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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방랑자

2015년 전셋집 이사하기 - 1. 집 없는 설움에서 집 있는 기쁨으로 본문

건빵/이사이사

2015년 전셋집 이사하기 - 1. 집 없는 설움에서 집 있는 기쁨으로

gunbbang 2016. 1. 1. 16:34

 

 

1. 집 없는 설움에서 집 있는 기쁨으로

 

 

20151212일은 두 번째 이사를 한 날이다. 집을 산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조금씩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는 데에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감회를 말하려면 2011년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집 없는 설움

 

그 땐 취업 준비가 한창이었다. 임용을 준비하다 그만 둔 놈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바닥부터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정면돌파하던 그 때, 출판사 편집자란 직업에 끌려 그걸 준비했다. 그러려면 글쓰기부터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수유+너머에서 진행하는 이만교 교수의 글쓰기 특강을 들으러 서울로 왔다. 4일간(토요일과 일요일에 하며 2주간) 진행되기에 잠자리를 구해야 했는데, 그다지 걱정하진 않았다. 서울에 이미 정착한 경일 선배와 세훈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이 안 되려 할 땐 수많은 가능성이 있다 할지라도 좌절되게 마련이다. 다들 일이 있다며 이번엔 힘들다고 하는 통에, 그냥 현장에서 부딪혀 보기로 하고 강의에 참석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부딪힐 생각을 했던 이유는 수유+너머란 곳이 집의 독점적 소유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지닌 곳(고미숙 저,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이란 인식이 있었고, 2009년 당시의 도보여행 때 신세를 져본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수업이 끝나고 뒷풀이 자리에 참석하여 말할 기회를 엿보았다. 다들 사는 이야기, 공통의 관심사는 있되 친하지 않기에 겉도는 이야기만 하느라 바빴다. 한참 얘기하다가 조금 말이 적어지려는 낌새가 보여 기어코 재워줄 수 있는 분이 있나요?”라고 외치고 말았다. 그 말은 상식을 뛰어넘는 말이고, 이 자리에 적합하지 않은 말이기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과연 어떤 반응이 있었을까? 잠시의 침묵 끝에 한 사람이 아직도 그런 마인드를 가지고 계신 분이 있네요.”라며 정식적인 답변을 해주기보다 비아냥에 가까운 말을 했으며, 심지어 이만교쌤은 전주라잖아라는 말로 쐐기를 박았다. 그렇지 않아도 도시문화, 시골문화의 이분법적인 생각으로 시골문화를 까고 있던 상황이라 나의 태도는 졸지에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 한 시대착오적인 발언정도로 밖에 취급되지 않았다. 그런 반응을 대하고나니 얼굴이 후끈거렸고,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이 서울역 근처의 찜질방에 가서 자야 했다(그 당시의 기록보기).

그 때 느낀 것은 집 없는 설움이었다. 도보여행 당시에 그런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감당하려 자초한 것이기에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그래도 무언가 남다른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라 통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했던 터라, 실망이 컸다.

 

 

2011년 '수유+너머'의 경험은 이래저래 충격이었다. 글쓰기에 대한 충격과 함께 집에 대한 충격까지 말이다.

 

 

 

 

집 있는 기쁨

 

이처럼 서울은 집 없는 설움을 온 몸 가득 느끼게 만든 곳이었다. 그 후 운 좋게 역곡단재학교에 취직하게 되면서 서울로 다시 올라가게 되었다. 103일 그 날에 난 처음으로 전주가 아닌 타지에 나의 둥지를 튼 날이다.

고시원이란 곳에서 처음으로 생활하게 되었는데 이곳은 나름 프리미엄을 표방하는 곳이었다. 그 당시 고시원은 돈은 없지만, 집이 필요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란 인식이 강했고, 화재가 나서 죽은 사람들도 있기에 열악한 환경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런데 내가 살게 된 고시원은 그렇게 열악한 환경만은 아니었다. 한 명이 몸을 누일 공간만 있어 비좁은 편이긴 한데, 작은 창문이 있어서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었고, 샤워시설과 인터넷 시설이 완비되어 있어 나름의 사람다운 생활을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난 그런 것보다 드디어 타지에도 내 집이 생겼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미 7월에 그런 설움을 느꼈던 터라, 겨우 3개월이 지나 서울에 몸 뉘일 곳이 생겼다는 사실이 그렇게 좋았다.

그렇게 단재학교에 적응해 가고, 서울 생활에 익숙해져 가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내 직업은 아직도 불투명했다. 원랜 역곡에 새로운 단재학교를 만들기로 하면서 거기 교사로 채용된 것인데, 생각만큼 학생 모집이 쉽지 않아 역곡단재는 출범도 하기 전에 좌초되었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다시 짐을 싸들고 내려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준규쌤은 나를 좋게 봐줘서 단재학교에 정식으로 채용될 수 있었다. 채용이 되었다는 건, 신분이 보장되었다는 것과 함께 안정적인 수입원이 생겼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고시원을 옮겨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한 달 보름 정도를 살았던 곳이다. 처음으로 타지에 몸 뉘일 곳이 있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행복했다.

 

 

 

월세 원룸, 내 집 마련의 기쁨

 

30년간 어머니와 함께 살며 집에 대한 걱정이 없었으며, 서울로 막상 올라왔을 때도 욱쌤의 도움으로 순식간에 고시원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나의 힘으로 내가 살 집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은 기뻤지만,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한다는 점은 두려웠다.

1122일에 정식으로 채용된 후 집을 알아봐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번거롭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서인지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 1210일에 선배와 함께 부동산을 찾았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가진 돈은 하나도 없었다. 돈 한 푼 없이 서울에 올라왔고, 모을 여유조차도 없었다. 그래서 보증금이 최대한 싼 집을 알아보니, 강동구청역 근처에 바로 있더라. 그래서 그 집을 둘러보니, 3층이라는 점, 그리고 강동구청역과 가깝다는 점, 혼자 살기에 무난하다는 점이 맘에 들어 바로 계약하게 되었다. 500만원이란 보증금은 형에게 빌렸다.

걱정은 되었지만 일이 일사천리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드디어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고시원은 안정된 공간이라는 느낌보다 언제든 나갈 수 있는 공간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러니 당연히 세간을 최대한 늘리지 않으려 한다. 고시원에 있던 내 물건이라 봐야 노트북 하나, 옷가지 몇 벌, 책 몇 권이 전부였을 정도였다. 그러니 1216일에 이사할 때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준규쌤이 차까지 빌려주어 한 번에 나르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원룸은 안정된 나의 공간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니 서서히 세간이 늘어가고 나의 흔적이 스민 공간으로 탈바꿈해간 것이다.

사람과 공간은 동떨어져 있지 않다. 그 공간에 사람이 살면, 어떤 식으로든 그 공간은 그 사람의 자취가 스미고 생각이 투영된 공간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공간이라도 어떤 사람이 사느냐에 따라 그 공간의 분위기, 배치, 환경 그 모든 게 달라진다. 이렇기에 누군가는 부엌을 인간의 확장된 외부기억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부엌의 온갖 배치는 나만이 알기 쉽게 되어 있다. 그러니 나는 부엌에서 음식을 할 때 전혀 힘들이지 않고 내가 찾고자 하는 물건을 찾아 요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 집에 가면 모든 활동은 제약받을 수밖에 없다.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뿐더러, 요리를 하기 위한 동선마저 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의 공간이란 어찌 보면 확장된 외부기억이라 할 수 있다.

 

 

올해 4월 4일에 찍은 사진. 4년 간의 자취가 고스란히 담긴 공간이다. 이곳에서의 4년은 행복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