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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섭] 귀찮은 일을 싫어하지 않는 능력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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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섭] 귀찮은 일을 싫어하지 않는 능력

gunbbang 2016. 5. 25. 09:10

이번에 일본 아마존에서 구입한 벌루투스 마우스가 건전지를 넣어야 작동하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어 숙소 근처의 LAWSON이라는 편의점에 오늘 아침에 건전지 구입을 위해서 갔다.

 

 

 

매뉴얼에 따른 대응과 손해의 감수

 

그런데 마우스 설명서에 나와 있는 마우스 기동을 위해 사용해야 할 건전지 형판은 AA형으로 나와 있는 반면에 일본 편의점에 판매하고 있는 건전지 형판은 다른 단위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뭔가 쓰여 있었는데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다 보니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대충 어림짐작으로 봤을 때는 가장 작은 건전지 보다 조금 더 큰 크기(보통 이 크기의 건전지를 우리는 많이 사용한다)가 마우스에 맞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의 육안에 기초한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계산대로 갈 때는 두 종류의 건전지를 함께 내밀고, 편의점 점원에게 어느 건전지가 맞는지 조언을 구하게 되었다.

편의점 직원은 본인 스스로도 어느 쪽이 마우스에 맞는 건전지인지 자신 없어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일단은 이렇게 나에게 말했다.

이거 만약 구입해서 혹시라도 건전지가 이것(마우스를 가리키며)과 맞지 않으면 환불은 불가능합니다

....우짜지

 

 

 

귀찮은 것을 싫어하지 않는 능력이 만든 사람풍경

 

그래서 나도 어쩔 수 없이 감으로 결정할 해야 할 것 같아서 그 중 하나를 선택하려는 순간, 뭔가 생각이 났는지 그 점원이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나서는 안 쪽으로 들어가서 건전지 하나(내가 계산대로 가져온 두 개의 건전지 중 큰 건전지)를 가져와서 마우스에 끼워 보는 것이다.

아마도 이 LAWSON이라는 편의점의 접객 매뉴얼에는

어떤 형판의 건전지를 자신이 필요로 하는 머신에 넣어야 할지 모르는 객을 위한 사안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편의점 직원은 코드화된 매뉴얼에 따르지 않으면서도(매뉴얼 자체에 쓰여 있지 않기 때문에 따른다는 말은 좀 어폐가 있지만서도) 객의 요구에 혹은 객의 곤란함에 아주 유연하게 대처한 것이다.

나는 귀찮은 것을 싫어하지 않는 능력을 가진 그 점원 덕분에 실패의 염려 없이 건전지를 구입할 수 있었다.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능력은 구조적으로 사라져 갔다

 

초중고 수업을 비롯하여 대학에서의 수업, 친구를 사귈 때나 직업을 구할 때나 그리고 배우자를 구할 때 비용 대 효과의 효율을 철저히 따지는 작금의 사회에서 귀찮은 것을 싫어하지 않는 능력을 갖춘 그 청년의 배려는 참으로 귀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 귀찮은 것을 싫어하지 않는 능력의 함양에 조직적 그리고 구조적으로 눈을 돌려온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여기서 구조적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능력이라는 녀석이 마치 개체 혹은 개인 내부에 어떤 실체처럼 존재한다는 명사주의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강하게 담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지금처럼 수업을 비롯해서 정치 그리고 사람 사귀기까지 일종의 상품거래로 모든 게 디자인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귀찮은 것을 싫어하지 않는 능력이라는 환상은 결코 능력으로 가시화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재디자인이 꼭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