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방랑자
2015년 전셋집 이사하기 - 3. 특별했던 이사, 액땜했던 이사 본문
3. 특별했던 이사, 액땜했던 이사
전셋집도 구했고, 버팀목 전세대출도 확정되었다. 이사를 가기 위한 중요한 과정은 모두 끝난 것이다.
이사하기 1 - 늘어난 세간을 위한 자구책
고시원에서 옮길 땐 짐이 별로 없었지만, 지금은 짐이 제법 많아졌다. 나의 모토는 ‘도보여행을 하던 순간을 떠올리며 최대한 짐을 줄이자’는 것이었지만, 막상 살림을 하며 살다보니 조금씩 짐이 불어났다. 주방기구들 뿐만 아니라, 책들도 꽤 늘어나 혼자선 결코 옮길 수 없는 지경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처음엔 이삿날 선배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단 둘이 이사하기엔 너무 짐이 많다는 게 걸렸다. 그래서 자구책을 만들어야 했다. 계약서를 작성하던 날에 집주인 아저씨에게 “이사하기 전에 한 번 짐을 날랐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라고 넌지시 물어보니, 아저씨도 별 고민 없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러자 부동산 아주머니도 “짐 옮길 때 연락을 주면, 저희가 문 열어 드리고, 짐을 모두 옮긴 후엔 잠글게요”라고 정리해주시더라. 그 때까지만 해도 이사하기 일주일 전에 나 혼자 짐을 날라야겠다고 생각했다.
▲ 살다 보니 짐이 많이 늘었다.
이사하기 2 - 톰소여의 페인트칠과 단재영화팀의 이삿짐 나르기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단재학교 영화팀 아이들에게 부탁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단재학교에서 4년을 근무하며 민석이와는 4년을, 현세와는 3년을, 지훈이와는 1년(그 중 1주일은 함께 생활했음)을 함께 하며 어떤 끈끈함 같은 게 생겼기 때문이다. 영화팀 특성 상 장기간 여행(도보여행, 자전거 여행, 지리산 여행)을 자주 떠나는데, 그 때문인지 편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한 번 운은 떼어보기로 작정했다.
강요나, 어떤 강압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최대한 정중한 자세로,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게 “이번 주 수요일에 이삿짐을 미리 한바탕 나를 건데, 도와줄 수 있냐?”고 물으니, 민석이는 건호 말투로 너스레를 떨며 예의하던 제스처대로 집게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그래 어디 한 번 날라줄게~”라고 말했다. 지훈인 “그 날 저 피부과에 가야 해요”라며 없던 약속을 급조하여 말하더라.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기 때문에, 그런 경우 ‘하겠다’는 의사표현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현세는 대범하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행님!”이라 말하더라. 영화팀 아이들 모두 공동의 놀이거리가 생긴 마냥 흔쾌히 승낙했고, ‘그게 뭐 대수냐?’는 식으로 편하게 받아들여줬다(영화팀 소개글 보기).
▲ 친구처럼 편해진 단재영화팀. 승빈이도 영화팀의 대선배로 어디든 함께 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경험하니 ‘톰소여의 페인트칠’이 생각났다. 벌칙으로 받은 페인트칠이 하기 싫었던 톰소여는 ‘대가’를 운운하며 떠넘기려 하지만, 그럴수록 ‘이 일은 고생스러운 일, 귀찮은 일’이란 인상만 더 커져 기피하게 될 뿐이었다. 그렇게 실패의 고배를 마신 톰소여는 결국 전혀 새로운 방법을 고안한다. 바로 페인트칠하는 게 ‘가장 재밌는 활동, 뜻 깊은 활동’이라는 인상이 생기도록 한 것이다. 아래의 대화 내용을 보면 이런 변화가 잘 나타나 있다. 톰소여가 재밌게 페인트칠을 하며, 아이들이 부르는 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페인트칠에 열중하자, 친구들이 호기심에 몰려온다.
친구: “톰, 나도 잠깐만 해볼게.”
톰: “안 돼. 이 울타리는 우리 이모가 무척 신경을 쓰시거든 이걸 멋지게 칠할 사람은 1000명이나 2000명 중에 한 사람 밖에 없을 거라고 이모가 그러셨어.”
친구: “정말? 그럼 한번만 해볼게. 부탁이야 이 사과 한 입 줄게.”
톰: “그래? 음...아니, 역시 안 되겠어.”
친구: “통째로 다 줄게.”
솔직히 내 입장에서 보면 톰의 행동은 ‘잔꾀’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고생스러운 일’이란 관념은 그대로인데, 잔꾀를 부려 속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아예 ‘페인트칠은 재밌는 일’이라고 톰의 생각자체가 바뀌어 진정성 있는 대화를 했다면, 이 장면은 진정한 명장면이 되지 않았을까?
