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방랑자
2011년을 정리하며(실패할 것을 알지만 달려든다) 본문
꿈을 놓는 순간 찾아온 것은 허무함이었다. ‘신기루’를 보고 맹목적으로 좇아온 듯한 느낌. 그래서 ‘아무 것도 없었다’고 결론 지으면 펀할 것인데, 실상 그런 비관적인 이야긴 아니다.
결핍이 만든 튀어나감
오히려 우리가 경계할 것은 자기 맘대로 모든 게 이루어지는 현실이며 궁핍함 없이 모든 게 주어지는 상황이다. 그 안에서 타인도, 상황도 들어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맘대로 되지 않음’은 오히려 축복이고 기쁨이다. 그건 인생을 통째로 선물 받는 경이감에 비견될 수 있다. 올해의 시작은 최고의 선물을 받음으로 시작되었다. 그간 ‘멈껏 헤매보고 맘껏 질문 던져볼 거야’라고 생각했는데 그걸 어느 정도까지 맞닥뜨릴 수 있을지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 된 것이다.
선물은 받았지만 달갑지 않았기 때문일까? 좋기보단 부담되고 걱정 되었으니 말이다. 어딘들 사람이 살지 못할 곳이냐고 호기 높게 이야기했지만 막상 허허벌판에 놓인다고 생각하니 겁이 났다. ‘실패자’란 낙인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결국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나를 짓눌렀다. 역시나 생각과 현실의 괴리는 엄청 났던 것이다. 그래서 자꾸 숨어들 곳을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호기로움은 나의 나약함을 가리기 위한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한겨레 교육’에 서류를 냄으로 ‘회사전형’에 첫 발을 내딛게 됐다. 교육자의 꿈은 놓았지만 그런 고민들을 기반으로 교육 관련 일을 꿈꿀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하지만 아무 연락도 없었고 이래저래 맘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첫 실패는 날 비참하게 만들었지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줬다. 그건 두 번째 여행에 대한 생각이다.
국토종단의 연장선에서 사람여행을 떠나다
09년의 국토종단도 벼랑 끝에 내몰린 상황에서 하게 된 거였다(국토종단 기록보기). 하지만 상황이 날 이끌기만 했다고 하기엔 억지인 부분도 있다. 분명한 건 08년도 임용시험을 통해 어느 정도 가능성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보통 그런 경우라면 더 이를 바짝 물고 공부에 전념할 것이다. 실제로 오늘 오후에 경수 누나네 스터디팀 첫 미팅이 있어서 나가봤는데 거기서 본 소영이가 그랬다. 소영이는 이번 시험에서 붙었다. 그러나 이차에선 떨어지고만 것이다. 결과야 어찌 되었든 자신의 가능성을 본 셈이다. 이런 현실을 경험하고 첫 미팅을 하는 것이니, 당연히 의욕이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다. A4 용지에 한 가득 계획을 세워왔으니 말이다. 계획된 인생, 거기엔 빈틈이라곤, 다른 우연이 끼어들 자리라곤 없어 보였다. 그러하기에 남자 친구를 사귀어 보라는 말에 “공부에 방해만 되요”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게 바로 가장 일반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나는 일반노선과 다른 길을 걸었다. 의지는 불태우되 방향 설정을 달리한 것이다. 거기엔 공부에도 여러 형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을 거다. 학원으로의 아르바이트, 그리고 여행. 일이 공부에 방해되는 건 맞지만 장기간적으로 생각해 봤을 땐 오히려 도움이 되며 인생에 그만한 공부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관계에 대한 공부, 상황에 대한 공부 등 맞닥뜨려 보면 참 많고도 많은 일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손 내밀기 전에 손을 잡아준 유정 선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여행은 우발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지만, 그건 지금껏 고수해온 나의 틀을 깨고 견고해진 나의 방식에 도전장을 내미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거의 반대했다. 중요한 시기에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한다는 게 반대의 요지였다. 가장 긴급한 일부터 처리할 것이지, 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굳이 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겐 그것이 임용공부보다 더 시급한 일이었기에 해냈고 전혀 다른 인생의 노선에 접어들었다.
