하거나 서명을 잘못 기입하면 후배들이 출처를 찾다가 지쳐서 도서관에서 이리 저리 몇 시간이나 낭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논리적으로 기술되어 있지 않은 논문을 읽으면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를 알기 위해서 반복해서 같은 페이지를 읽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 논문의 질이 좋은지 나쁜지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은 아직 만나지 않은 독자들이다. 자네들이 질이 좋은 논문을 쓰면 그것에 의해서 이익을 얻는 것은 아직 만나지 않은 독자들이다. 자네들은 그 사람들을 향해서 ‘좋은 패스를 하는 것’이 기대된다. 논문쓰기에서 자네들은 end user(역자주: 논문쓰기를 통해서 최종적으로 그리고 독점적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가 아니라 패스하는 사람인 것이다(內田, 2015: 332-334).
미야모토가 들고 있는 석공의 돌담을 쌓는 행위와 우치다가 자신의 지도학생들에게 강조한 학술논문을 쓰는 행위를 나는 이 연구에서 ‘증여’라고 부르고자 한다. ‘증여’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는 후술하겠지만, 증여는 위의 두 가지 사례에서 엿볼 수 있듯이 반드시 시간이라는 차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 따라서 연구 그리고 교육을 비롯한 사회적 활동은 단기간에 그 성과를 보려고 하는 근시안적인 태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 그리고 증여라는 활동은 그것을 ‘증여’ 혹은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야 비로소 ‘증여’로서 기능한다는 것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증여의 관점에서 보면 연구 그리고 교육을 비롯한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사회적 활동들의 최종수익자는 그 활동을 지금하고 있는 당사자 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평소에 수행하고 있는 모든 사회적 활동을 ‘증여’의 관점에서 고쳐보면 그 모든 활동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집단이 주체가 되어서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면에 부각될 것이다. 그리고 그 집단의 성원은 지금 여기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성원들뿐만 아니라, 이제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사람들도 그리고 아직 성원이 되지 않은 미래의 사람들도 포함하고 있다.
학술연구란 집합적인 일이다
이 글에서는 ‘증여’라는 활동으로 교육을 고쳐보는 관점에 기초해서 작금의 교육이 어떠한 문제들을 안고 있는지, 우리가 교육이라는 활동에서 그 동안 못보고 지나친 것은 무엇인지, 현재 교육이 안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그리고 교육을 고쳐 정의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지 등을 탐구하는 것을 연구 목적으로 하고자 한다.
나는 이름 없는 석공과 우치다와 같은 선철들의 가르침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은 화답의 의미에서 학술연구는 본래 ‘집합적인 일’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그 학술연구를 통해 이익을 보는 사람은 ‘나’ 자신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연구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포함해서)을 비롯해서 아직 만나보지 않은 미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학술연구를 ‘집합적인 일’로 본다고 하면 연구방법이나 연구 주제 그리고 연구영역은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학술공동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 활동은 예컨대 등산을 할 때 “나는 이 루트로 올라가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각자 다른 루트를 개척해 보세요. 그래도 함께 정상을 목표로 합시다.”라는 비유적인 말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등산 루트를 따라서 올라가 봤는데, 딱 길이 막혔을 경우는 어떤 기분이 들까? 그 때 우치다의 표현을 빌려서, 나 자신이 ‘end user’라고 하면 “아 그동안 내가 기울인 노력과 수고가 수포로 돌아갔구나”고 생각하겠지만, 학술연구는 ‘집합적인 일’이라고 관점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즉 학자공동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내가 한 일은 학술공동체에 충분히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연구는 ‘더 이상 올라가는 길 없음’이었지만 그래도 집단적인 지혜의 축적에는 일비지력一臂之力이라도 도움을 준 것이다.
나의 연구활동은 ‘end-user’가 아닌, ‘pass-user’일 뿐
나는 연구자로서 ‘나’로 시작하는 논문쓰기를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그 ‘나’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다름 아닌 우리 삶에 널리고 널린 일상의 편린들을 글쓰기의 소재로 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런 글쓰기가 정착되지 않은 한국의 교육학 관련 학술잡지에서는 평가가 대부분 낮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교육학 연구자로서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학교라는 제도는 왜,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사제관계는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가?,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일련의 물음들에 관해서 원칙적인 합의가 있긴 있는 것인가?, 아니 이런 물음들에 대한 사회적인 합의가 해체되고 만 것은 아닌가?와 같은 근원적인 물음을 탐구하는 것을 주된 연구주제로 삼고 있다. 그런데 나의 경험이 가르쳐주는 바에 의하면 이런 근원적인 물음을 탐구하는 연구 또한 대부분의 교육학 관련 학술잡지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흘러서 내가 죽고 난 이후에 세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회자되기 시작되었다고 하자. “OOO이라는 사람이 옛날에 있었는데, 별로 사람들이 오르지 않는 ‘일상의 편린들을 소재로 삼는 <나>를 주제로 하는 논문 글쓰기 루트’ 그리고 ‘교육, 배움, 학교,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와 같은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는 루트’를 개척해서 오르는 일을 반복하다가 체력과 기력이 다해서 급기야는 조난을 당해서 죽었다고 한다.”
이 경우 내 연구활동의 ‘end-user’를 배타적으로 나로 설정한 경우는 너무나도 억울할 일이지만, 학술활동을 석공의 일처럼 그리고 우치다의 논문을 쓰는 궁극적인 이유탐구에서 나온 것처럼 즉 누군가에게 ‘패스’ 혹은 ‘증여’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관점을 바꾸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비록 그가 조난을 당해서 죽었지만, 그의 노력 덕분에 그 지점까지 올라가는 안내표지나 지도도 만들어졌고, 위험을 방지하는 난간도 마련되어 있다. 그래서 그 루트를 한번 올라가 보고 싶은 미래의 후학이 있다고 하면 내가 조난을 당해서 죽은 곳까지는 비교적 수월하게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동시대의 사람들을 포함해서 아직 만나지 않은 미래의 누군가에게 내 연구가 가치 있는 그 무엇으로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이 연구 또한 하고 있다.
반복하자면, 나는 이 연구에서 증여라는 개념을 축으로 삼아서 교육론을 풀어내는 것을 연구 목적으로 삼고자 한다. 이 연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첫째, 모스(Mauss, 1989)의 증여론과 레비스트로스(Levi Strauss, 2000)의 커뮤니케이션론에 기초해서 증여의 근원적 의미를 탐구하고자 한다. 두 번째, 이러한 두 명의 사상가의 관점에 기초해서 증여에 대한 좀 더 확장된 논의를 시도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교육을 증여의 일종으로 고쳐보고자 하는 우치다의 교육론에 대한 탐구를 시도하고자 한다.
'책 > [책]좋은 글은 심금을 울린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동섭] 귀찮은 일을 싫어하지 않는 능력 (0) | 2016.05.25 |
---|---|
[박동섭] 내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 2. 모스의 증여론과 레비스트로서의 커뮤니케이션론 (0) | 2016.05.24 |
[박동섭] 수업이라는 환상을 어떻게 재디자인할 수 있을 것인가? (0) | 2016.05.17 |
[박동섭] I-R-E라는 환상 세계 살고 있는 아이들 (0) | 2016.05.17 |
[박동섭] “지금 유인물을 읽고 있습니다”의 현상학 (0) | 2016.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