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방랑자
조정래 - 아리랑은 왜 썼나? 본문
아리랑을 쓰게 된 작가의 말
(2000.4.19. 김제청소년 수련관 강연회 발췌)
아리랑을 쓰게 된 계기
『아리랑』을 쓰기 위해 김제를 처음 온 게 지금부터 11년쯤 됩니다. 그때 『태백산맥』을 써놓고 단 하루도 쉴새없이 바로 『아리랑』의 취재를 시작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아리랑』을 쓸려고 계획했던 것이 1980년 그러니까 『태백산맥』을 쓸 생각을 하면서 함께 작정을 했고 그때 이미 아리랑이라는 제목을 정해놨었습니다.
왜 그랬냐하면, ‘작가로서 이 땅에 태어났는데 나는 어떠한 작품을 가지고 내 작가 생애를 살아 갈 것이며, 이 시대에 태어난 작가로써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이 땅이라고 하는 의미는 우리 민족처럼 근대사 100년을 사는데 파란만장하고 핍박과 설움과 억압 속에서 산 민족이 없다. 그렇다면은 이런 땅에서 소설을 쓸려면 무엇을 쓸 것인가? 사나이로 태어나 할 일도 많다만 연애 이야기나 쓰다가 소설가의 생애를 마칠 것인가 ?
그럴 수는 없다. 최소한 이 민족이 어떻게 살았는가? 그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써서 내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읽히고 그리고 그 작품이 내 후대 사람들까지 전해진다면 그것보다 작가 중에 큰 임무는 없을 것이고 큰 영광도 없다. 그래서 핍박받고 억압받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산 우리민족의 삶은 고달플지 몰라도 그것을 역사 소재로 삼아야하는 작가에게는 대단히 행운이다. 나는 이 땅에 태어난 것을 행운으로 여기고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쓰자.’
그리 생각해서... “마흔의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것이냐”하는 시가 있습니다.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두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아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거냐
나두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두야 간다.
박용철 「떠나가는 배」
제 나이 마흔에 사나이의 전 생애를 걸고 싸우자 해서 시작한 작품이 『태백산맥』입니다. 그때 『태백산맥』 이전의 시대, 36년의 역사 그것도 소설로 써야만 『태백산맥』의 그것도 이해가 되고, 오늘의 우리 삶도 총체적으로, 전체적으로 이해가 될 것이다. 그래서 제목을 아리랑으로 정했습니다.
제목을 아리랑으로 지은 까닭
아리랑은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정선아리랑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것 다 그만두고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민족의 노래가 아리랑입니다. 36년의 식민지 역사 속에서 지금 우리가 부르는 동해물과 백두산보다는 아리랑이 훨씬 더 민족의 노래로써,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불렀던 노래가 아리랑입니다. 그래서 36년의 이야기를 쓸 때 아리랑이라는 제목은 아무런 이의 없이 한 순간에 아리랑으로 확정을, 확정을 지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쌀이 군량미로
1902년부터 일본놈들이 부산으로 상륙하고 그 부산으로 상륙한 놈들이 누구냐면 일본 군대의 우리말로 하면 소위나 중위 계급을 단 놈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일개 부대가 전부 사복을 입고 들어와 가지고 조선 사람을 앞세워서 돈을 엄청나게 뿌려 가면서 쌀을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부산에서 진주를 통해서 바로 김제땅으로 들어와서 쌀을 모았어요. 그때 당시의 쌀 한가마니가 3원 50전 정도 했습니다. 그때 4원, 4월50전을 주고 쌀을 샀어요. 그때 김제쌀을 전부 다 일본말로 도리를 모아 잡았어요. 그것을 군산앞 바다에서 배로 실었습니다. 뭐 하러 실었겠어요?
군산항, 수탈한 쌀이 가득 쌓여 있는 모습.
