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방랑자
수단화된 교육을 넘어 안목을 일깨워주는 교육으로 본문
교육을 하려는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고민해봐야 하는 건, ‘교육이란 무엇인가?’하는 걸 거다. 교육에 대해 사회적인 여러 합의들이 있었던 게 사실이지만, 완벽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교육을 수단화 한다는 데에 크나큰 문제가 있다. ‘돈을 벌기 위해’,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해’처럼 수단화된 교육은 자칫 물신만능주의로 흐르게 할 수 있다. 또한 그건 교육이라기보다 ‘훈련’이라 표현됨이 옳을 것이다.
수단화된 교육, 그건 훈련이나 세뇌다
수단화된 교육의 대표적인 예는, 60~80년대 ‘국가주의적 인간’을 양성하던 예를 들 수 있다. 그건 어떤 주형틀에 인간을 넣어 개성을 상실케 하고 무비판적, 획일화된 인간을 양성하던 교육이었다. 솔직히 이건 인간의 기계화라고 표현할 수 있다(‘벡실’이란 애니메이션의 미치광이 과학자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그는 인간들에게 점차 기계화되는 약물을 집어넣고 이렇게 외쳤다. “인류를 최종진화 형태로 만들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했다.” 사람이 미치려거든 자기만 미치면 된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그게 진리라도 되는 양, 꼭 남에게 강요하니 문제다. 교사도 그런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얘기다). 그 당시 그런 부조리한 현실을 강요하고 주입하며 교육한다고 외친 사람 중에, 반성하며 후회한 이는 몇이나 될까? 그렇다. 국가를 위한, 대통령을 위한 교육이었을 뿐이다. 그걸 아무리 여러 말로 포장한다 해도 인간성을 제거한다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수단화된 교육은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특정한 대상에 봉사하도록 개인의 개성은 깎아내리고 특정 대상의 절대성만을 부각시킨다. 이런 상황이라면 교육은 교육이기보다 ‘훈련’이며 ‘세뇌’라 할만하다. 교육을 하려하는 사람들이 숙고해볼만 한 게 있다면, 바로 교육이 ‘훈련’, ‘세뇌’로 변하는 그 경계일 것이다. ‘교육’이란 단어는 ‘가르쳐 기른다’는 뜻으로 가치중립적인 단어이다. 즉 ‘무엇을’ 가르쳐 그르느냐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바로 이 ‘무엇을’을 고민하고 어떤 가치에 더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교육은 전혀 다른 결과를 불러온다.
한겨레와 조선의 교육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
『한겨레신문』에선 지난 6일 중학교 1학년을 상대로 치른 일제고사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몇몇의 교육청에선 그 결과를 백분위 성적으로 환산했는데, 글쎄 어떤 학교에선 영어 한 문제 틀리면 전체 600명 중에 320 등이라고 한다. 이런 등급매기기로 인해 중학교에 올라오자마자 공부에 대해 비관하며 포기하고 싶은 아이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한겨레에선 이 기사를 통해 성적 지상주의를 질타하고 객관적인 평가자료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태도는 확연히 달랐다. 일제고사에 대한 기사 내용은 일절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어제부터 우리나라 교사들의 연수실태를 꼬집고 선진국의 교사에 비해 형편없다는 투로 매도하고 있다. 『한겨레신문』는 교육의 문제를 어떤 교육관(성적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접근한데 반해, 조선일보는 교육의 문제를 대상(교사 집단)에 대한 비판으로 접근했다.
▲ 한겨레신문, 2008년 3월 6일 기사다.
두 신문이 차이가 나는 이유
두 신문의 기사는 현재 우리 교육의 현실을 제대로 방영하고 있다. 교사도 문제가 있으며, 일반인들의 교육관에도 문제가 있고, 교육 시스템에도, 성적 지상주의의 사회에도 문제가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광범위한 문제가 있음에도 서로 다른 관점에서 교육 문제에 접근하고 있으니, 그 속내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제부터 하는 얘기는,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에 따른 주장일 뿐이다. 틀렸다면 당연히 고쳐야 할 것이지만, 이런 주장도 가능하다는 걸 그냥 참고삼아 들어주길 바란다.
