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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방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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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 그거 뭐에 쓰는 건가요?

gunbbang 2010. 8. 21. 11:26

요즘 대학생들 사이에선 ‘스펙’이 화두다. 스펙을 쌓아야 한다느니, 그래선 안 된다느니 설왕설래 하고 있는 거다.

 

스펙이란 원래 어떤 상품의 사양을 말하는 거였다. 상품의 겉만 봐선 어떤 부속품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없기에 그걸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도표화한 것이다. 물건을 사려는 사람은 그것부터 면밀히 살펴보고 자기가 원하는 물건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것이다. 이런 용도로 쓰이던 스펙이란 단어가 사람에게까지 쓰이게 되었다면 이미 사람의 인격성은 거세되고 기계의 한 측면으로만 바라보게 되었다고 생각해도 될 거다. 고로 사람이면 각자의 개성, 특성이 있다는 ‘주체성’은 더 이상 들어설 공간이 없다. 단지 내세울만한 스펙이 있으면 쓰일 수 있고 그걸 넘어서는 스펙의 소유자가 나타나면 여지없이 ‘교환 가능’해진 것이다. 우리가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하며 구식 CPU에 ‘미련’, ‘안타까움’을 가지지 않듯, 우리 또한 그렇게 된 것이다. 결국 스펙이란 용어는 이미 태생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의 타락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게 스펙표다. 나의 가치도 이런 식으로 환산된다고 생각하니 왠지 끔찍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스펙을 쌓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건 기업이 원하는 인간, 사회가 원하는 인간이 되려는 것이다. 진정한 나의 가치는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내고 내가 진정 원하는 일 따위가 뭔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누군가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를 ‘성형’하는 것이다. 토익을 본다, 인턴사원을 한다, 해외에 교환 학생으로 나갔다 온다, 각종 자격증을 딴다 하는 것들 속엔 ‘세상에서 원하니까’, ‘취업에 유리하니까’하는 생각만 들어 있을 뿐, ‘내가 왜 이걸 하는 거지?’ ‘내가 잘 가고 있는 건가?’하는 고민은 없다. 취업에 대한 불안은 점점 우릴 수동적으로 만들고 체념하게 만들었다. 

 

임용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라 해서 나은 게 있냐 하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물론 영어 점수의 유혹, 자격증의 유혹에서 자유로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대학에 들어올 때부터 목표가 뚜렷하다보니 그것 외의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더 이상 야학의 낭만(?)도 없으며, 다양한 경험을 통해 다양한 학생들을 이해하려는 마음도 없다. 단순히 빨리 교사가 되기 위해 ‘죽어라’ 한 우물만 팔 뿐이다. 이들에게 스펙 쌓기란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맞을 수 있는 ‘정답기계’가 되는 것이며 주어진 방식에 따라서만 사고하는 ‘훈육기계’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스펙 쌓기의 본질이 나를 버리고 누군가가 왜 정해 놓은 지도 모르는 기준에 맞춰 나를 재정립하는 것이라 한다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어차피 세상은 내가 사는 것이고, 나를 타인의 기준에 100% 맞추는 것도 불가능할뿐더러, 교환 가능한 기계노릇을 하며 살 수도 없으니까. 그렇게 빈껍데기로 살아가느니 내가 진정 원하던 나의 모습을 그리며 그 일을 하는 가운데 행복을 느끼며 사는 삶이 훨씬 낫겠다. 이런 ‘결단’이 말로만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스펙 사회’의 촘촘한 그물망을 뛰어넘는 자신의 역량과 능력이 필요하다. 그건 스펙이란 단어를 자기 나름대로 재정립하는 데서 시작해야 함은 물론이다.(물론 그런 단어를 아예 안 쓰는 게 제일 좋겠지만, 이미 일상어가 되었다면 사용할지언정 나만의 방식으로 사용해야 한다) 나에게 스펙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나가는 데서 얻는 깨달음과 노하우이다’라고 말이다. 각자의 정의는 각자의 기준과 나가고자 하는 방향대로 해보길. 그러므로 우리의 고민은 스펙을 쌓아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과연 난 누구인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어떤 일을 어떻게 하며 살고 싶은가? 하는 고민이 선행되어야 하는 거다. 그런 고민을 통해 나의 길을 알게 되었을 때, 난 더 이상 교환 가능한 ‘기계’가 아니라 나만의 존재 이유와 존재 가치가 ‘활발발’하게 흘러넘치는 ‘주체’가 될 수 있으리라.

 

일찍이 조선 후기 학자 이덕무는 《耳目口心書》에서 “시인, 운사가 아름다운 때, 좋은 경치를 대하면 시를 쓰는 어깨에선 산이 솟아오르고, 읊던 눈동자엔 물결이 일어나며, 어금니와 뺨에선 향기가 나고 입과 입술에선 꽃이 핀다. (騷人韻士, 佳辰美景, 詩肩聳山, 吟眸漾波, 牙頰生香, 口吻開花.)”라고 했다. 어찌 이 말이 시인과 운사에게만 쓰일 수 있는 말일까 보랴. 이 말이야말로 자신을 위한 스펙을 쌓으며 오늘 하루 신나게 살고 있는 이에게 쓸 수 있는 말일 거니까. ‘자신의 길을 가며 그 일 속에서 스펙을 쌓으며 하루 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깨에선 산이 치솟고, 눈동자엔 파도가 치며, 어금니와 뺨에선 향기가 나고 입과 입술에선 꽃이 핀다’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