그게 바로 청일‧러일전쟁, 청일전쟁에 이긴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했어요. 그래서 발틱함대를 몰아쳐서 이겨버리고 그 힘으로 한국을 집어먹고 만주까지 갈 수 있는 힘을 길렀던 그 전쟁에 군량미로 쓰기 위해서 쌀을 샀습니다.
용산 미군 기지? NO!, 용산 일본 기지? YES!
그러고 나서 그 전쟁에서 이긴 다음에 그 군대가 일본으로 돌아가야 되는데 안 돌아갔죠. 바로 군산항에 정박을 시켜놓고 바로 한반도 땅으로 다 진입했습니다. 그 군대가 서울로 가서 용산에 자리를 잡고 식민지 통치를 하기 위한 기반을 잡았고, 그 용산 미군기지가 바로 지금 있는 것이 그때 일본놈들이 다 산 땅입니다.
그리고 나서 1904년부터 일본 상인들이, 거대한 돈을 가진 상인들이 이 김제 만경, 징게 맹게 외배미뜰에 들어와 가지고서 논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쪽 땅의 약 10%가 합병되기 전에 일본놈 손에 다 넘어가 버렸습니다.
1904년에 이미 실제적인 한일합방이 되었다
그때 일본놈 사회학자들이 글을 쓰기를 ‘조선땅에 가서 땅을 사라 그것은 만년 투자하는 이익이 된다.’ 그렇게 해서 권고하는 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당시 일본돈으로 10원하던 것이 일본의 땅값인데 여기 오니까 한마지기에 그저 4원, 3원, 갯논 같은 경우에는 2원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걸 50원씩을 더 주고 한국 사람을 앞세워 가지고 땅을 사기 시작한 게 합병 전에 이미 10%가 나가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합병이 될 때까지 몇 년동안인데 제 소설은 바로 그 1904년부터 시작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1904년에, 한일합방이 1910년인데 그 6년 전에 이미 조선 사람의 모든 치안권이 일본놈들에게 넘어가 버렸습니다. 서류상으로는 1910년에 나라가 넘어갔지 실제로는 1904년에 이미 나라를 뺏긴 거예요. 치안권이 뭡니까 ? 국민의 재산과 생명과 질서를 지키기 위한 게 치안권인데 그것을 일본놈한테 넘겨줘 버렸어요. 그러니 이미 국권은 상실된 거죠.
이민의 본질과 농토의 의미
그런 상황 속에서 이 땅의 농민을, 하와이에 보낸 게 우리는 이민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게 이민이 아닙니다. 노예 노동, 노예로 팔려가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이 땅의 소작농들, 불쌍한 소작농들에 의해서 끌려가게 됩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 있기 때문에 저는 김제를 소설의 첫 무대로 했고, 그리고 특히, 이 평야지대 호남평야 이곳은 저 조선시대부터 백성의 약 70%를 먹여 살리던 땅입니다. 그러니까 세금을 걷어도 임금이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하는 글을 써서 농도 정치인들에게 내려 보내고 그리고 임금이 농사짓는 시늉을 지어내서 했던 그런 정도로 모든 것의 기준 그리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세원 모두가 다 농토에서 나왔던 겁니다.
예나 지금이나 너른 들판인 호남평야
전라도와 욕
그때 당시에 농민이 90% 그러니까 조선시대부터 시작해서 일제시대가 되기 전까지, 조선이 멸망되는 그 순간까지 끝없이 이 땅은 착취의 땅이죠. 지주가 1차 착취하고, 2차로는 국가가 착취하고 그 이중의 착취 속에서 500년을 시달려 왔고, 500년만 시달려 왔겠습니까? 그 전 고려시대, 백제시대 이렇게 올라가면 3,000년을 시달려온 착취의 땅이 됩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뭐라고 하고 나왔냐하면 ‘욕의 본향이 욕의 본 고향이 전라도다’ 그런 말이 나왔습니다. 왜? 전라도 사람이 욕을 그렇게 잘하냐? 친한 친구도 “야, 시벌놈아”지 아들보고 “오살육시하네. 지리산 호랭이가 콱 물어갈놈 저놈”. 자기 아들 보고 그래요. 딴 도 사람들은 이해를 못해요. 친밀감도 전부 욕으로 해결해요.
