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방랑자
라이온킹, 폼포코너구리 대작전 - 인간의 눈을 벗어나 四海의 눈으로 본문
1. 라이온킹과 너구리 대작전의 관계
'라이온킹'과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의 공통점은 동물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그 차이점은 명확하다. 라이온 킹의 심바는 어딜 봐도 라이온이다. 당연한 말을 너무 당연하지 않게 하는 거 아니냐고? 전혀 그렇지 않다. 여기에선 직립 보행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으르렁 거리며 위협적인 자세를 취한다. 비록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지만 행동 하나 하나는 지극히 동물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라이온킹을 보면서 어렵지 않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으며, 보게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게 라이온인지, 인간인지마저도 헷갈리게 된다. 그만큼 '지극히 인간화 된' 라이온의 이야기라는 거다. 하지만 대작전에서의 너구리는 정확히 그 반대다. 인간처럼 직립 보행을 할 뿐 아니라 인간처럼 행동한다. 그럼에도 우린 그들에게 인간의 탈을 덧씌우지 못한다. 그만큼 '인간의 탈만 쓴' 너구리의 이야기이니 말이다. 이 차이는 두 애니메이션을 극명하게 갈라놓는다. 전자의 라이온은 인간의 대용물로 쓰인 소재에 불과한데 반해 후자의 너구리는 재미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인간처럼 행동하지만 실제적으로 그들의 속내를 토로하는 주체이니 말이다. 그런 차이점 때문에 라이온 킹을 보고나면 '사랑', '권선징악' 따위의 교훈적인 메시지가 떠오르는 것이고 너구리 대작전을 보고나면 '환경', '공생' 등의 좀 폭넓은 메시지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2. 너구리 대작전의 감상평
여기에선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의 감상평을 이야기하기로 하자(솔직히 라이온킹을 어렸을 땐 재밌게 봤지만, 지금 다시 보니 그래픽이 좋다는 것 외에 그다지 재미는 없었다). 대작전을 보는 내내 그 기발한 표현력과 상상력에 웃음이 나와 죽는 줄 알았다. 여기에 나오는 너구리들은 직립보행을 하고 인간의 말을 쓰며 대단한 변신을 할 줄 안다. 그럼에도 그들의 주제는 변함없이 한 가지만을 전한다. '자연을 파괴하여 자신들의 생활 영토를 없애지 말라' 자신의 생활 터전을 파괴하고 새로운 집들을 건설하는 인간들과 그걸 막으려는 너구리들의 한 판 대결이 멋있게, 신나게 그려지고 있다. 처음에 잠깐 보았을 땐, 적잖게 실망했었다. 강경파인 곤타의 쿠데다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총을 꺼내며 쿠데타를 하고 있는 그 장면만 보고 너구리 이야기가 아니라, 라이온 킹처럼 인간의 이야기를 대신 해주는 존재로 너구리가 등장하는 거군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장면만으로 전체를 속단할 순 없는 법. 더욱이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만들었고,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라는 책의 소개를 받아 보게 된 것이기 때문에 그 기대감으로 보게 되었다.
보는 내내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역시 처음에 실망한 것은 잘 모르기 때문에 한 것일 뿐이다. 지금까지 본 지브리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내레이션이 중간 중간 나와 사건의 흐름을 이야기 해주며, 간혹 노래를 통해 그들의 흥분과 감격을 보여주곤 했다. 이런 전개상의 차이점을 빼고 나면, 이 애니 또한 기존 애니처럼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해준다.