11년의 사람 여행은 그와 같은 심리의 반영이다(사람여행 기록보기). 너른 세계를 품고 넓게 사유하고자 하는 마음. 더욱이 임용시험이란 목표마저 깨버렸으니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5주 정도의 시간동안 걷고 또 걸으며, 난 삶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애초에 정해진 길 따위는 없다. 수많은 길이 있었고 그 중에 하나를 걸은 것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하나의 길이 하나 뿐인 길로 인식되며 전체의 길로 왜곡되더라. 그 순간 그 길을 포기하는 것은 죽음, 즉 삶을 포기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는 게 되었다. 사람여행이 나에게 준 깨달음 중, 가장 큰 것은 ‘길은 여럿’이라는 단순하고도 명쾌한 진리였다.
도전한 자만이 실패를 맛볼 수 있다
여행을 통해 여러 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부딪힐 때 새로운 길이 열린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젠 다시 초심으로 무엇이든 해보리라 맘먹었다.
한겨레 교육
1월에 원서를 냈는데 여행을 마치고 온 5월에 연락이 왔다. 기대를 놓은 순간 연락이 온 것이다. 뭘 준비해야 하는 줄도 모르고 얼떨결에 면접을 봤다. 기획에 관해서 생각해본 적은 없었기에 적당히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겨레 교육’에 대해 사전지식을 전혀 공부하지 않고 간 것은 엄청난 문제였다. 아무런 교육내용을 모르니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제약됐던 것이다. 이렇게 큰 실수를 했음에도 운 좋게 면접은 통과했다. 하지만 문제는 필기시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야 열심히 준비해서 썼지만 보기좋게 떨어졌다. 그 후론 어떤 연락도 없었다.
한겨레 교육에 들어가고 싶었던 건, 평소에 좋아하는 신문이기도 하지만, 교육에 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막상 임용에 대한 것을 놓긴 했는데, 뭘 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지 않았기에 안전한 루트를 따라간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 이루어질 것 같던 일이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니 한동안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임피 돼지농장
삶은 수많은 우연이 겹친다. 그 우연이 나에게 왜 찾아왔는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경수 누나는 내가 답답해하는 모습을 보자 얼핏 “돼지농장에서라도 일해볼래?”라는 제안을 했다. 전혀 색다른 일이었기에 망설여졌지만(평소에 공장이라도 가겠다고 외치곤 했는데 그게 말뿐임을 알 것 같았다) 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하기로 맘먹었다. 더욱이 집에서 떠나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이점이었다. 어찌어찌 관계자분을 만나 저녁을 먹으며 면접 아닌 면접을 보고 당연히 쉽게 될 거라는 기대로 어머니에게도 말해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인원이 꽉 찼다는 이유로 연락이 오지 않았고 흐지부지 되었다.
두 번째 실패는 오히려 안도감을 주었다. 전혀 새로운 환경,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게 날 괴롭혔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남에게 이런 도전도 해봤다고 생색내기 위해 그렇게 행동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그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 경험을 통해 나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알 수 있었다.
출판사
운일암반일암에 놀러 갔는데 거기서 뜻밖의 우연을 만난다. 여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보였고, 그 사람은 외국인과 함께 그 자리에 있었다. 당연히 얼핏 봤을 땐 외국인 남자친구와 여행을 온 것처럼 보였기에 말을 걸게 되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어제 전주에서 처음 만났으며 같은 곳을 가게 되었기에 함께 하고 있노라는 전혀 뜻밖의 상황을 알려주더라. 가는 길이 비슷했기에 그 사람들과 전주에 왔고 베테랑에서 밥도 먹었다.
그 때 직업이 출판 편집자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 직업을 갖기 위해 전문자격이나 학력, 경력이 꼭 필요한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건 새로운 길이 열리는 흥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책을 좋아하기에 출판사는 언제고 동경의 대상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곳에 들어가는 요건이 그렇게 까다롭지 않다니, 내게도 희망이 어리는 듯했다. 그런 우연한 만남 후에 본격적으로 출판사로의 도전이 시작되었다.
