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방랑자
[박동섭] I-R-E라는 환상 세계 살고 있는 아이들 본문
내가 필드워크를 위해 정기적으로 방문한 교실의 어느 초등학교 담임교사는 김군이라는 학생이 자신이 정말 자신 있어 하는 과학 시험 문제를 하나 틀려서 의기소침해 있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는데,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시험문제는 정답만 담을 뿐 상황을 담지 못한다
과학시험에 출제된 것은 「다음 그림과 같이 두 개의 달걀이 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느 쪽 달걀을 선택하겠습니까??」라는 문제였고, 김군은 노른자의 높이가 낮고 흰자위가 물처럼 퍼져 있는 달걀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런데 김군을 제외한 같은 반, 모든 아이들이 노른자위가 높이 솟아 있으며, 흰자위가 모아져 있는 달걀 그림에 동그라미를 쳤다. 정답 역시 노른자위가 높이 솟아 있는 달걀이었다.. 그쪽이 신선한 달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반에서 유일하게 김군만이 노른자의 높이가 낮고 흰자위가 물처럼 퍼져 있는 달걀을 정답으로 골랐다고 한다. 냉장고에서 달걀을 두 개 꺼내서 그 중에 하나를 먹으려는데, 유통기간에 차이가 있다면 먼저 오래된 쪽을 먹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는 게 그 아이의 논리였다. 그런데 혼자 틀려서 아이는 꽤나 상처받았다고 했다.
달걀을 깨서 신선도를 확인하는 방법 자체가 애초의 목적(음식으로 먹는 것)에 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김군은 시험문제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겠습니까?’라는 질문을 ‘여러분은 어느 쪽을 먹을 것입니까?’라고 당연한 듯 치환한 것이다. 이 과학 시험에서 나온 물음은 실생활과 전혀 관계없이 진행된 하나의 질문에 불과하다. 무엇을 목적으로 달걀이 신선한지 오래되었는지를 알아보는가, 또 그것을 판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의 일상생활에서 나올 수 있는 질문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것이다.
당연히 학교에서 시험 문제로 출제된 이런 지식은 김군에게는 ‘익숙한 것’도 아니고 시험문제 이외의 용도로는 사용될 가능성도 희박하다. 그러나 김군은 맞벌이 하는 부모를 둔 덕에 스스로 요리를 하는 일이 잦았고, 처음부터 ‘실제 생활의 문제’로 이 질문을 받아들인 것이다.
문제가 있는 학교 특유의 회화 패턴
학교 수업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교사의 물음(발문이라고 불리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아이들의 사고는 그 교사가 발하는 물음에 대해서 그 대답을 찾는 활동으로서 아이들 머릿속을 촉발시켜서 그리고 그 때의 ‘정답’이야말로 ‘지식’이고 그것을 외우는 것이 ‘학습’한 것이 된다.
한편 아이들 입장에서 보면 교사가 어떤 ‘가르쳐야 할 것’을 염두에 둔 상태에서 그런 ‘발문’을 하고 있는지를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아이들은 발문자가 어떠한 의도로 어떤 목적으로 그런 물음을 던지고 있는지에 관해서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갑자기 물음들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교실에서 교사의 물음은 교사가 정말로 모르기 때문에 묻는 것이 아닌데, 그 사실 또한 아이들은 간파하고 있다. 즉 교사는 그 ‘대답’을 실은 ‘알고 있음’에도 일부러 모른 척 하면서 묻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교사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교사의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몸짓, 슬며시 숨기고 있는 힌트가 될 만한 단서로부터 뭔가를 찾아내는 것이 교사가 요구한 대답을 하는데 중요하다고 알고 있다. 이것도 일상 회화와는 전혀 다른 학교 특유의 회화 패턴이다.
IRE 대화법
미한(Mehan, 1979)은 일상 회화와의 대비를 통해서 교실 회화구조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해부하고 있다.
일상회화 |
교실회화 |
지금 몇 시 입니까? 2시 반입니다. 고맙습니다. |
I 교사: 지금 몇시입니까? R 학생: 2시반입니다. E 교사: 잘했어요 |
이 두 가지 회화패턴을 비교해 보면 양자의 차이는 명료하다. 일상 회화에서는 특정한 정보를 모르는 사람이 알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에 비해서, 교실에서는 알고 있는 사람(교사)이 모르는 사람(학생)에게 묻는 일이 일어난다. 가장 큰 차이가 이 두 가지 회화 사이에 존재한다. 일상 회화에서는 <질문><응답><사례謝禮>와 같은 단위가 회화를 구성하고 있는 것에 비해서 교실 회화에서는 <질문><응답><평가>라는 단위가 회화를 구성하고, 마지막의 <평가>를 교사가 수행함으로써 하나의 체계를 갖춘 회화가 된다.