3. 나약함을 정복욕으로 치환한 사람이란 존재
이 애니를 보면서 계속 곱씹어보게 된 건, 인간의 나약함, 그걸 숨기기 위한 허위, 가식, 그리고 거만이었으며 자기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폭력이었다. 자연파괴가 바로 그 극단적인 행동이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이성과 인간우월의 상징인 에보시가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슴신을 굳이 죽이고자 하는 것,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에서 도르메키아 공화국이 부해를 태워버림으로 자신들의 승리를 쟁취하려 하는 것 따위가 인간의 거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들이다(그런 행동의 기저엔 자연에 대한 두려움, 즉 죽음의 공포가 숨어있다). 자연을 정복하고 굴복시켜가면서 인간은 자아도취감에 빠질 것이다. 세계의 신이 인간을 위해 천지만물을 만들었고 그것들을 인간이 이용하며 사는 건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는 착각. 그런데 과연 지구가 인간만의 것인가? 하나의 신을 닮은 인간만이 이성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세상을 자기 맘대로 살아갈 수 있고, 그 외 나머지 것들, 심지어 동물마저도 생각과 의지 없이 짜여진 각본처럼 인간만을 위해 살아간다는 말인가? 이와 같은 인간 중심의 사고는 신마저도 자기의 편의나 구미에 맞게 편협적인 인간을 위한 객체로 만들어 버렸다.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가 되었을 때 너구리들의 다음 말처럼 그는 세상의 유일신처럼 막강한 존재였다. "야아! 사람이란 대단하군요. 여지껏 우리와 같은 동물의 일종인 줄 알았는데 이번 일로 하느님이나 부처님 같은 힘이 있다는 걸 잘 알았어요." 하지만 인간은 동시에 유일신처럼 고독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와 대화를 나누어줄 자연은 사라지고 없다.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127p
공존의 관계 속에서 서로의 피해를 최소화하려 하던 인간은 이성이 만고의 진리이며 최고의 가치임을 자랑하며 자연과 동물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신 앞에 엎드린 존재, 하지만 자연 앞에선 우뚝 선 존재라는 아이러니를 지닌 채, 신에게 위임 받았다는 전권을 맘껏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전근대인들은 사냥을 하고나서 그 짐승들의 명복을 빌고, 그걸 먹고 살다가 자신이 죽고나면 결국 땅 속에 묻혀 그 액을 꽃들이 마시고 자라는 '자연의 순환'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자연을 정복한 근대인들은 더 이상 명복을 빌지 않는다. 오히려 잡아먹을 목적으로 대량사육하며 짐승들에 대한 배려는 일절 없이 빨리 자라게 하려 성장촉진체 등의 약물을 먹인다. 도살장이란 곳에서 그렇게 자란 짐승은 어떤 생명의 존귀함 따위는 없이 한 덩어리의 고기로 변모하는 것이다. 이제 인간에게 대적할만한 적수는 없다. 자연을 정복했고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들을 정복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 인간은 성취감, 승리감에 빠져들기보다 '고독'과 '외로움'을 느낀다. 자연과 감응하고 그 안에서 공존의 생명력을 누릴 수 있었던 인간이, 자연을 철저히 타자화하고 그걸 딛고 일어선 순간 광야의 모래바람에 홀로 노출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자연과의 감응 능력을 잃었으니 자연과의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서도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쯤 되어 생각해보면 신이 했다던 노아방주 사건이랄지, 열 가지 재앙 사건들은 홀로 외로이 선자의 심심풀이 장난으로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자신이 직접 만들고 자신이 직접 허물어 버리는 것은 아이들의 모래성 쌓기 놀이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절대적인 힘으로 자연을 굴복시키고 우뚝 선 인간은, 정말 자연을 굴복시킨 것일까? 표면적으론 이 말에 의심할 여지는 없다. 지금도 우리 학교 주변에선 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니까. 그 드넓던 공간들이 사라지고 신도시 계획에 맞게 구획되고 다듬어진다(매끄러운 공간이 홈파인 공간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이곳에 살던 수많은 것들은 자기의 주거에 대한 권리 주장을 할 겨를도 없이 자기의 주거 공간을 일순간에 빼앗겼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했다. 바로 인간의 이성과 편협함이 만든 광기의 광경이다. 하지만 인간이 그렇게 철저히 대비하고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계획을 세워 신과 같은 전권을 휘두른다 해도 자연에 포함된 동물에 불과함을 잊지 말라. 태풍, 허리케인, 쓰나미 등의 자연의 반란 앞에 힘없이 무너져 내리니 말이다.