왜 그런가 하면 저 강원도나 함경도 사람들은 세금을 낼 필요가 없었어요. 세금을 낼 게 없었어요. 전부 산간에서 감자나 심어먹고 조나 심어먹고 무슨 세금을 걷겠어요. 거기에서는 사또한테 곰 쓸개, 호피 호랑이 껍데기나 갔다주면 그걸로 끝나요.
여긴 아니에요. 2중 3중으로 착취를 다했던 곳이에요. 그러니 보세요. 뼈 빠지게 일을 했는데 국민의 90%가 농민이고 그 90%중에서 또 90%가 소작인이에요. 대단히 죄송하지만 여기에 지주자식 계시면 이해하십시오. 천석꾼, 천석꾼, 그 천석꾼 밑에 소작인이, 소작인의 자식까지 생각하면 약 2,000명이 매달려야 합니다. 만석꾼, 거의 8,000명이 매달려야 합니다. 그들의 착취 속에서 천석꾼, 만석꾼이가 배를 불리고 살았어요.
그러니 자기는 저기서 거머리 뜯기고 요즘 장화. 그때는 장화가 있습니까? 거머리 뜯기고 허리 휘어지고 얼굴 팅팅 붇고 똥은 마렵죠, 햇볕은 쬐죠, 눈은 찔리죠, 거머리는 물어뜯죠. 그렇게 농사를 짓고 있는데 지주들은 가마타고 왔다 갔다 해요. 조선시대에는 일제시대에는 하이야(전세택시)타고 왔다 갔다 해요. 그 꼴을 보고 소작농들이 할 수 있는 게 뭐요?
“저런 오살육시할 놈 콱 디져부러라”하는 욕이나 안하면 그 분을 그 고통스러움을 어찌 풀겠어요? 여러분들 지금 토하土蝦가 농약 때문에 다 없어졌어요. 토하라는 게 있습니다. 민물새우 나이 많으신 분들은 보신 적이 있을 거에요. 논두렁에 물이, 맑은 물이 흘러가면 7∼8월 달에 새우가 이만썩한 게 들끓습니다. 휘몰이를 하며, 휘돌면서 이렇게 막 춤을 추는데 그 빛이 꿰뚤려서 맑을 물속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보석 같습니다. 그것을 젓갈을 담으면 토하젓이고 그 토하가 알을 뱁니다. 이 새끼손가락 이만밖에 안 되는 이 1/3로 가는 거기에 알을 붙어 있으면 얼마나 붙어 있겠어요. 그 알을 뜯어서 젓갈을 담아요. 그게 토하알젓이에요. 그 맛이 기가 막히는 겁니다. 첩도 안준데. 그것을 소작농들이 농사를 짓고 그걸 보를 막아서 떠서 잡아 가지고 단지에다가 알을 담아서 이 한 단지를 만들어요. 얼마나 많은 토하를 잡아서 그것을 뜯어서 한 단지를 만들겠어요. 그걸 만들면서 소작인들이 뭐라 하겠어요? “야 이놈 이걸 먹고 디져버려라. 복상사나 해 버려라” 복상사가 뭐에요? 남녀관계하다가 남자가 여자 배위에서 죽어버리는 거에요. 토하 알젓이 정력에 좋다고 하거든요. 그래 이것 쳐 먹고 복상사나 디져버려라. 그 말을 안 하면 못 살아요.
토하가 한가득 보인다.
