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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 入古出新의 마음으로 이 시대의 주인이 되라 본문

책/[책]좋은 글은 심금을 울린다

유홍준 - 入古出新의 마음으로 이 시대의 주인이 되라

gunbbang 2012. 2. 17. 09:03

 

 

청춘상담 앱
‘국민 문화재 해설가’ 유홍준 교수의 청춘 답사기
“입고출신(옛것으로 들어가 새것으로 나온다)의 마음으로 이 시대의 주인이 되라”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

우리 인생 곳곳에 뛰어난 인재가 있다는 뜻이다. 이제는 국민 필독서가 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의 제목이기도 하다. 저자인 유홍준 교수는 인터뷰 내내 이 말을 자주 사용했다. 그는 손자뻘 되는 학생들 앞에서 “이 시대는 여러분들이 중심이다”라며 조언보다 격려를 많이 했다. 청춘들이 바로 ‘이 시대의 상수’라는 의미였다.

이번 ‘청춘상담 앱’은 한국미술 평론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그리고 최근 시청률 1위의 예능프로 <1박2일>에 연거푸 출연하며 ‘국민 문화재 해설가’가 된 유홍준 명지대 교수를 찾아갔다. 인터뷰어로는 ‘과대 과자 포장지’ 영상을 만들어 ‘유튜브 어워드’를 수상한 권상민(24)씨, 졸업을 앞둔 대학생 김다솜(24)씨, 그리고 이제 새내기 티를 막 벗은 대학생 이승태(21)씨가 참여했다.

 

 

대중문화와 고급문화 분리가 문제

유홍준(이하 유) (책에 사인을 한 뒤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며) 이 연구실 오는 사람들은 무조건 책 받아 가는 거야. 자 여기 하나씩들 받으세요.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가 지난 13일 서울 서대문구 명지대학교 연구실에서 청년 인터뷰어들과 만나 자신의 삶과 ‘한국의 미’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청년들 (일동) 우와, 감사합니다!

 

권상민(이하 권) 최근 교수님이 나온 <1박2일>을 재밌게 봤어요. 어떻게 출연하시게 됐나요?

 

사실 대학교수라는 직책이 있는 사람이 예능프로 나간다는 게 사회통념상 점잖지 못한 일이라고 보는 측면이 있죠. 하지만 출연을 결심한 건 현 매스컴의 문제 때문이에요. 제가 만약 티브이 교양프로에서 ‘경복궁’을 소재로 강의를 한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시청률이 1%도 안 나왔을 거예요. <1박2일>의 경우 시청률이 25% 가까이 나오잖아요. (지난주 시청률은 24.8%였다.) 같은 내용을 강의해도 파급력이 다른 거죠. 또 나는 이미지 관리할 필요가 없잖아요. 어디 출마할 것도 아니고. 하하.


김다솜(이하 김) 방송을 보고 경복궁에 가보고 싶다는 친구들이 많아졌어요.

 

우리나라는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너무 분리해서 문제예요. 대중문화는 수준이 낮은 저질문화라는 인식 말이죠. 요리로 치면, 맛있는 요리와 영양가 많은 요리가 있잖아요. 최고의 요리가 뭐겠어요? 맛있고 영양가 많은 요리 아니겠어요? 마냥 웃고 즐기는 예능프로지만 사람들은 그 안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방송 뒤 인기를 실감하세요?

 

난 내가 그래도 꽤 유명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더라고.(폭소) 예전에는 아는 사람만 알았고 이젠 모르는 사람도 알아봐. 하하. 미술사라는 전문가만의 영역이 국민들도 즐길 수 있도록 확대된 거 같아 즐겁더라고요. 이런 작업을 변함없이 할 거 같아요.

 

어떻게 ‘한국의 미’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원래는 대학 때 미학을 전공하면서 서양미술사를 공부했죠. 그런데 공부하다 보니까, 서양미술사는 굉장히 재밌는데 한국미술사는 재미가 없는 거야. 그렇다고 우리 미술이 서양미술에 비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곰곰이 생각해보니깐 우리 미술사엔 ‘스토리텔링’이 없더라고. 우리도 서양미술사처럼 깊이 있는 스토리텔링과 그것의 과정, 배경 등을 연구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어요. 그래서 한국미술사로 이른바 ‘개종’을 하게 된 거죠.

