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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방랑자

우치다 타츠루 서울 강연 - 혼자서도 가능한 교육 혁명 본문

후기/[후기]강의

우치다 타츠루 서울 강연 - 혼자서도 가능한 교육 혁명

gunbbang 2012. 8. 16. 12:08

1. 초대

 

단재 가족의 8월16일(목) 우치다 타츠루의 강연 참석을 권합니다.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이 방한하여 강연하는데 단재학교 김승태 선생님의 공이 컸습니다.

그의 첫 한국 번역책 『하류지향』 이 처음 인연이지만, 직접 전화통화를 하고 블로그와 트위터를 검색해서 연락을 시도한 것은 김승태 선생님입니다. 김승태 선생님의 컨택으로 박준규가 일본에 가서 인터뷰도 하고, 그것을 글로 엮어서 민들레 82호(다음 주 발송)에 싣기도 했습니다.

단재학교가 왜 우치다 타츠루를 중요하게 생각하냐면, 그의 생각에 우리가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입니다.

첫째, 배움(학습이나 공부라고 표현해도 무방 ; 수능공부같은 입시공부도 마찬가지)은 철저히 배우는 자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배우는 행위는 기부(寄附)와 같은 성격입니다. '배워서 남주자' 슬로건을 인정할 때만 공부가 가능합니다. 이것은 학습의 사회적 책무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공부의 궁극적인 성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단재는 위 두 가지에 대해 적극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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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 오후 3시에 박준규 선생이 진행하는 "한국 교육의 현주소"  주제 간담회가 있습니다.

우치다 선생님, 통역 박동섭 교수, 김승태 선생님, 안승문 서울시교육감 정책특보, 최영란 이화여대 객원교수, 김규항 고래가그랬어 발행인, 유승준 교사, 남궁영미 수녀(전 한늘지기 꿈터 대표), 송인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대표, 신호승 대안교육학부모연대 교육팀장, 현병호 민들레 발행인, 김경옥 대안교육연대 대표, 단재학교 학부모님을 간담회 패널로 모시고 진행합니다.

 

누구든 참석 가능하지만 패널 외에는 옵저버로 오시는 것입니다. 이 간담회에도 학부모님 참석을 권합니다.(*단재 학부모님은 패널로 초대합니다. 참석하시는 분은 사전에 말씀해주세요)

장소는 하자센터 신관 1층 허브카페입니다.(끝)

 

 

2. 이향 아빠(단재학교 학부모) 후기

 

 

 

3. crack79(민들레 카페) 후기

 

3개월간의 민들레 독자 특별호 만들기가 끝났습니다.

마지막1개월은 배가 산더미같이 불러 제대로 교집합 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쉽습니다.

잡지라는것, 게다가 애정을 같고 봐왔던 책을 직접 좋아하는 분들과 메이킹 한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댓가 없는 노동에 대한 애정을 새삼 확인했습니다.^^

 

 

 

시작은 몇년전 한 독자분의 지나가는 말처럼 시작되었다 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디어는 우치다라는 스승을 만나 구체화 되기 시작했습니다.

우치다 타츠루!!!

멀고도 가까운 나라 일본에 계신 스승의 책을 보고 우린 감동했습니다.^^ (스승이라고 막 말합니다.)

뭔가 잘못흐르고 있다는 모호한 감정의 어리둥절함에 선명한 혜안으로 명쾌하게 쓰인 글들이 뿌연 안개속의 한줄기 빛이 되는!!! 깜짝놀랄 경험을 우리에게 선사해 주셨습니다.

처음은 하류지향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무한경쟁시대,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아이들, 무엇보다 지금 자신들에게 실망하고 답답해하는 시점에서 하류지향은 투명한 울림을 주었습니다.

떽!! 그러면 안돼!!하고 말입니다.

이제 서로를 보기 힘들 정도로 실망한 시대는 쳇 이렇게 될 바에는 나라도 잘살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사실은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 사회일지도, 또는 시스템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여하튼 강요된 선택이든, 생각이든 점점 개인주의를 넘어 이기주의가 당연한 것이 되고 있는 시대에 단호히 아니!! 라고 말하는 우치다 선생님의 글은 설렘을 갖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우치다라는 스승에 대해 말입니다.