판소리는 욕의 승화
전라남북도가 다 똑같죠. 곡창지대가 많으니까. 그 욕이 500년, 1,000년을 흘러내려오다 보니까 욕이 아주 문학적으로 승화돼 버렸어요. 그래서 저는 『태백산맥』, 『아리랑』에서 우리 전라도 넉끌넉끌한 욕을 그대로 다 쓰므로써 그 역사성도 말을 하고 전라도 말이 얼마나 찰방지고 쫄깃거리고 맛있는가? 왜? 판소리가 이 땅에서 나왔는가하는 이야기도 동시에 해냈습니다.
“에레기 순 개자슥덜아, 고런 드런 눔에 법 맹그니라꼬 그리 삐대고 개지랄쳤냐! 지미 붙어 묵을 눔덜.”
“싸악 다 호로 개아덜눔덜이다. 요것이 농지 개혁은 무신 빌어 묵을 농지 개혁이냔 말여. 씨부랄 눔덜이 사람을 워띠캐 보고 혀는 잡지랄덜이여. 시방”
“워치게 보기는 뭘 어치캐 바. 소작이나 부치묵고 사는 것덜이야 보나마나 썩은 홍어 좆이고 똥통에 구데기제. 눈꼽쟁이만치라도 사람으로 여겼음사 요런 가당찮은 직거리 혔것어?”
『태백산맥』에 보이는 욕들
『태백산맥』이 일본에서 번역이 됐는데 번역하는 사람들이 제일 어려운 게 뭔가? 욕 번역이에요. 욕 번역. 일본놈들에게는 욕이 두 가지 밖에 없데요. 칙쇼ちくしょう 畜生,蓄妾, 빠가야로ばかやろう 馬鹿野郞 그것밖에 없대요.
우리의 욕이 일본에선 현실?
“니 에미 붙어 먹을 놈아.” 뭐 우리 그러잖아요. 근데 일본놈들은 니에미하고 붙어버린대요. 그래 이게 욕이 아니래요. 형수 데리고 사는 게 일본놈들이잖아요. 그건 또 괜찮아요. ‘딴 데 갈수도 없고 애가 있는데 가기도 뭐하고 하니까 그 애를 살리기 위해서 동생이, 능력 있는 동생이 형수를 데리고 산다.’ 거기까지는 논리적으로 맞아요. 근데 니 에미 붙는 것은 막 붙어 버리니까 욕이 안 된대요. 그래서 그 많은 욕을 번역하느라고 애를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이 땅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핍박에다가 일본놈들이 들어오면서 그때 당시 일본놈들이 한국에서 제일 탐낸 게 두가집니다. 첫 번째 쌀, 두 번째 목화. 그다음 세 번째 광산물‧금‧은. 네 번째가 목재 수풍댐을 만들어서 거기에 가면 댐만 있는 게 아니고 종이 펄프공장이 있다고 그래요. 큰 게 목재 이런 식으로 하는데 제일 중요한 게 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놈들이 지가 만들어내는 쌀이 국민의 반도 못 먹거든요. 그래서 쌀을 착취를 한 건데 그 착취의 대상이 바로 여긴데...
목포항에 수탈한 면화가 쌓여 있다.
토지조사 사업은 빌미
놀랍게도 왜놈들이 들어와 가지고 1910년에 합방을 하고 1912년부터 시작해서 8년에 걸쳐서 토지조사 사업을 합니다. 그 때 당시에는 우리나라는 측량기술이 없었으니까. 이렇게 해서 우리 할아버지가 지어 먹던 땅, 어느 나무에서 어느 나무까지가 우리 누구 것, 이 정도였죠. 그래 일본놈들이 들어와 가지고서 정확하게 측량을 한다고 해서 ‘임자를 정확히 찾아주겠다’ 이런 명분을 내걸고 토지조사 사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일본놈들이 홍보를 제대로 하지도 않고, 신고하는, 신청하는 방법도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고 그냥 마구잡이로 실시를 해 나갔어요.
토지조사를 하고 있는 모습.