자연의 눈, 너구리의 눈으로 보면 근대 인간은 자연을 갉아 먹는 벌레인지도 모른다. 영화가 처음에 벌레처럼 산을 갉아먹는 포크레인들을 보여주는 것도 근대 인간을 바라보는 자연의 시선을 드러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자연은 인간보다 훨씬 더 큰 지성에 의해 움직인다는 말이 있다. 만약 자연에게 지성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이성을 하나의 광기로 파악할 것이다. 미친 듯이 자연을 파먹고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정신 나간 벌레가 자연의 눈에 비친 인간의 모습은 아닐까? 그 때문인지 늙은 너구리인 오로우 할멈은 인간의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민둥산 언덕을 가리켜 '광기의 언덕'이라고 불렀다.
▲ 인간의 개발 행위를 나뭇잎 갉아 먹는 벌레로 치환했다. 대단한 상상력이다.
이성을 내세우며 절대자를 자임했던 인간이 자연 앞에 나약하게 무너지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과연 인간이 자연을 정복한 것인가? 자연이 그 넓은 가슴으로 인간의 철없는 행동을 오냐 오냐 받아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분명한 것은 자연이 봤을 때 우리들의 모습이나 행동 또한 좀 별난 짐승의 그것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기선 '풀잎을 갉아먹는 포크레인'들의 모습을 통해 그런 자연의 시각을 드러낸다. 우리에게 있어서 손 위에 놓인 개미는 날고 기어봤자 손 위에 놓인 하찮은 생명체이듯이, 자연에게 있어서 인간은 아무리 파괴하고 정복했다고 자아도취감에 빠져있어봤자 한 번의 기상 이변에 맥을 못 추스르는 하찮은 생명체에 불과하다. 이런 현실을 뼈저리게 반복적으로 체험하면서도 계속해서 자연을 닦달하고 착취하며 자신의 소유물처럼 대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4. 이성이란 양날의 검, 합리적 판단과 무의식적 불안
그렇다. 이미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읽어왔다면, 그 해답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理性'이 그런 착취와 정복 논리를 가능케 하는 근본인 셈이다. 인간만이 생각하고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런 능력을 지니지 않은 것들을 다스릴 권리를 가진다. 그 이성이란 게 신이 인간을 특별히 사랑하사 내려준 특권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게 가능한 것이다. 그 이성으로 근대가 건설되고 이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 이성이란 게, 우리가 생각하는 그대로 얼마나 우월적인 것이며 얼마나 합리적인 것인지는 회의가 든다. 우린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사실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건 흔히 착시 현상이나 착각 등으로 불려진다. 하지만 그걸 직접 체험한 사람은 그걸 사실이라고 믿는다. 바로 여기에 우리 이성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성이 객관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한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어떤 진리를 포착해낼 수 있다고 이성을 칭찬하는 것일까? 그건 '角者無齒‘라는 성어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짐승들에겐 각자의 생존 방식에 맞게 특별히 발달된 부분들이 있다. 코가 발달한 코끼리, 목이 발달된 기린, 색을 바꿀 수 있는 도마뱀, 뿔로 위협할 수 있는 코뿔소 등에 비하면 인간은 참으로 나약하고 보잘 것 없다. 그런 인간에게도 무언가 내세울 만한 게 필요했을 것이고 그걸 극대화하다보니 ’이성의 우월성‘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특별한 것으로 보고자 했던 이성이 한낱 사실과 환상, 착각조차도 구별하지 못하는 실패품이지 않은가. 더욱이 두려움, 걱정, 후회, 강박증 등의 부작용을 야기하기도 한다는 걸 간과해선 안 된다.