 

이승태(이하 이) 문화재를 보거나 관련 해설을 읽어도 사실 ‘한국의 미’라는 걸 느끼기 힘들어요.

 

한국미술사를 공부하다 보니 ‘한국미’에 대한 정체성을 많이 고민하게 돼요. 한국인들의 모순된 의식을 발견하기도 하고요. 예를 들면, 외국에 답사를 갔을 때 그쪽 박물관에 한국 문화재가 없으면 “우리 문화가 빈약하다”고 푸념하고, 또다른 곳에서 한국 문화재를 발견하면 “약탈됐다”고 화를 내죠.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모순된 발언들이 나오는 것이거든요. 전 쓸데없는 열등의식을 버리고 허황된 자부심도 버려야 한다고 봐요.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고.

 

 

 

배격하면서 문화를 발전시킬 수 없다

아직도 청년들은 서구의 미가 더 우월하다는 인식이 있어요. 막걸리보다는 와인, 동양화보다는 서양화, 이런 식 말이에요.

 

논리적으로 따지면 잘못됐지만 현상으로 보면 자연스럽다고 봐요. 서양 것이라기보다는 좋고 편하니까 그런 생각을 갖는 거죠. 그게 세련된 거고. 삶을 억지로 규정하려고 하면 힘이 나올 수 없어요.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한다면 미국 것이면 어떻고, 아프리카 우간다 것이면 어떻습니까.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려면 자체적이든 외부로부터든 ‘충격’을 받아야 해요. 우리 선조들은 빗살무늬 토기를 3천년이나 썼어요. 지루한 매너리즘에 빠진 거죠. 그러다가 청동기 문명이 들어오면서 민무늬 토기가 생기고 빗살무늬는 자취를 감추죠. 삼국시대에는 중국의 발달된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죠. 이미 중국은 2500년 전에 ‘공자왈 맹자왈’이 끝났으니까. 배격하면서 문화를 발전시킬 순 없어요. 발달된 문명을 받아들이며 ‘컬티베이팅’(cultivating) 하는 게 중요해요.

 

‘컬티베이팅’의 구체적 사례가 있을까요?

 

삼성 휴대전화, 현대 자동차, 엘지의 티브이도 그 예라 할 수 있죠. 낙오되지 않고 세계 문명의 흐름에 동참하려고 했기 때문에 나온 일종의 ‘문화적 결실’이에요. 또 하나, 요즘 외국에서 불고 있는 ‘케이팝’ 열풍도 좋은 사례라고 봐요. 이제 문명의 수입국에서 공급국으로 바뀐 거예요. 그들이 열광하는 건 자기들이 갖고 있지 못한 어떤 문화적인 형태를 케이팝 가수들이 전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거든요. 우리 세대는 그걸 몰라요. ‘유튜브’도 잘 모르는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어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유럽의 백인 청소년들이 한국의 가수들을 오게 해달라며 시위하는 현상, 저기 먼 동유럽에서 케이팝 콘서트를 보려고 노숙을 하는 현상, 이런 것들을 이제 여러분이 연구해야 해요. 제가 부탁하고 싶어요. 어떻게 보면 전 여러분의 멘토가 될 자격이 없어요. 제가 40년 전 느꼈던 문제의식과 지금 여러분이 느껴야 하는 문제의식은 다를 것이고, 또 분명 달라야 합니다.

 

교수님은 본인이 원하는 공부를 위해 미학과에 들어가셨잖아요.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관심사보다는 취업률이 높은 과를 지원하는 게 현실입니다. 취업률이 낮은 학과를 없애는 대학도 있고요.