이「교사주도의 질문과 지시teacher initiative」「학생의 응답student response」「교사의 평가teacher evaluation」를 미한은「I-R-E」의 구조로서 명시하고, 교실 회화구조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발문은 눈치가 빠른 학생이 학력이 높은 학생으로 만든다
어떻게 보면 아주 부자연스럽게 느껴야 할 회화가 왜인지 학교 안에서는 전혀 문제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아이들이 실은 진지하게 물음을 스스로의 물음으로서 받아들이기 전에 교사의 ‘이러한 물음을 먹잇감으로 해서 나중에 가르쳐서 머릿속에 집어넣을 예정인 것을 미리 알아차리는 감을 작동시켜, 제대로 ‘(교사가)기대하고 있는 반응’을 보여주는 습성을 학교에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기 때문이다. 교사의 발문에 이끌려서 교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추측해서 그리고 교사가 이 시점에서 ‘대답시키려는 것’을 알아차려서 그것에 맞게 제대로 대답하는, 학교라는 세계에서 통용되는 특수한 능력을 익힌 아이가 학습이 제대로 이루어진 아이이고 학력이 높은 아이로 대접을 받는 것이다.
결국 교실 회화패턴에 젖어 들면 아이들은 김군이 집에서 평소에 오래된 달걀과 신선한 달걀을 구분하는 것과 같이 세계 그 자체로부터 이른바 ‘진실’을 직접 배우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교사의 머릿속에 혹은 ‘학교의 교육과정의 단원으로서’ 어딘가에 (적어도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알 길이 없는 형태로) 있다고 가정되는 정답 외우기를 학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을 알아야만 하는가, 또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가 그리고 그것을 아는 것이 사는데 어떤 의미가 있는가. 실생활과 동떨어져 있는 과학의 질문을 이 아이는 제대로 읽고 파악한 것이다.
철학은 이 '작은 철학자'의 눈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시험본다’가 아닌 ‘묻다’로
또 한 가지는 학교 안에서 ‘제도화된 언어’에 관한 것이다. 학교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 인간관계에 엄청난 일그러짐을 발생시키는 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다. 학교에서 교사는 학생들에게 여러 지식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것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 시험을 본다.
그렇다. 사람을 시험해 본다. ‘시험 본다’는 말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가, 아닌가를 묻는 뜻이다.(교사: 지금 몇 시 입니까? / 학생: 3시 38분입니다. / 교사: 참 잘했어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실을 물어보는 상황을 의미하는 ‘묻다’와는 의미가 많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묻다’는 모르니까 배우고 싶어서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이때 묻는다는 것은 ‘알고 싶다’ ‘배우고 싶다’ ‘가르쳐 주길 원한다’ 등의 의미로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간절한 요구이자 청원이다. 가르쳐 주는 쪽에서도 무언가를 전하고 싶기 때문에 그 요구에 답하는 것이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학생에게 배운 지식을 기억하고 있는지 묻는 것이 마치 당연한 일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교사가 학생을 시험한다. 학생들에게 가지는 ‘신뢰’란 언제나 괄호 안에 들어가 있다. 옴짝달싹 못하게 매달려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시험 받는 학생들은 ‘질문 받은’ 상황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답이 올바른가, 아닌가에만 신경을 쓴다. 정답이라면 질문자가 소유하고 있는 지식을 자신이 맞췄다는 기쁨은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는 ‘알고 싶다’와 ‘전해주고 싶다’같은 신뢰는 존재하지 않는다. ‘전달한다/응한다’고 하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시험 본다/정답을 맞추다’의 관계로 슬쩍 바꿔 놓은 모양새다. 말하자면, 지식을 어떤 열쇠를 가져야만 열 수 있는 소유물로 여기고 교사가 이를 관리하는 파수꾼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전형적인 교실회화패턴 즉 질문하고 답하고 평가하는(Initiation-Response-Evaluation) 패턴 말고 새로운 교실회화를 우리는 충분히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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