▲ 요괴퍼레이드, 환상과 현실 그 사이~ 이성의 한계를 폭로하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요괴퍼레이드를 준비하면서 장로는 “고등과학의 합리적 해석도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없다고 깨달았을 때, 갑자기 인간들은 삼라만상의 신비에 놀라 이처럼 인간이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걸 깨닫는다.” 라고 말한다. 너구리의 요괴퍼레이드는 실제 하는 현상이다. 그렇기에 그걸 본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보지 못한 이들은 그게 착각, 환상에 의한 것으로 집단적인 히스테리로 분석할 것이다. 그렇게 인간의 우월성으로 내세웠던 이성마저도 우리의 한낱 희망에 불과한 어떤 것쯤으로 의미가 퇴색되었다. 이런 상황에 이르면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인간의 허약함, 가식이 여지없이 드러났으나 그로인해 주저앉아 버리거나, 아예 애초에 논했던 인간의 우월성 자체가 허무하다는 결론에 이른 것을 알고 새로운 활로를 개척해 나가거나 할 것이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5. 手之舞之 足之跳之
이 애니를 보는 내내 유쾌했다고 앞에서부터 계속 말했었다. 물론 너구리의 그 모습이 재밌고 웃기기도 했지만 극을 전개해나가는 과정 과정들이 유머의 극치였다. 이들은 무얼하든 심각해지지 않는다. 이미 노래와 춤, 그리고 본능에 대한 감각이 활발발하게 타오르고 있기 때문에 일이 곧 놀이이며 삶이 곧 놀이이다.
▲ 너구리들은 즐거움을 만끽할 줄 안다. 놀이하는 너구리~
‘호모루덴스(놀이하는 인간)’, 우린 바로 너구리와 같은 그런 여유와 감응력, 그리고 감성을 되찾음으로 우리가 자초했던 이성 우월주의의 외로움과 거만에서 벗어나 새로운 신체를 구성할 수 있다. 이쯤에서 내가 다소 회의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았던 쿠데타 장면으로 되돌아가 보자.
▲ 쿠데타! 근데 긴장은 온데 간데 없고 웃음이 난무한다.^^
“강경파 곤타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도 상황은 우습게 흘러간다.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는 비장한 선언은 ‘우리는 쥐가 아니야’, ‘고양이를 물어봐야 소용없잖아.’ ,‘쥐라고? 요즘 쥐를 먹어보지 못했구만...’, ‘쥐는 무침 튀김이 제일이라고..’, ‘아냐, 그냥 튀김이 최고야’, ‘난 밀가루 무친 게 더 좋은데’ , ‘그 바삭바삭한 튀김..’, 심지어 쿠데타의 장본인인 곤타까지 ‘무슨 말들이야? 너희들! 난 쥐튀김이 제일이라고! 호이호이!!’ 라고 말한다.” 내가 처음에 실망했다고 말한 부분은 곤타가 총을 들이밀고 ‘쿠데다’라고 외치며 이어 진압군이 등장하는 장면까지였다. 그 장면까지는 비장미와 살기가 잔뜩 느껴진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 순간 곤타가 속담을 인용하면서 ‘쿠데타’는 ‘놀이’로 탈주선을 타고 곧 쿠데타의 장본인인 곤타마저 동참하면서 하나의 해프닝으로 마무리 지어진다. 이렇게 상황마저도 반전시킬 수 있는 유연한 신체와 정신이 이 애니에 웃음을 유발시키는 코드다. 심지어 쿠데타라는 극도의 긴장과 공포마저도 녹여버릴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걸 안다 해도 잃어버린 자연과의 감응력과 우연한 감성, 유머력을 되찾는다는 건 힘들다. 신체적인 활동이라면 끊임없이 연마하면 될 테지만, 정신작용이니 이건 바꾼다고 쉽사리 바뀌지 않는 구속력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레 포기할 일은 아니다. 그 가능성을 알았다면 방법을 통해 실천해보는 수밖에 달리 생각할 건 없다. “연신 드링크제까지 마셔가면서 노동하는 근대인들을 낯설게 만드는 너구리의 시선, 사실 너구리는 우리들 생활에 낯설어진 우리들 자신의 시선인지도 모른다. 우리 안에 있는 우리의 타자. ‘대부분은 심한 스트레스를 못 견뎌 몸이 약해서 산으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정말이지 인간들은 잘도 이런 생활을 견뎌내는구나 하고 감탄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너구리들은 인간에 굴복한다. 그래서 변신할 수 있는 너구리들은 인간으로 변신해서 인간처럼 살아가고 그렇지 못한 너구리들은 쓰레기통을 뒤적이며 쥐처럼 살아간다. 그런 상황 속에서 위의 이야기는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 너구리가 한 말이다. 솔직히 그 독백을 대했을 때 ‘완전한 변이를 이루지 못하고 여전히 너구리 상태에만 머물러 있구나’하고 생각했다. 너구리의 부적응 자체만을 탓했을 뿐, 거기에 감정이입을 하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독백은 현대인들의 '일중심적인 생활'을 비꼬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드링크제를 마셔가며 밤늦도록 일하고 숙취제까지 마셔가며 과음을 하고 휴가를 보내는 것 또한 일처럼 한다. 놀이를 상실한 인간은 어느 것 하나 일 아닌 게 없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마지못해 하는 일들의 연속 속에 살아간다.
