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방랑자
수업이 이루어지는 조건 - 1. 교육에 시장원리가 도입되면 생기는 일 본문
1. 교육에 시장원리가 도입되면 생기는 일
금방까지 『수행론(수업론)』의 한국판 저자 서문을 쓰고 있었다. 그 책의 주요한 독자로 ‘교사’를 염두에 두며 서문을 썼기 때문에, 여기서도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까 한다.
▲ 우치다쌤이 쓴 수업론은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이 글에서 말하는 바를 한 마디로 잘 풀어낸 제목이다.
미지의 세계를 안으려는 사람만이 배울 수 있다
요즘 일본에선 ‘수행’이 시대에 어긋난, 반시대적인 행위라는 인상이 짙다. 수행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불교의 수행자로 들어가는 것이고, 둘째는 가부키를 배우러 제자로 입문하는 것이며, 셋째는 무도인이 되기 위해 합기도관에 들어가는 것이다. 수행을 위해 첫 발을 내딛는 사람들은 ‘수업하기 위해’ 들어가지만 막상 무엇을 배우는지, 그 선생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눈다면, 수업이 가능한 사람과 가능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부터 선생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어떤 기술을 가졌는지, 어떤 것을 배울 수 있는지 이미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수업은 불가능하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딱 그만큼만 배우려 하지, 그 이상을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 우치다쌤이 만든 개풍관은 알기에 배우는 것이 아닌, 모르기에 배울 수 있는 곳이다. 배움을 위한 배움의 장소인 셈이다.
그에 반해 선생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궁금해지면 그 선생을 찾아가 ‘저는 아는 게 없으니, 어떻게든 알게 해주십시오(배우는 사람의 자세에 대해 “저는 모르는 것,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가르쳐 주세요”, “잘 부탁하겠습니다”라는 세 마디 말로 표현하기도 했음)’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수업이 가능하다. 물론 불확실한 상황에 몸을 맡기는 거라 실패할 확률은 높다. 하지만 불확실하다는 건 지금 나의 도량형으로는 도무지 잴 수도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미지의 세계에 투신할 수 있고, 받아들이려 노력할 수 있는 마음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인의 배움에 대한 자세는 1995년을 기점으로 바뀌었다. 1995년에 옴진리교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의 주요인물 중엔 무수히 많은 일류대 출신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을 겪고 나니 사람들은 자연히 ‘모르는 사람을 경계해라’, ‘모르는 상황에 놓이면 도망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때 이후로 더 이상 수업이 불가능한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 일본에선 옴진리교 테러로, 한국에선 IMF의 여파로 배움의 판도가 확 바뀌었다.
지금 시대가 배움을 등한시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그래서 이제 배울 수 있는 곳은 학교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학교라 할지라도 위에서 얘기한 ‘배우려는 자세’가 없으면, 배울 수 없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아이들이 왜 배워야 하는지 알 수도 없고, 지금 만나는 교사가 어떤 지식과 미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도 없지만, 그런 알 수도 없는 상황을 끌어안으려 할 때 배울 수 있다. 그럴 때에만 지성과 감성이 성장할 수 있으니 말이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있다고 해보자. 그 아이는 당연히 지금껏 8년 동안 살아온 삶을 토대로 ‘이건 삶에 유용하니 배워두고, 저건 아무 짝에 쓸모도 없고 힘들기만 하니 배우지 말아야겠다’고 요구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배움은 온전히 기동한다고 볼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이유는 ‘아이가 미성숙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류지향』과 『교사를 춤추게 하라』라는 책에서도 말했다시피, ‘아이들이 소비자 마인드를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 어른조차 교육은 쇼핑의 영역으로 보고 있다. 그게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이어진다.
합리적인 소비활동을 학교에서도 하려 한다
소비자 마인드란 ‘상품 거래를 할 때의 심리’를 뜻한다. 그래서 아이 자신은 화폐를 지불한 ‘소비자의 입장’에 서고, 교사는 교육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생산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그렇다면 아이는 과연 어떤 화폐를 지불하는 걸까? 그들은 학습노력(공부, 선생에 대한 존경, 학교 규칙 준수, 친구들의 학습방해금지)이라는 화폐를 지불하며 그에 동등한 교육서비스를 요구한다.
그런데 학교에 시장원리가 도입되면 학교는 파괴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최저의 학습노력으로 최대의 성과를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언뜻 생각하면 바보짓(‘학교 다닐 땐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성적을 받는 게 학생의 의무’라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같지만, 아이들은 오히려 현명한 행동이라 생각한다. 마트에서 물건을 구매할 때를 생각해 보면 아이들의 행동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품진열대에는 같은 상품임에도 다양한 제조사에서 만든 물건들이 비치되어 있다. 그 때 우린 용량과 가격을 따져가며 싼 가격으로 최고의 상품을 구입하는 것을 ‘합리적인 소비활동’이라 생각한다. 이처럼 아이들은 ‘합리적인 소비활동’을 마트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 이젠 교육을 당연히 고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에 따라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그게 어떤 결과를 낳을까?
내가 대학교수였을 때 오리엔테이션을 하면 꼭 “선생님, 이 과목은 몇 점을 받아야 패스가 가능한가요?”, “이 과목은 몇 번 이상 결석하면 F학점을 받나요?”라는 질문이 나온다. 그 때 “60점 이상 받아야 패스할 수 있습니다”, “1/3까지는 결석해도 불이익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해주는데, 그걸 아이들은 꼼꼼히 메모한다. 아이들은 패스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1/3은 결석하고 60점을 가까스로 받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다. 현실이 이렇기에 1/3을 정확히 빠지기 위해 액셀로 출결사항을 체크하거나 60점 이상을 받으면 ‘바보’라고 놀리기도 하는 것이다. 이건 아이가 소비자 마인드를 가지고서 학교생활을 할 때 당연히 벌어지는 일들이다. 이런 상황이니 ‘수업’ 또한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 일본은 통과만 가능하다면 최소한으로 하려 한다면, 한국은 취업만 된다면 뭐든 하려는 수준이다.
대학평가가 오히려 대학을 병들게 하다
이것은 대학평가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지금의 문부과학성은 각 대학에 16살짜리 학생이면 다 알 수 있는 것들을 가르치라고 독촉한다. 어느 대학이건 강의계획서가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어서, 아이들이 강의계획서를 보면 ‘이 과목을 배우면 최종적으로 무엇을 얻게 되는지’를 한 번에 파악할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대학교수가 연구를 신청할 때에도 몇 개월 후엔 무엇이 연구되고 3년 후엔 무엇이 이루어질 것인지를 명확하게 제시해야만 연구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 나 또한 2006년에 6년의 중장기 계획을 세워, 무엇을 할 것이며, 어떤 성과가 나올 것인지 일목요연하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생각해보면 6년 뒤에 무엇이 이루어질지 모르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 연구비를 받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뻔한 성과가 나오는 사업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식으로 가시적인 성과만 낼 수 있는 사업에만 연구가 몰리다 보니, 오히려 연구다운 연구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 15년 2월 1일에 개풍관에서 들은 강연이다. 함께 하진 못했지만, 사진만으로도 그 때의 뜨거움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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