그러다 보니까 결과가 동양척식주식회사라는 걸 만들어서 농토를 관리하는 회사를 만들었는데, 땅 전체가 아니고 농토만, 논‧밭, 바로 우리 인간들의 생존에 직결되고 있는 먹이를 구하는 논‧ 밭 45%가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가 되어버렸습니다. 다 빼앗겨 버린 거예요. 신고 안했다고 뺏어 버리고, 뭐 했다고 뺏어 버리고, 이렇게 했으니 여기 농토가 제일 많은 땅의 제일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본 것입니다. 무식할수록 거의 땅을 다 뺏겨버리고. 그 땅이라고 하는 자작농 대체로 자작농 그러니까 5마지기 그것 가지고 있으면서 못살겠으니까 소작, 자소작이라고 하죠.
토지수탈사업을 총괄했던 주식회사인, 동양척식회사
농지수탈과 수난
그래 순소작이 있고, 자기땅 한 2마지기 있으면서 소작도 하는 자소작이 있고, 자작이 있고, 지주가 있지요. 그래 이 자작농들의 땅이 거의 다 뺏기고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작인이 되어 버렸어요. 그러고 나서 그들은 여기서 도저히 살 수가 없어요. 왜? 일본놈들이 자꾸 밀려들어요. 안중근의사한테 죽은 이등박문이란 놈이 식민지 계획을 세울 때 조선에 300만명을 이주시키면. 일본놈 300만명을 이주시키면 영구히 조선을 지배할 수 있다. 그때 우리 조선반도에 한반도에 인구가 대략 2,000만명 정도 됐을 겁니다.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일본놈들이 한국에 정착 못한 이유
결국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어요. 왜냐하면, 두 가지 이윱니다. 한국의 첫 번째 이유는 한국에 들어와서 일본놈들이 살 도리가 없어요. 얼마나 조선 농민들이 배척을 하는지 일꾼으로 가지도 않아요. 품앗이… 안돼요. 그런 식으로 해서 조선은 살만한 땅이 아니다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일본놈들이 여기다 끌어다 놓고, 일본 사람 중에서 가장 하층민인 죄인이라든가 뭐 나쁜 짓 하는 그런 사람을 중심으로 끌어 왔어요. 그러다 보니까 그들이 가서 사는 땅에 조금 나은 계급이 오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서 해방이 될 때 저 신의주부터 시작해 가지고 제주도까지, 일본놈들 조선 총독부부터 시작해서 젓갈장사까지 하는 놈 다 합하면 약 80만명쯤 됐습니다.
일본 정착민보다 많은 친일파와 식민통치 연장
왜놈들이 그런데 놀랍게도 친일파가 얼마였는가? 그 두 배인 150만명이 친일파였습니다. 150만 더하기 80만이 이 땅을 식민지배 했다고 봐야 되겠지요. 그러니까 왜놈보다 2배가 많은 조선사람이 민족과 조국을 팔아먹었어요. 그래서 우리 식민지 지배가 10년에 끝날 수 있었던 것인데, 이것이 36년 까지 갔습니다. 10년에 끝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3. 1운동때 식민지 통치를 끝낼 수 있었어요. 그런데, 친일파들의 농락에 의해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잡아가는, 정보 제공해 주고, 앞잽이 노릇을 하면서 독립군들이 이 땅에 발을 못 붙이고 만주로 이주할 수밖에 없는 그런 악조건 속에서 우리 식민지통치가 26년, 27년을 더 연장하게 된 겁니다.
고종의 장례 행렬과 3.1 만세운동
그래서 그런 맥락위에서 소설을 구성하게 되면서 김제가 무대가 되고, 우리 민족이 당한 것은 이 내부에서만 당한 것이 아니고 그 시절에 6, 7백만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하와이로, 일본으로, 훗카이로, 사할린 그리고 연해주, 만주, 극동까지 전부 다 자발적으로 먹이를 찾아가거나 노무자로 끌려가거나 학병으로 끌려가거나 정신대로 끌려간 역사가 있습니다. 그것도 작가가 한 번도 쓴 일이 없습니다.