이삿짐 나르는 것을 이야기하다가 톰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톰의 입장이 아닌, 친구들의 입장이 단재영화팀 입장과 같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친구들에게 페인트칠은 ‘재밌는 일’이었던 것처럼, 단재영화팀에게 이삿짐 나르는 게 ‘함께 즐길만한 놀이거리’였으니 말이다. 물론 힘이 드는 일이긴 하지만, 함께 하면 신나는 일이 되고 함께 끝마쳤을 때 느껴지는 기쁨은 배가 된다.
▲ 톰은 잔꾀를 부린 것이고, 이게 창의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친구들에겐 좋은 영향을 끼쳤다.
이사하기 3 - 생각지도 못한 장애물을 만나다
짐을 함께 나를 사람들도 모였겠다, 이젠 부동산에 전화하여 문만 열어달라고 하면 되었다. 그래서 부동산에 전화하여 알렸다. 뭐 저번에 집주인 아저씨가 이미 OK!를 외친 사안이라 별 다른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부동산에서 다시 전화가 걸려오더라. 내용인 즉은, ‘아저씨는 OK!했지만, 아줌마가 NO!라고 외쳤다는 것’, ‘만약 짐을 들여놨는데 일이 틀어질 경우, 어떻게 책임질 거냐? 그럴 경우 부동산에서 책임지라는 것’, ‘그래서 뭔가 확실히 해야만 짐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이 내용의 전부였다.
이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아저씨보다 아줌마가 더 파워가 세다는 것이고, 아줌마는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걱정이 많다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이삿날이 아니고서야 미리 짐을 옮기는 건 안 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승낙을 받았고 짐을 미리 옮겨 놓는다고 해서 서로 손해될 일은 없는데도, 그렇게 극구 반대를 하니 황당하긴 했다.
짐을 옮긴다는 건 ‘이사할 의지가 분명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짐을 옮겼는데, 만약 잔금을 치르지 못해 이사가 지연될 경우 그에 대한 손해는 나만 보게 되어 있다. 왜냐 하면, 짐이 모두 방 안에 있기에, 그걸 사용하지 못하는 나만 갑갑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덧붙여 선배는 아예 “그래도 이미 (적지 않은) 계약금을 걸고 계약을 한 것이기에 10%의 권리는 충분히 있는데, 너무 야박한 거 아니냐?”고 딱 잘라 말했다. 그 말이 이번 사태를 명확하게 정리해주는 말이라 생각한다.
어찌 되었든 부동산에 충분히 계약이 파기될 일은 없다는 점을 어필하였고, 부동산에서 잘 얘기하여 짐을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이사하기 4 - 단재영화팀과 이삿짐 나르기
민석이, 지훈이, 현세에겐 이삿짐을 나르자고 말해 놓은 상황이었지만, 승빈이에겐 말하지 않았다. 고3이 되기에 어떤 부담이 될 수 있을까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학교를 나올 때, 민석이가 승빈이에게 말하기 시작하더라. ‘이삿짐을 나르면 통닭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말로 꾄 것이다. 승빈이도 그 날만큼은 바쁘지 않은지 함께 따라 나섰다.
▲ 학교가 끝나고 쉬고 싶고 물고기방에 가고 싶은데도, 친히 행차하신 의리남들. 오자마자 찬장을 뒤져 부식을 먹어치운다.
미리 짐을 싸뒀기에 아이들과 나르기만 하면 됐다. 5시 40분쯤 강동구청역에 도착하여 잠시 숨을 돌린 다음(아이들은 미친 듯이 오예스를 먹어댔다ㅡㅡ;;)에 본격적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월셋집에서 전셋집까지는 5분 거리이고 중간에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그게 나름 시간을 잡아먹는 요소이긴 했다. 처음에 민석이와 현세가 길을 헤매는 바람에 잠시 시간이 지연됐지만, 그 다음부턴 술술 나를 수 있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저녁 밤거리를 4명의 장정이 짐 하나씩을 들고 몇 번이고 왔다갔다하는 광경을 멀찍이 보고 있으니 절로 웃음이 났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광경이니 말이다. 아이들도 자진해서 온 것이기에 불퉁대지 않고 잘 나르더라. 5번을 옮기니 싸놓은 짐들은 모두 나를 수 있었다. 거의 7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 여러 번 왔다갔다 했지만, 나를 만 했다. 왠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기쁨이 몰려오던 순간.
아이들과 짐을 나르고 있으니, 여러모로 감회가 새롭다. 이 원룸에서 산 4년이란 시간은 단재학교에서 이 아이들과 지지고 볶으며 우정을 쌓아온 시간이기도 했다. 그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지금은 이렇게 짐도 함께 옮길 수 있게 되었으니, 4년은 알짜배기 시간이었다.