푸코,바르트,레비스트로스,라캉쉽게 읽기

-절대 쉽지 않았습니다!!! 구조주의에 대한 잘못된 정보와 막연한 환상은 헛된 지적놀음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사회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도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세상이란 과연 나를 생각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성찰까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래도 훗 나는 구조주의 읽은 여자야! 라는 생각을 하는 것으로 위로를......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일자

- 막연한 마르크스에 대한 그릇된 편견에서 벗어나 따뜻한 동정심을 품고 사회문제에 뛰어들었던 뜨거운 청년 마르크스의 열정에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저 빨갱이, 좌파, 공산주의 등등 잘 알지도 못했던 이념 어들의 남발 속에서 사실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 고마운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참 똑똑한 사람이었구나....하는......천재는 못 말려....같은.....

여하튼 앞으로도 읽을 책을 무궁합니다.

50이라는 불혹의 나이를 넘기고 데뷔한 우치다선생은 이제 63세이신데, 벌써 책이 70권이 넘으셨다 합니다.

뭔 할 말이 그렇게 많은 건가 싶은 생각도 들다가도 일본에서 책이 완성되는 과정을 보니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강연을 발췌해 쓰기도 하고 작가는 말하고 글은 다른 사람이 쓰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여하튼 앞으로 읽을 우치다 선생의 책이 쌓여있다라는 말입니다.

참 즐거운 도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치다 선생을 책으로 만났고 그리고 드디어 함께 점심을 먹는!!!!

놀라운 경험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얼마나 서프라이즈한지!!!

트위터를 통해 선생과 소통을 하고 그 가느다란 끈을 잡고 메일을 주고받고 우리의 책읽기 모임을 소개하고 민들레라는 출판사를 통해 한국으로 초대한 과정까지!!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선생의 팬들의 노력의 결실입니다.

한국의 우치다 빠순이 빠돌이들의 팬심이란~~~ㅎㅎ

우치다 선생은 멋진 분이셨습니다...

63세라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습니다.

훈남이셨던 것입니다!!!!!

어찌하여 글도 잘 쓰시는 분이 훈훈하기 까지!!!

식사를 하며 어색한 첫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자상한 웃음과 친절한 말씀으로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궁금했던 이야기들을 조금씩 질문하면 잠시 생각하셨다 천천히 예를 들어가며 설명해주시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피곤했음이 분명한 서울나들이에서 끝까지 진지하고 자상한 모습은 스승은 있구나 하는 놀라운 경험을 안겨주었습니다.

마지막 하자센터에서 저녁7시부터 시작한 대중강연을 못내 참석하지 못했던 것이 너무나 슬펐습니다.

그러나 뱃속의 아기와 저는 이미 녹초가 되어 푹꺼진 눈을 겨우 뜨고 멀고먼 집으로 향했더랍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선 우치다 선생의 훈남미소가 도대체 잊히지 않았다는....ㅎㅎ

언행일치가 무엇인지...얼마나 어렵고 보기 힘든 일인지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흔을 고민하고 두려워하는 세대에게, 늙음의 죄를 사죄해야하는 이 시대에 스승의 있음이 정말 희망으로 와 닿았습니다.

 

 

4. 별나들이님(민들레카페) 후기

한국어와 일본어. 8월 16일 7시부터 진행된 강연에서 사용된 말은 두 가지였다.
구불구불한 숲속 오솔길 두 개가 나란히 놓였고, 청중들은 자신이 밟고 걸어가고 싶은 길을 고르면 되었다.

우치다 선생님은 모두에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운을 뗐고, 청중들은 흥미있게 그를 바라보았다.

<하류지향> <사가판 유대문화론>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마르크스에게서 20대의 열정을 배우다) >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 <스승은 있다> 등을 읽은 독자 혹은 예비독자들은 종이 위에

활자를 벗어나 2012년 8월 16일 같은 장소에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의 강연을 듣기 위해 모였다.

공중에 흩뿌려진 말과 소리를 뒤쫓아서 보이지 않는 길 위에 여행을 재촉하는 선생님을 따라나섰다.

 

나는 내 눈을 가리고 싶었다. (이건, 이미지적인 이야기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니, 저 선생님께 무언가 꼭 배워내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가진 채 여행길을 시작해버리면, 되려 선생님의 말을 쫓아가다가 길을 잃을 것만

같서다. 나는 두려움을 지우기 위해 눈을 가린 채 나의 감각 중 어느 한 부분을 종료시켰다.

 

내가 따라간 이야기길은 띄엄띄엄 길이 끊어져 있을 것이다. 모르는 것은 이가 빠진 채 건너뛰고서 천천히 다시 메꿀 생각.

