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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방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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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건건빵빵

삶-흔적

gunbbang 2011. 1. 5. 19:33

지금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크나큰 결과가 되어 돌아온다는 믿음이 있다. 그게 나비효과라든지, ‘클리나멘이라든지, ‘毫釐之差 千里之繆라든지 하는 말로도 쓰이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아래의 시가 제격이다.

 

 

穿雪野中去

: 눈이 허옇게 내린

들판을 가드래도

 천     설     야     중     거

不須胡亂行

: 발걸음을 흐트러뜨리지 말아라

 불     수     호     란     행

今朝我行跡

: 왜냐 오늘 내가 가는 이 길은

 금     조     아     행     적

遂作後人程

: 뒤에 올 사람들의 길라잡이가 되느니라.

 수     작     후     인     정

 

 

 

 

서산대사가 남긴 말이란다. 지금 하는 행동이 지금의 나를 규정짓고 미래의 나를 얽어맬뿐더러, 나와 인연의 장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단다. 그러니 어찌 행동거지를 함부로 할 수 있을까?

 

 

 

신중론이 아닌 적극론으로

 

그렇지만 이 말은 실상 행동을 신중하게 하자는 말만은 아니다. 그런 식으로 독해한다면 그건 반절 정도만 맞은 것에 불과하니 말이다. 신중론의 핵심은 자의식의 과잉, 손익분기점 따지기의 극치일 수밖에 없다. 늘상 해야 할 이유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더 많은 우리네 삶이므로, 신중론은 복지부동의 빌미만 될 뿐이다.

그런 식의 해석이 아니라 정당하게, 면밀하게 독해되어야 한다. 어떤 미래든 지금 이 순간의 행동으로 성취할 수 있으며 작은 행동 하나에 그 가능성이 달려 있다고 말이다. 결국 가장 일상적인 일 속에 그 사람의 역량이, 그 사람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단순한 발걸음, 하지만 그건 그 사람의 존재가 움직인 강밀도이다. 그 한 걸음, 그 한 걸음 속에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들어 있는 셈이다. 그렇기에 소홀히 할 수 있는, 대충하기 쉬운 그런 일조차 함부로 해선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발걸음은 가볍고 경직하고 경쾌하되 온 주체가 담겨 여운이 남도록.

 

 

 

눌러 붙되, 떠날 수 있게

 

흔적을 남기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머물렀던 자리에 자신이 있었음을 만방에 알리는 것이다. 그건 미련의 증표이거나 게으름, 존재의 허약이기도 하다. 발전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머무는 순간엔 최대한 눌러 붙되, 떠날 때엔 흔적을 남겨선 안 된다. 흔적이야말로 변화를 거부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빈집이란 영화는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준다. 비었기에 누구든 머물 수 있다. 하지만 떠날 땐 온갖 인과의 관념이 덕지덕지 붙어 공간을 제약하는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애쓴다. 그래야 공간도 순환하며 나 자신도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변화(물건고침, 빨래)는 일으킬지언정 나쁜 변화(망가뜨림, 더럽힘)는 일으키지도 남기지도 말아야 한다. 그럴 때에야 변화의 바람이 자연스럽게 파고를 타고 흘러다니게 되는 것이다.

 

 

 

흔적에 대한 단상

 

이와 같은 생각은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사람들, 머문 자리가 표나는 사람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에 했던 것이다. 흔적은 남겨둠이고 그건 곧 자신의 존재감을 사람들에게 표시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자신의 표현양식은 그대로 자신을 얽어매는 족쇄가 될 것이다. 삶을 삶답게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와 같은 남기고자 하는 마음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자유는 머물지 않으려는 고집에서 나오며 그 작은 변화가 결국 존재의 크기를 키우는 데까지 이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