우선 한겨레는 진보 성향의 신문이다. 즉, 예전처럼 수단화된 교육이 아닌 개개인의 특성을 살려주는 교육을 지지한다. 굳이 공교육이 아니더라도 개인의 특성을 살릴 수 있다면 대안학교도 지지하며 생태학교도 지지한다. 즉, 이들이 생각하는 ‘무엇’은 어떤 초월적인 가치를 실현하는 교육이 아닌, 자기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교육인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들이 일제고사를 성토하는 이 기사의 저의도 이해될 것이다. 교육청에선 ‘학생 개개인의 현 실력을 진단하여 체계적인 교육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자료로 쓰기 위해 평가하는 거다.’라고 했지만, 이미 거기에는 획일화된 정답 맞추기와 서열화라는 비교육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던 거다. 교육이 다양한 개성을 존중하는 방향이 아닌, 무개성의 획일화로 흐르는 것이니, 이걸 성토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한 문제 틀린 것으로 320등이라니, 이게 제대로 된 평가라고 누가 할 수 있겠는가. 단지 한 문제 틀린 것으로 이 아이는 이제 영어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조선일보는 보수 신문의 대표이며 가장 많은 독자를 지닌 ‘밤의 황제’다. 보수적 교육관은 ‘신자유주의 교육관’이다. 즉, 기업이 요구하는 인재를 키워내자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재를 발굴하여 그들에게 집중 투자해야 한다. 어렸을 때부터 철저히 성적으로 가려내어 영재를 발굴해내고 그들을 키워서 나라를 이끌어가게 하자는 거다. 이들은 기득권층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 기득권층은 이미 모든 여건을 다 지니고 있기 때문에 분배보다 성장을 원한다. 성장이라는 보호장벽이 쳐지면 자신들은 자신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불릴 수 있다. 바로 그런 관점이 ‘문화자본’을 많이 지닌 자신들에게 유리한 자사고 증설 요구로, 학교의 모든 성적을 공개하여 철저한 경쟁적 교육관 도입 요구로 이어진다. 더욱 교장단에게 유리한 ‘교원평가제’ 도입 요구까지 서슴없이 하게 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 이들이 교사의 연수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싣고, 선진국 교사에 우리 교사를 비교하는 행위의 저의도 뚜렷이 보일 것이다. ‘우리나라 교사가 이토록 무능합니다. 그런데도 교원평가제를 거부하고 성적공개를 거부하잖아요. 자신의 무능함이 들킬까 전전긍긍하는 거죠. 여러분 이들 때문에 우리 교육이 후진성을 못 면하고, 우리 교육계가 이 지경이라고요. 어때요 괘씸하죠. 우리가 앞에 나서서 이들을 성토할 테니, 보수계층인 여러분들은 뒤에서 지지만 해주세요. 그렇게만 되면 당연히 전교조는 박살나고 우리가 바라던 그것도 자연스레 얻게 될 거예요.’라는 걸 거다. 이들이 원하는 교육은 ‘모두’를 위한 교육이 아닌 ‘자기들만’을 위한 교육인 것이다.
▲ 조선일보, 3월 11일 기사다. 위 사진을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링크된다.
수단화된 교육이 아닌, 안목을 일깨워주는 교육으로
물론 내 주장이 정말 맞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두 신문사의 보도 방식을 보니 이런 식으로 생각이 모아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난 교육이란 한 개인에게 세상을 보는 안목을 일깨워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게 바로 교육의 본질일 것이다. 누구의 이익을 대변해서도, 하나의 관점만을 절대시하며 강요해서도 안 된다. 그건 교육자로서 크나큰 범죄를 저지르는 것에 다름 아니니 말이다. 수단화된 교육은, 범죄일 뿐이다. 그걸 좋게 보여주며 합리화하려 노력하지 말라. 조선일보는 2MB 정권지가 된 듯하다. 그의 시장 경제적 교육관을 지지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그 교육관의 늪에 빠지면 우린 다시 한 번 피비린내 나는 살벌한 교육 경쟁에 순수한 아이들을 몰아넣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난 아이들에게 “성적 못 나와도 괜찮다. 니가 지금 어디에 서 있고 어딜 향해 가려 하는지 그것만 알면 된단다. 성적이 매겨 주는 너의 가치보다도 넌 원래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으니까. 공부도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하나 하나 알아간다는 게 기쁨이 될 수 있었으면, 그런 기쁨으로 더 넓게 세상을 보고 자신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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