 

우리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상과대학, 법과대학, 의과대학을 가야 인생에 도움이 된다고 봤으니까요. 제가 미학과 간다니깐 어머니께서 “저놈이 어떡할라고 그러냐”며 2박3일을 우셨어요. 하하. 전 당시에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 취업 잘되는 과에 간 애들이 시험 보는 기술은 뛰어났을지 몰라도 인생에 대해선 미성숙했을 거라고요. 법관이 되고 싶어서 법대를 가야 하는데 성적이 안 돼서 못 가면 그건 슬픈 거예요. 하지만 하고 싶은 게 따로 있는데 점수 때문에 법대나 의대를 간다면 그 대가는 언젠가 분명 받을 거라고 봅니다. 아마 엄마가 법관 하라고 해서 법관 된 사람은 죽을 때 후회할 거예요. 배짱을 갖고 하고 싶은 거 하세요. 인생에서 자기가 하고 싶어한 것을 한 사람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더라도 후회가 없어요. 그리고 그런 풍토를 바꾸지 못하고 대물림한 것에 대해선 세대를 대표해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말 하라고 이런 코너 만든 거죠?(폭소)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감옥도 가시고 전반적으로 인생의 진척이 좀 늦으신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세를 고쳐 앉으며) 1969년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박정희 대통령이 3선개헌을 했어요. 장기 집권의 포석이었죠. 그 당시 어떤 지식인도 이것에 대해 발언을 못 했어요. 유일하게 학생들만 발언을 했죠. 무기정학 받고 감옥도 가고, 졸지에 전과자가 되니 앞날이 깜깜하긴 했어요. 교수 꿈도 날아간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하지만 그 당시 운동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역사의 죄인이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제 인생이 늦어진 것에 대해선 후회하지 않습니다. 서울로 가는 길은 여러 길이 있어요. 같이 학생운동을 했던 친구가 졸업 뒤 국책은행에 취업을 했어요. 전 배신감이 들어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했죠. 그때 친구의 답이 멋있었어요. “나중에 우리가 사회를 바꿀 위치가 됐을 때 무엇이 잘못인지 아는 사람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대답이었죠. 저도 생각을 고쳐먹었죠. 한국 미술평론의 ‘엑스퍼트’(전문가)가 돼야 한다고 결심했어요. 그것이 지금 저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고요.

 

숭례문 화재…“스리 쿠션 맞았지”

청년들 사이에서 좌우 대립이 심하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좌파·우파, 진보·보수를 칼같이 나눴나 모르겠어요. 선명성 경쟁도 아니고 말이죠. 중도가 없어져 버렸어요. 좌파도 인정하는 우파 이론가, 우파도 인정하는 좌파 이론가가 있어야 하고 그런 사람들이 많아져야 중간층이 두텁게 될 텐데 말이죠. 한 사람의 생각이 좌냐 우냐는 것은 라인(선)이 아니라, 에어리어(구역)예요. 인간의 사고가 얼마나 다양한데… 평가하기 무척 힘든 거죠. 진보신문들도 문화 쪽엔 엄청나게 보수적인 시각을 갖고 있어요. 반대로 보수신문인데도 대북문제에 대해선 진보적 태도를 취하기도 하고요. 한 진보 인사를 만났는데 이 사람의 여성관이 완전 ‘꼴통’ 수준이더라고요. 이 사람의 진보성을 내가 믿어야 하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죠. 청년들은 생각을 좌우로 나누지 말고 소통에 힘썼으면 좋겠어요.

 

 

조심스러운 질문인데, 최근 숭례문이 불탄 지 4년이 됐잖아요. 그 당시 상황에 대해선 할 말이 없으신가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세월이 지난 다음에 말하면 좋을 거 같은데…. 지금은 참회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게 맞는 거 같아요. 말할 수 있는 건 사실관계 정도겠네요. 문화재청은 각 지역의 지청이 없어요. 환경청, 산림청은 각 지청이 있죠. 그래서 관리를 지자체에 위임을 해요. 문화재청은 행정업무만을 지원하고요. 국유재산인 국보·보물은 각 지방자치단체장이 관리 책임자예요. 엄밀하게 말하면 숭례문의 관리 책임자는 서울특별시 중구청장이었고요. 국보 1호라는 상징성도 있고 하니 문화재청장이 관리자였던 것으로 많이들 알고 계셨죠. 참여정부 말기였기도 했고요. 뭐 그런 분위기 속에서 ‘스리 쿠션’ 맞았던 거지. 하하.