원래는 통닭이나 족발, 또는 중화요리를 시켜서 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민석이가 직접 매장에 가서 먹자고 하여 근처에 있는 통닭집으로 찾아갔다. 처음엔 4마리 정도 시키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우선 먹어보고 부족하면 시키자고 하여 3마리만 시키게 되었다. 음식이 부족할 땐 ‘누가 하나라도 더 먹나?’, ‘누가 닭다리만 먹나?’ 눈에 쌍심지를 켜고 경계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음식이 넉넉하니 승빈이가 “나 닭다리 하나 더 먹어도 돼?”라고 묻자, 누구 할 것 없이 “여기선 눈치 보지 말고 맘껏 먹어”라고 말할 정도로 화기애애했다. 기분 좋은 만찬이다.
▲ 일을 마친 뿌듯함으로 행복하게 저녁을 먹는 시간. 많이 먹는다고 싸우지 않아도 되니 절로 화기애애해진다.
이사하기 5 - 이삿날 액땜한 사연
12월 12일은 대망의 이삿날이다. 아침 9시 30분에 가스 검침하러 온다고 했기에 그 시간부터 본격적으로 이사를 할 작정이었다. 검침을 하여 가스비를 냈고, 전기계량기 숫자를 한전에 알려주어 나머지 전기세를 결제했다. 이로써 남아있던 공과금은 모두 처리했다.
수요일에 대부분의 짐을 날랐음에도 무거운 짐들이 꽤 있어서 자전거를 이용하여 날랐다. 모니터 같은 무거운 짐은 자전거 짐받이에 싣고, 자잘한 것들은 배낭을 이용해 날랐다. 짐을 모두 나르고 나니 12시더라.
전셋집은 전에 쓰던 사람이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고 함부로 살았으며, 그 사람이 이사 간 후 15일 정도 방치되어 있다 보니, 먼지가 한 가득 쌓여 있었다. 내 짐들은 먼지 더미 위에 올려놓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 먼지 더미에 올려놓은 짐. 이거 언제 다 정리하지?? 막막함에 한숨만 절로 난다.
짐은 옮겼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하나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면적이 좁은 주방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12시에 시작해서 주방 정리를 끝내고 나니 2시 3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방은 치울 것도 많은데, 서서히 마음이 급해지더라. 이날은 광진청소년수련관에서 영화팀이 만든 영화 2편의 상영회가 4시에 시작하기에, 나도 3시 20분엔 나가야 했다. 1시간 정도 시간이 있기에 짐을 정리하는 것까진 무리고, 방의 먼지만 제거하기로 했다. 그래서 슈퍼에 가서 물티슈를 사고 문을 열려고 번호를 누르는데, 경보음만 울리지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이다. 오전에 비밀번호를 변경한 것이 무언가 잘못되었나 보더라. 그래서 밖에서 30분 동안을 그렇게 낑낑거리며 여러 경우의 수를 모두 동원해서 눌러봤음에도 도어락은 크게 울어댈 뿐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열쇠집에 전화하여 해결해야 했다. 이런 경우 번호키를 부수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 보통은 30분 정도면 열린다던데, 이중잠금이 걸려 있다며 1시간이 넘도록 고군분투하시더라. 드디어 도어락은 완전 파괴되었고 문이 열렸다. 어둠 속에 한줄기 빛이 보이듯, 문이 열리니 한 줄기 빛이라도 찾은 양 엄청 행복했다. 이삿날 액땜 제대로 했다. 시간은 이미 5시가 넘었기에 영화팀 아이들에겐 가지 못해 미안하다고 전화로 알렸다.
▲ 일요일 하루 종일 쓸고 닦고 정리하여, 드디어 정리가 모두 끝났다. 이제 진짜 사람 사는 집 같다.
이사하기 6 -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생각으로
이번 이사는 여러모로 스펙터클했다. 단재 영화팀의 저력과 우정을 맛보기도 했고, 이삿날 문이 잠겨 오들오들 떨기도 했으니 말이다.
단재학교가 이전했을 때에도 썼다시피, 공간을 옮기는 건 단순히 생각하면 ‘계약이 만료됨에 따라 옮긴 것’이기도 하지만,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면 ‘장소가 바뀌면 생각도 바뀐다’가 될 수도 있다. 월셋집에서 보낸 4년은 어느 시간과도 비할 수 없이 하나하나 만들어가던 시기였다. 거기서 조금 더 나를 다듬을 수 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갈무리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월셋집에서의 4년처럼 이곳에서도 그런 시간들을 보낼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 집보다 훨씬 좋은 여건의 집인 만큼 이곳에서 건빵의 새로운 역사는 시작된다.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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