하지만, 공사가 마무리 될 때까지 나는 기다릴 수가 없다. 그 시간에 내게 온 감각들을 계속 지속시키기엔 나의 힘이 아직

미약하기 때문에 나는 그 날의 감각들을 꺼내어 이렇게 끊어지고, 삐뚤빼뚤한 길이 되게끔 하고 있다. 초라한 기록이지만,

나만이(나만은) 알아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 기록들을 낯선 이에게 여과없이 보여줄 것이다. 낯선 이가 길을 짐작해서

자신만의 감각으로 걸어가 볼 수 있도록 말이다. 이게 그 날, 우치다 선생님께 배운 것 중 하나다.

 

 


# 공격적인 언어에 대하여

 

한국, 중국과 영토분쟁 중인 일본. 일본인으로서 우치다 선생님이 영토분쟁에 다른 의견을 인터넷 상에 유포했을 때

어마어마하게 되돌아 올 공격성 발언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되었습니다. 공격언어의 특징은 1) 개체 식별이

되지 않는다. 2)언어구사방식이 비슷하다. 일본에서는 아이디와 별명 모두를 무명씨로 기재하는 사람들이 많이 가입되어

있는 사이트일수록 공격성 발언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이름없는 사람들이 쏟아내는 말, 그 안에서 공격성을 많이 목격할 수

있다고. 그래서, 선생님은 공격성에 관심을 갖게 되셨다고 합니다.

 

 

"오직 나만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나 밖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면..." 어떤 식으로 말을 구사하게 될까?
아마도 '천천히' '정중하게' '클리어하게'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비유하면서' '노력하면서' 듣고
있는 청자에게 말이 가닿도록 얘기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언어의 특징은 고유의 이름과 신체를 가지고
있다. 일례로 영토분쟁에 대한 나의 발언(가상상황)을 두고 똑같이 공격적인 말을 하는 몇 십만명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은 '당신 말은 잘못되었다'라고 수없이 말은 하지만, 누구도 "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누군가 해주겠지~, 역사에 밝은 사람이나 국제법에 밝은 사람이거나 논리적인 누군가... 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하는 말은 아무리 단순한 단어여도 '무'(상관없다!). 단지, '바보야!'만
단순하게 반복하더라도 불충분한 것은 누군가 대신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치다 선생님은 이런 류의 공격적인 말을 대단히 위험하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타인이 얘기해 주리라 여기는 것은 내 의견에 지지자가 많다는 것이 아니다.

그건, 내가 없어도(사라져도) 된다는 생각이다. 수없는 사람들 속에 하나로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하겠지!"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다. 고유의 이름을 대지 않고, 누군가 이미 하고 있는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자기 고유성(존재성)에 상처를 내는 일이다. 이런 말은 뱉을수록 자신을 공허하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이 알아채고 만 사회적인 무력감과 힘없음, 이런 느낌을 잊기 위해 더욱 폭력적인 태도를 취하고 만다.

 

선생님은 물건 하나를 창조해 내는 힘을 가진 사람에게는 고유성이 있고, 신체도 있어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돌멩이(공격)를 던지는 것은 멀리서 여럿 중에 하나가 되는 익명성을 가져도 관계없지만, 물건 하나 창조하는
일은 그와 다르다고. 이때, 그 하나를 창조해내는 힘은 100개를 파괴하는 힘과 맞먹는다고도 하셨습니다.
익명성의 방패 뒤에서 돌을 던진 사람은 자신이 아니어도 된다고 여기는 무력감 때문에 더 크게 파괴하게
되고, 점점 자기 존재 이유를 줄어들도록 만드는 악순환이 반복되는데, 이것이 인터넷 상의 무력화라고.
이렇게 무력화되는 일이 지금 전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데, 얼굴도 이름도 신체도 없는 '나'는 어떤 시스템
에서 생겨난 걸까? 이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는 있을까?를 자문하면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습니다.

 

 


# 공동체와 교육

 

어느 나라에서든 요즘 글로벌 사회에 적응할 것을 주장하고, 권고하고 있는데, (정치/사회/경제 등)
이 주장 안에는 한 나라가 자국민을 위해 하는 이야기가 들어있지 않다. 대개가 국제경쟁력을 제고하려는

이야기 일뿐이다. 사람(국민)이 어떻게 먹고 사느냐가 아니라, 오로지 국제경쟁력을 높이는 데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우치다 선생님은 일본인으로 자국 입장에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습니다다.