영화 속에서 너구리들은 결국 사람으로 '변신'해서 살아가지만 그것은 '변신'이라기보다는 '적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변신이 놀이였다면 적응은 노동이다. 어떤 즐거움도 없는 변신이 바로 적응이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샐러리맨, 스낵 점원, 심지어 삼림 개발을 하는 사업가라도 변신해야 한다. '擬態'보다 더 나쁜 것이 있다면 '적응'일 것이다. 그것은 길들여지는 것이고 굴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변신이 적응이 되느냐, 의태가 되느냐는 순전히 나한테 달린 문제다.
내가 최초에 변이를 생각했던 건 어휘의 제대로 된 의미를 몰랐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적응하며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 대한 비판이지 않은가. 사회가 원하는 신체가 되기 위해 '취업고시', '면접'을 준비하며 철저히 나 자신마자도 타인이 바라는 모습으로 탈바꿈시킨다.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보니, 늘 열심히 살면서도 '산으로 돌아가고 싶'을 수밖에 없다. 이젠 돌아가자. 더 이상 심각해 하지도, 더 이상 어떤 책임감이나 소명 의식 따위로 나의 신체를 짓누르지 말자. 자연에 감응하고 유머를 회복하며 맘껏 기쁨과 행복에 몸을 흔들 수 있는 놀이하는 인간이 되자.
▲ 노는 기질이 없다면 너구리는 더 이상 너구리가 아니다.
너구리들은 '노는 기질이 없다면 너구리는 더 이상 너구리가 아니다'라고 자신을 규정한다. 그런 규정은 우리들에게도 유효하리라 본다. 그렇게 생의 에너지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치환할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행복으로 사랑해야 할 것이다.
6.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이 되찾아야 할 것
인간의 시각으로 자연을 재단하여선 안 된다. 자연의 눈에서 보면 인간 또한 왜소한 존재임을 늘 상기하며 '자연 속의 인간'으로서 그 안에서 맘껏 즐겨보자. 그럴 때 더 이상 외로움이나 고민은 없을 것이다. 내 곁에 늘상 있어온 수많은 것들이 나에게 대화를 걸어오고 위로해 줄 것이니까. 그런 상호작용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했을 때 '변이'와 '탈주', 바로 웃음을 기본으로 한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여전히 '적응'과 '변신' 사이의 명확한 선을 긋는데 실패했지만, 조금씩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적응'의 주체는 타인이기에 그것에 맞추어 나의 호불호를 묻지 않고 맹목적으로 바꾸는 것인데 반해. '변신'의 주체는 자신이기 때문에 그 변신의 강도나 방향을 내가 정할 수 있어서 능동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전자는 '노동'이 되고 오래될수록 생의 에너지가 소진되는데 반해 후자는 '놀이'가 되고 지속될수록 삶의 에너지가 충만해진다. 그렇게 충만해진 에너지로 맘껏 누빈다면 그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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