투쟁엔 좌우가 없다
통일적으로, 또 한 가지 우리가 분단이 되었는데 분단된 이후, 해방 이후의 역사만을 서로 대립된 상황 속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 못 갖게 하고 쪼금 관심가지면 빨갱이로 몰아서 죽이고, 이런 식의 역사를 산 게 아니고, 현재의 입장 속에서 식민지 역사까지도 그런 식으로 반토막을 냈습니다. 그러니까 식민지에서 우리 민족이 투쟁한 것은 민족주의자만 투쟁한 게 아니고 사회주의자들도 함께 투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을 교과서에서 완전히 지워서 없애버렸어요. 그러다가 보니까 우리 민족주의 투쟁이라고 하는 것은 청산리 전투, 김좌진 장군의 그것만을 끝나버리고 그 이후에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것처럼 되어 버렸어요. 이북도 마찬가지로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을 다 지워버리고 사회주의들의 주장만을 썼는데 그것도 김일성 중심으로 써놨어요.
김좌진 장군 사진
청산리 전투 승전 기념 사진. 1921년
전체를 못 보게 하는 현실
문제는 해방이후의 공산주의와 일제시대의 공산주의는 완전히 다릅니다. 일본놈들이 이동녕선생에 대한 기록을 남긴걸 보면 사회주의자라고 해놓고 가로에다가 민족적 사회주의자라고 가로에 써놨습니다.
석오 이동녕 선생은 1869년 2월 17일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동리에서 이병옥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28세(1896년)때 독립협회에 가담하였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민권의 기수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독립협회 주최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국민운동 일선에 나섰다 투옥되어 7개월간 옥중생활을 하였다. 이 때 민권운동과 개항운동에 더욱 앞장서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
이후 이상재 선생 등과 함께 YMCA 운동을 전개하였고, 양기탁ㆍ신채호 선생 등과 함께 청년회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하며, 이때부터 김구 선생과 교류를 시작하였다. 이후 1906년 만주 용정촌으로 망명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사립학교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독립운동의 기수들을 길러냈다. 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군사교육을 통해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반 평생을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며 조국 광복의 일념에 투쟁하던 그는 1940년 3월 13일 사천성 기강에서 과로로 영면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광복 후 1948년 9월 22일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를 봉환하여 효창공원에 안치하였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것이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분단되어 있는 것이 앞으로 몇 년 갈지는 모릅니다. 100년이라고 가정을 하십시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민족이 5,000년을 살아왔고 앞으로 또 5,000년을 간다고 하면 만년의 세월 속에서 100년이라고 하는 길이는 얼마겠습니까? 1Cm일까요? 1mm일까요? 아니죠. 바늘 끝으로 하나 찍을까 말까하는 세월일 겁니다. 그 세월을 살면서 어떻게 민족의 공통의 역사를 자기현실 정권의 이익에 의해서 우리 민족 성원들이 다 보지 못하고 반 밖에 못 보게 하는 애꾸눈을 만들 수 있는 것인가?
전체를 보게 하려 의도된 소설
이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 이것을 작가가 쓰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해서 저는 아리랑에서 ‘실종돼 버린 역사, 현실정치 세력들이 암장해버린 묻어 파묻어 버린 역사를 제대로 써야 되겠다’ 하는 것이 『아리랑』을 쓰게 된 또 하나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리랑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의 투쟁과 사회주의자들의 투쟁이 똑같은 사실 그대로를 기록을 해 놨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 민족은 나라를 잃은 그 날부터 시작해서 해방이 된 그날까지 혁혁하게 싸운 우리 인류사 200년이 식민지 역삽니다. 그 식민지가 된 땅 중에서 유일하게 끊임없이 투쟁한 유일한 민족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겁니다. 이 사실은 우리보다는 일본이, 프랑스 학자들이 먼저 사실 규명을 해 논 바입니다. 이 땅의 역사학자가 역사를 팔아먹으면서 각 대학 강단에서, 중‧고등학교 교단에서 역사를 팔아먹으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약 5∼6만명을 헤아릴 겁니다.