‘달 출판사’와 ‘바다출판사’로의 도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중에 ‘바다출판사’는 왠지 모르겠지만, (사장님의 마인드가 맘에 들었다) 꼭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자기 소개서를 수정하고 또 수정하여 세 차례에 걸쳐 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보기 좋게 떨어졌다. 에디터에게 최고로 필요한 덕목은 ‘완전무결한 편집’이니, 가장 큰 결격 사유가 됐을 것이다. 간절히 바랐으나 실력이나 맘가짐에서 모든 게 뒷받침되어지지 못했다. 고배를 마시고 나니 무작정 달려들어서는 아무 것도 안 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것 또한 애정으로 맘껏 도전해야 성취하게 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 과정 속에 그린비 편집자와 메일을 주고받게 되었고 그 인연은 ‘수유+너머’로 이어졌다. 늘 그리던 곳이지만 낯선 하늘 아래 쉽사리 적응할 순 없었다.
성미산학교
임용을 그만두면서 대안학교를 아예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 선발되는지 몰랐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 단초 또한 ‘한겨레 신문’에서 얻을 수 있었다. 한겨레 광고판에 난 ‘성미산 학교 교사 모집’ 광고는 나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관련 기록보기). 더욱이 과목의 구분이 없이 ‘길잡이 교사’를 뽑는다는 게 맘에 들었다. 열심히 자소서를 쓰고 대안교육에 관련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려 했다. 하지만 책 내용이 너무도 이론적이며 피상적인 느낌이 들어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수유+너머’의 책장에서 윤구병쌤을 알게 됐고 변산공동체학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썼던 것이다.
그런데 이 때도 보기 좋게 1차 서류전형에서 떨어지고야 말았다. 교육자를 꿈꾸던 사람이 교육현장에서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면서 그 울분은 깊고도 오래 갈 수밖에 없었다.
단재학교
한겨레 신문 광고판에서 교사 모집 광고를 봤다(관련 기록보기). 여긴 이력서만 내라고 되어 있지만, 여러 도전을 통해 느낀 바가 있었기 때문에 약식 자기소개서를 냈다. 이 때의 관점은 자소서만 보고도 ‘이 사람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느낌이 들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게 어떻게 구현되는지는 몰라도, 진심어린 이야기를 담으면 그 글 속에 묻어나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나의 이런 생각들이 받아들여졌는지는 모르지만 면접을 보라는 통지가 왔고 합격통지까지 받게 되었다. 술술 일이 풀려 한달음에 서울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나의 위치가 명확하지 않았고 역곡에 문을 열 단재스쿨의 계획도 삐거덕대기 시작했다. 위태롭다는 불안감을 느끼며 살 수밖에 없었다. 오죽 했으면 포의환향이란 말까지 만들었을까.
하지만 이번의 경우에 난 운이 좋았다. 재영이와 역사공부를 하면서 어느 정도 위치가 명확(관련기록보기)해졌고 『다르다』란 학교 교지를 만들며 나름 편집자가 되려 했던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관련 기록보기).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처음 한 것치고는 그렇게 우왕좌왕하지 않고 해냈다. 그 과정 속에 역곡학교는 와해되고 단재학교에 채용되었다. 그리고 고시원에서 나와 나의 방을 갖기에 이르렀다.
많은 실패를 겪었지만 지금 이 순간 생각해보면 그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지혜롭게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는 역량을 길러줬지 않나 싶다. 단재학교로 나의 첫 직장이 결정되기까지의 과정이 드라마틱하지만 그 속에 메시지도 풍성하기 때문이다.
실패의 경험으로 달려들자
순탄하지 않아서 좋다. 그럼에도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는 게 더욱 좋다. 어제 김근태씨가 돌아가셨다. 이분의 삶이야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그럼에도 죽는 그날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정의 신념을 위해 싸우셨다. 무엇이 그를 고난의 길로 인도했고 그 길을 계속해서 가게 했을까. 그건 ‘무릎 꿇고 사느니 당당하게 서서 죽기 위한’ 의연함이 아니었을까(관련기사보기).
나의 2011년이 어찌 그의 삶에 비길 수 있겠냐만은, 그의 삶은 나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무수히 실패할지라도, 단 한 번의 성공을 위해서는 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에 관한 것이다. 그게 삶이고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이다. 2011년의 경험은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원초적인 것이었다. 이 때의 기억으로 당당하게 2012년을 설계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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