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방랑자
수업이 이루어지는 조건 - 2. 자신을 개방하는 자만이 배울 수 있다 본문
2. 자신을 개방하는 자만이 배울 수 있다
공교육이 무너졌다며, ‘시장원리를 교육에 도입하여 되살리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초중등교육은 배움의 가치를 잃어갔고, 고등교육은 ‘진리의 전당’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연구는 사라져 학위공장이 되고 말았다. 시장원리란 애초에 가시적인 성과만을 중시하는 것으로 교육이나 연구와는 달리 반대성향을 지니고 있기에,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공교육정상화 방안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부가 관심을 가지면 가질 수록 교육은 왜곡되고 있다.
소비자 마인드, 연구를 망치다
연구란 직관과 매우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지만, 이런 식으로 연구하면 무언가 발견할 것 같은 직감으로 시작된다. 도무지 말로는 할 수 없지만 무언가가 잡아끄는 느낌을 강하게 받아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듯 해나가는 것이다. 그럴 때 혁신적인 연구가 가능해진다.
인간에겐 이처럼 시간을 넘나들며 공간을 뛰어넘어, 아직 그 끝에 닿진 않았지만 그곳에 가면 뭔가 좋은 것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런 능력을 믿고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거기로 가면 좋은 게 있다는 직감으로 연구해왔기에 학문은 발전해온 것이다. 연구의 원래 성격이 이런데도 지금 당장 가시적인 성과물로, 현재의 언어로 구체화시키지 못했다고 가치 없는 것이라 말하는 건 큰 문제일 수밖에 없다.
▲ 직관으론 좋은 게 느껴지지만 그걸 미처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 그 속에 배움이 있고 연구가 있다.
플라톤Plato(B.C. 428 ~ B.C.348)의 『메논Μένων』에 ‘인간은 해결방법을 아는 것을 문제로 생각하지 않으며, 전혀 풀 수 없는 문제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쓰여 있다. 이 말처럼 인간은 이걸 어떻게 푸는지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결국엔 풀릴 것이라 생각되는 것이나, 충분히 시간만 확보되면 결국 해결될 것이라 생각되는 것만을 문제로 여긴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일본은 문제를 깊이 파고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전체를 조감할 수 있는 연구자보다 세세한 항목을 빈틈없이 맞출 수 있는 연구자를 필요로 한다. 그게 10년 동안 진행되어온 학술행태라고 할 수 있다. 연구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끄집어 낼 수 있어야만 연구로 인정된다고 하는 것은 ‘소비자 마인드’의 확장이며, 그런 상품에만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하는 것은 ‘시장원리’의 단면이며, 그걸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곳이 바로 문부성인 셈이다.
그렇다면 문부성이 아닌 다른 곳에서 지원하는 연구는 좀 나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민간기업이 지불한 돈도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는 곳에 쓰일 뿐, 결과가 예측되지 않는 곳엔 전혀 쓰이지 않는다. 이런 현실이니 직감으로 시작되는 혁신적인 연구는 지원조차 받지 못하게 됐으며,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 연암은 북학파 학자로 직관에 따라 청을 배우려 했다. 그때도 청을 쳐야 한다는 북벌론이 있었으니, 지금의 학문풍토와 얼핏 비슷하다.
배우는 자의 기본 전제, 소비자마인드 벗어버리기
이처럼 배움이든 연구든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 주위의 사람이 어떤 사람이며 무얼 가르쳐줄 수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그건 어쩔 수 없지만 철저히 따져보고 선택하려는 ‘소비자마인드’에서 탈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와 같은 소비자마인드에서 벗어나는 건 기본 전제일 뿐이지, 그것 자체가 배움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턴 배움을 가능하게 하는 다섯 가지 조건에 대해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 자본주의 사회는 소비자마인드를 내면화시킨다. 그게 교육의 영역까지 파고들어, 작동한다.
배움이란 나의 인식의 틀이 완전히 뒤바뀌는 것
만약 6살 아이가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어떤 가치관을 지니고 있을까? 그건 아마도 권력의 유무, 돈의 많고 적음, 사람들에게 자신이 인기가 있는지 없는지와 같은 가치관일 것이다. 이런 식의 빈곤한 잣대로 “선생님 제가 이걸 배우면 권력을 가질 수 있나요?”, “제가 돈을 많이 벌 수 있나요?”, “인기가 많아질까요?”라는 질문을 던지며, 배울 만한지, 아닌지를 판단하려 하게 마련이다.