역사교사‧교수 비판과 역사복원의 소명
그 중에서 중‧고등학교 선생들은 연구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 제외해 놓고 놔서도 대학 교수 2만여명은 그러한 역사의 요구에 대하여 단 한마디도 한 일이 없이 시키는 데로만 가르친 겁니다. 반쪽만. 제가 『아리랑』에서 감히 그것을 시도해서 미력하나마 이루어 냈습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아리랑』을 쓰면서 『아리랑』은 징게맹게 외배미뜰이라고 하는 데서부터 시작돼서 수많은 곳으로 부채살처럼 퍼져나가는 형태의 이야깁니다. 저는 『아리랑』을 이렇게 시작해야 되겠다 막 지평선이 보이는 푸르른 들녁에 자기 힘이 아닌 딴 힘에 의해서 조국을 떠나 팔려가는 그 모습을 그리면서 저 바다로부터 먹구름이 몰려오는, 그 먹구름이 왜놈이라는 세력의 상징이다. 이렇게 해서 장면을 다 머리 속에 그려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해방이 과연 해방이냐? 아니죠. 여러분 다 알죠.. 해방이 곧 분단, 해방되는 그 날 우리는 바로 분단되어 버렸어요.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 비극이 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해방만세, 독립만세 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 숙제를 안고 김제 취재를 끝내고 군산 취재를 끝내고 그 다음에 90년에 중국 취재를 떠나는 겁니다.
중국의 낯선 땅에 전라도가 있다
여기서 땅을 뺏기고 도저히 살수가 없어서 1차로 비어 있는 땅, 만주, 그때 비어있었으니까. 그쪽으로 찾아서 남부여대, 아새끼들 들쳐 업고 바가지 올리고 머리에 이고 짐지고 그리고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갔습니다. 그 다음 2차로 중국과 전쟁이 붙으면서 독립군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왜놈들이 강제로 경상도‧전라도 두 군데 사람들을, 농민들을 몰아가지고 열차에 싣고 갔다 퍼다 두었습니다. 그래서 특별촌을 만들어서 250명 단위 500명의 특별촌을 만들어서 거기에서 농사짓게 하고 감시하고, 그들이 지은 농사는 100% 착취하고, 먹을 것 세끼만, 죽만 먹게 하고 나서는 저희 군량미로 관동군의 군량미로 썼습니다. 그들이 와 있다. 분명히 여기에. 그 전라도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자.
그래서 한 달동안 만주에 머물면서 수소문해서 수소문해서 하얼빈까지 가고, 길림 갔다가 하얼빈가고 하얼빈에서 또 찾아 들어가서 주마라는 마을에 800리 길을 몽고쪽으로 가 가지고 찾아갔습니다. 거기에 가니까 바로 김제, 정읍 사람들이 한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담가먹는 막걸리 전라도 탁빼기 그대로. 전라도 사투리 그대로 기가 막힙니다. 거기에 완전히 늙어서 쪼그랑 망탱이 되어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9살 7살 때 어머니 손에 붙들려서, 동생이 있으니까 엄마 아빠한테 업히지도 못하고 그 먼 길을 걸어서 거기까지 가서 산겁니다
그들이 살 때는 하얼빈 옆에 평지에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숯도 굽고. 왜놈들이 하라고 하니까. 또 숯을 많이 구웠는데 그건 뭐냐면 그때 당시에는 숯을 때가지고 물을 끊여서 그 증기로 자동차가 움직였거든요. 휘발유가 아니었죠. 그 땔감을 만들기 위해서 숯을 끝없이 한국사람한테 굽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농사를 짓는데 그들이 농사를 진 땅은 또 중국놈들거였죠. 그걸 왜놈들이 뺏어 가지고 한국사람들을 시켜서 지어 가지고 다시 뺏어간 거예요.