 

강의에 답사에 집필까지, 그런 원동력은 어디서 나오나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 피곤하지 않아요. 글 쓰다가 지치면 하는 게 답사고, 답사하다 지치면 글 쓰고 이런 식이죠. 한가지 할 땐 나머지는 쉬는 거잖아요. 그때그때 가장 재밌는 걸 해요. 단 원고는 쓰다가 안 되면 바로 멈춰요. 답사를 가버리든가 오랜 친구에게 전화를 해 수다를 떤다든가 합니다. 짓이겨서 써봐야 소용이 없더라고요.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주세요.

 

책 쓰고 강의 계속하는 건 같고. 크게 생각하고 있는 게 있어요. 다큐멘터리의 최고 명작 가운데 미술사학자인 케네스 클라크가 본인의 저서를 기초 삼아 직접 출연한 <문명>이라는 작품이 있어요. 12편짜리인데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각국 문명의 발자취를 살펴본 다큐예요. 한국미술을 소재로 이런 작품을 한번 해보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요즘 청년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고 싶으신지요?

 

맹자께서 ‘고지군자과즉개지 금지군자과즉순지’(古之君子過則改之 今之君子過則順之)라고 했어요. ‘옛날의 군자들은 잘못된 점이 있으면 고쳤는데 요즘의 군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에요. 2500년 전부터 젊은이들은 말을 안 들었어요. 하하. 크게 걱정 안 합니다. 여러분이 중심이에요. 단 이 말은 꼭 기억해 주세요. ‘입고출신’(入古出新: 옛것으로 들어가 새것으로 나온다). 진행·정리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앱 이용 후기

유홍준 교수는 문화유산 분야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학자지만 고리타분하거나 권위적이지 않았다. 기성 세대와 다른 청년 세대의 모습을 인정하고 전통문화만이 아닌 케이팝이나 예능 프로그램의 가치도 높이 샀다. 온화하고 친근감이 넘쳤다.

그가 내세우는 전문가론이 마음에 와 닿았다. 어느 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됨으로써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지닐 수 있고, 이를 위해 각자의 분야를 찾아 최선을 다하라는 조언이었다. 이에 따르면 유홍준 교수는 자칫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문화유산을 대중에게 알기 쉽고 맛깔나게 설명하는 데 있어 전문가인 셈이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기술로서의 전문가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경제적 안정이나 출세가 아닌,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느냐를 기준으로 자신의 분야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으로서 시대적 사명을 의식하고 때로는 이를 위해 행동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했다. 한국미술에 빠져 박물관만 죽어라 찾아다니고 학생운동에 참여하다 수감 생활을 한 그의 대학생 시절이 이를 잘 말해준다.

나는 유홍준 교수에 대해 학식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가치관이나 살아온 과정에 더 큰 매력을 느꼈다. 그를 보면서 평범한 20대인 나는 또 고민에 빠졌다. 나도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싶다. 나만의 분야를 찾아 부단히 노력하여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은 멋진 일이다. 하지만 개인의 노력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상황 앞에 좌절도 많이 한다. 말 그대로 ‘사람 죽이는 등록금’이나 개미지옥 같은 취업의 문, 꿈도 열정도 없이 고시 생활에만 목매는 친구들 앞에서 말이다. 이것이 나의, 아니 20대의 고민이다. 권상민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도 많은 청춘들은 자신의 꿈을 찾아 방황한다. 그 ‘꿈’이라는 목적지를 가기 위해 방황이라는 어두운 터널 속에서 몸부림친다. 유홍준 교수는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꿈꿔온,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었다. 인터뷰 내내 일에 대한 열정이 느껴졌고, 그것이 바로 원동력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유홍준 교수의 메시지는 동시에 청춘들에게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으라는 숙제도 던져주었다. 이승태

 

유홍준 교수를 ‘한국의 미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언뜻 보면 투박해 보이지만 디테일 속에 스며 있는 세련미와 품위가 느껴졌다. ‘멋있다’가 아니라, ‘멋스럽다’고 해야 할까. 이야기하는 내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기분이 들었다. 연구실 곳곳의 서적들과 문화재들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실 때는 정말 ‘천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조선 달항아리 앞에서 ‘이 생김새처럼 넉넉하게 살라’고 하신 말씀은 깊이 와 닿았다. 졸업을 앞둔 나에게 ‘좋아하는 일’이라는 화두를 던져준 정말 뜻깊은 시간이었다. 김다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