그 때 교사는 “이걸 배우면 권력을 가지게 될 거야”, “돈을 잘 벌게 될 거야”, “인기가 많아질 거야”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건 교사의 가치관이 6살 아이의 가치관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고 선언하는 꼴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때 교사는 “지금까지 네가 지녔던 잣대로는 도저히 잴 수 없는 것들이 있고, 좀 더 다양한 것들이 있다는 것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라는 이야기를 해줘야 한다.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라고 말할 때, 그 말은 당연히 교사 자신의 확신 속에서 나와야만 한다. ‘네가 가진 논리, 잣대, 기준으론 지금 당장 알 수 없지만, 배우는 과정을 통해 네 자신의 생각이 변화될 것’이라는 확신 말이다. 그 변화는 단순히 지식과 정보, 그리고 기술이 양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과는 다르다. 배우는 주체가 번데기에서 나비로 변태를 하듯, 생각의 틀이 완전히 뒤바뀌는 것이기 때문이다. 배움의 메커니즘이란 원래 그렇다.
▲ 태를 달리한다는 건, 모습만 바뀌는 게 아니라 생각 자체가 변한다는 것이다. 배움이란 그런 것이다.
상처가 많은 아이일수록 배우기를 싫어한다
아이들은 상처 받기 싫어하기에 방어적이며 보수적이다. 하지만 배운다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돌돌 말아놨던 외피를 벗어던지는 것이다. 그러니 배우겠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맨몸이 그대로 드러나 상처받기 쉬운 상태가 되어버린다. 처음으로 아이가 자그마한 틀을 벗고 넘어서려 할 때 상처를 받는다면, 아이는 다음부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는 아이가 외투를 벗어 살이 보일 때 상처받지 않도록, 배움에 대한 좋은 인상이 남도록 도와줘야 한다.
▲ 외투는 [에반게리온]에선 AT필드로 표현됐다. 자신을 보호하는 것과 동시에, 소통도 차단한다.
몰론 스스로 성장을 위해 틀을 벗으려 애쓰는 아이는 오히려 괜찮을 수 있지만, 완고하게 틀을 유지하려 고집하는 아이에겐 신중하게 다가갈 수밖에 없다. 너무 오랫동안 틀 안에 있었기 때문에 밖으로 나올 때는 한을 잔뜩 품고 나오기 때문이다. 부모에 대한 한, 환경에 대한 저주, 틀에 가둬두려 한 학교에 대한 원망 같은 것이 착종되어 있다. 틀 안에 오랫동안 있었던 아이가 그러한 한을 품고 있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기에, 교사는 그 독을 걸러내야 한다.
아무리 아이가 15살, 16살이라 해도 오랫동안 갇혀 있으며 품어왔던 독은 보통이 아니다. 그럴 때 교사는 아이의 한을 감당하려 할 것이 아니라(그러면 교사가 너무 힘들다), 등을 두드려 주며 “이젠 좀 괜찮니? 기분 좀 풀 겸 물이라도 마시렴”이라고 말할 수 있으면 된다. 아이가 자신을 개방하더라도 상처받지 않는 선까지만 아이를 다독이며 도와주려 하면 된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아이가 지닌 도량형이나 가치관만을 내세우며 공부하려는 모습은 자신이 지금껏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아왔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오감을 닫고 소통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 상처를 많이 받은 아이일수록 마음을 닫고, 자신의 고집만 부리게 된다. 배움과 완벽하게 멀어진다.
배움의 조건 1 - 자신을 드러내도 불이익 없는 공간
이 합기도장의 이름은 ‘개풍관凱風館’이다. 개풍이란 ‘남쪽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이란 뜻으로 『시경詩經』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어릴 때부터 상처를 받아 자기 방어적인 아이나 자기 가치관만을 고집하는 아이에게 “배워라!”라거나 “껍데기를 벗어라!”라고 아무리 얘길 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따뜻한 바람이 장미의 봉우리를 열게 하듯, 부드러운 바람을 불어서 스스로 열어젖히게 해야만 한다. 그런 아이에겐 수많은 말보다 ‘여긴 안전하다’, ‘자기 껍데기를 벗어도 아무런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는 정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기에, 이런 공간을 만들었다.
여긴 4살부터 70살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다니는데, 일반적으로 자기개방을 안 하는 사람들이 ‘60대 이상’과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은 몸의 잠재능력을 믿지 않고 자신의 신체능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알기에, 쉽게 포기하며 “할 수 없습니다”라 말하며 멋쩍게 웃고 만다. 자신의 몸으로는 할 수 없는 게 많다고 생각하니, 신체를 개방하기가 힘든 것이다.
▲ 다양한 연령층이 함께 하는 개풍관. 여긴 자신을 드러내도 되는 곳이다.
이럴 땐 상당한 인내심으로 ‘당신의 신체는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알려줘야 한다. 60살 할아버지에게도 등을 두드려 주며 “충분히 할 수 있어요. 괜찮아요~”라고 말하면 아이처럼 얼굴이 확 펴진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병원장, 대학 총장)에게 간단한 유머를 던지면 긴장이 확 풀어지면서 얼굴이 해맑아지는 게 느껴질 정도다.
이처럼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맘껏 자신의 외피를 벗어 버리고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고, 그런 공간에 있을 때 비로소 배우고자 하는 마음도 일어난다.
▲ 우치다쌤의 얘기가 드디어 본 궤도에 올랐다. 배움의 남은 네 가지 조건이 어떤 것인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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