그 먼 곳까지 흘러 들어간 사연
그 사람들이 있는 곳을 찾아가 가지고 이제 취재를 하는 겁니다. 취재를 하다 보니까 나는 자꾸 해방, 해방 그렇게 말하는데 그 사람들은 그 사변, 그때 사변 이렇게 말을 해요. 처음엔 내가 잘못 들었나? 또 이야기를 해요. 또 그래요. 그래 “왜 당신들은 그 사변이라고, 그때 사변이라고 말을 하냐?” 했더니, “그때 그것이 우리한테는 해방이 아니다. 왜놈들이 중국땅을 뺏어가지고 우리 주어서 농사를 지었는데 해방이 되어 버리니까 그 땅을 잃어버린 중국 사람들이 때로 몰려오면서 낫이고 곡괭이고 가져오면서 저 일본놈 죽이고 저놈 죽여라 일본놈 죽이는 건 말할 것은 없고 근데 일본놈들이 그때 이미 관동군들이 철수하면서 일본 사람들 싹다 데리고 나가 버리고, 남은 건 한국 사람밖에 안 남은 거예요. 다 버리고 가버린 거예요. 그러나 한국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전부 해방된 조국을 찾아가기 위해 짐을 싸고 있을 때 그들이 막 쫓아 들어오면서 막 죽이는 겁니다. 무조건 그래서 거기서 죽고 남자들은 거의 다 죽고 다 싸우고, 자식과 여자만 데리고 도망간 곳이 압록강, 두만강 반대편인 조국과 점점 멀어지는 저 오지 오지 800리까지 도망을 간 겁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제 몸속에서 빛이... 여러분들은 모를 거예요. 그때 그 엄청난, 깜깜한데서 무슨 거대한 폭발물이 터지는 것 같은 빛이 확 몸에서 뻗어 오르는 바로 저것이 소설의 마지막이다. 바로 저거다. 그래서 아리랑 읽으신 분들은 알겠지만 소설 끝이 그거에요.
전군도로, 역사가 새긴 슬픔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전군도로라고 하는 것이 일본에서 일제시대에 한국에서 최초로 아스팔트가 되었다. 그 걸 자랑으로 말을 합니다. 그건 자랑거리 아닙니다. 무지무지한 아픔입니다. 통렬하고 비통한 아픔입니다. 왜냐하면, 이 넓은 곳의 쌀을 전부 실어서 군산으로 가져가기 위해서 저의 필요에 의해서 그 도로를 논 겁니다.
김제 신작로가 엄청나게 넓게 잘 닦여 있습니다. 그것도 전부 달구지가 쌀을 잘 옮겨 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겁니다. 여러분들은 그 길을 걸어가면서 뭘 느껴야 합니까? 여러분들의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들이 피를 흘린 길이라고 하는 것을 절절이 느껴야만 이 땅에 사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알아야만 이 땅에 사는 긍지도 느낄 수 있고 이 땅에 사는 소중함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이 길을 통해 조선인이 피와 땀과 눈물로 일궈낸 쌀이
군산항을 거쳐 일본으로 실려나갔다.
김제 백구면 유강리에는 4차선 도로가 나기 전의 옛 전군도로가 그대로 남아있다.
조정래 3부작에 대한 강의
아리랑 세트
'책 > [책]좋은 글은 심금을 울린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타이 탈감 - 위대한 지휘자들처럼 지휘하기 (0) | 2012.02.18 |
---|---|
유홍준 - 入古出新의 마음으로 이 시대의 주인이 되라 (0) | 2012.02.17 |
김종철 - 경제 성장 넘어 새로운 삶으로! (0) | 2012.01.20 |
한비야 - 청년의 "반장 하면 '반기문' 되기 유리하냐고요?"라고 물음에 답하다 (0) | 2012.01.12 |
[정보]돈은 잘 버는 것보다 잘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미숙의 『호모코뮤니타스』 강의) (0) | 2011.1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