 

자동차, 전기/전자, 바이오, 항공 등 경쟁력이 높은 분야를 지원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국제경쟁력이 떨어지는
임업,농업,수산업 등의 자원과 에너지를 가져가버린다. 그리고, 경쟁력 있는 분야에서 투자하고, 수익을 얻어
국내로 돈이 들어오면 그 돈으로 나눠 먹고 사는 식이다.

(*트리클 다운 이론/ Trickle-down economics: 대기업의 성장을 장려하면 중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중소기업과

소비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서 총체적으로 경기가 부흥한다는 경제이론이다. trickle은 영어로 '어떠한 액체

등이 떨어지다. 흘러내리다' 등의 뜻을 갖는 단어인데, 'trickle down'이라고 하면 관용적으로 '흘러내린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이것은 경제용어로 쓰여서 대기업이나 부유층의 부의 상승이라고 할 수 있는 넘쳐흐르는 물이

중소기업이나 서민층을 상징하는 바닥까지 적신다는 뜻을 갖는다.-위키백과 참조-)

 

하지만, 되돌아와서 환원된 가치들이 국민경제를 위해 쓰인다는 믿음은 지난 리먼 사태 때 알려졌다시피, 소수에게만

나눠질 뿐이다.

 

 

잠깐의 예_도요타 CEO) "2012년 1월부터 국내에서 매년 생산해왔던 자동차 300만대 가동을 중단하겠다"

왜? 일본은 제조비용이 높다. 인건비, 제조단가, 전력비용, 규제까지도 너무 높다. 그래서, 생산거점을 옮기겠다.
역대 CEO들은 "국민경제를 위해"라는 가치를 내걸고, 자국 생산을 통해 국내 국민을 고용, 임금지불, 세금납부,
지역경제 창출 등의 역할을 해왔다. 지금, 국내생산 중단 발표는 대주주 비율에 해외투자자가 많기 때문이다.
즉, 토요타는 일본 경제와 관계를 유지하는 비용으로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할 수 있지만, 외국인 투자자들에게는
소모적인 일일 뿐인 것이다.

 

잠깐의 예_유니클로 CEO) "사내에서 공용어 사용은 영어로 하겠다, 영어를 못한다면 고용기회를 얻을 수 없다"


에전 책임감있게 수행되었던자원의 환원/환류는 일정 부분에서 양극화를 멈추고, 자원의 배분을 도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본기업이 자기 나라에 환원하지 않겠다면 말이다. 후쿠시마 핵 발전소를 다시 가동하도록 일본 정부를

압박해놓고도 만약, 원전 사태가 발생한다면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라를 버릴 기업도 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이제, 다국적 기업은 다국이 아니라, 무국적 기업이 아닌가? 국가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우치다 선생님은 1)의 도요타가 일본의 기업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2)의 유니클로 발언 역시 말이 안되는 이상한
일이라고 여기셨답니다. 하지만, 주변 누구도 그같은 일을 두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이것이야말로 이상이 있는 것

이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다른 예로 국가위원회에 속한 한 인물이 인구가 줄어들고 있으니, 대학의 수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 했습니다.

 

인구 감소를 이유로 대학의 숫자를 줄이는 건 언뜻 들어보면, 합리적인 방식같다. 생각해 보자면, 이 말은 국민의
취학기회를 줄여서, 값싼 노동력으로 사회에 내보내겠다는 의도와 같은 말이다. 일본의 학력수준이 내려가는 일,
이것은 일본 국가에게는 도움되지 않는 일이지만, 기업에게는 낮은 인건비(어쩌면 중국보다 값싸게)로 고용할 수
있어 이득되는 일이다. 값싼 인건비를 쫓아 사회간접자본이 부족한 국가에서 도리어 고비용 생산라인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글로벌 기업의 딜레마: 일본->중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아프리카 어느 나라까지 이동하는.)

즉, 일본 전체가 가난해지면 기업이 일본에서 최고이익을 낼 수 있다는... 이런 악랄한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것.

물론, 그러길 바라진 않는다.

 

 

# 규격화=교체가능성

 

앞서 말했던 인터넷 상의 익명성은 '너를 대체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로 풀이된다. 요즘 일본에서 취업을 앞둔
대학생들은 서로를 닮기 위해 노력 중에 있다. 눈에 띄면(튀면) 튕겨나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용기회를 갖기
위해서 닮아가려고 하는데, 정작 이런 노력은 반대의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우치다 선생님은 바로 이런 부분이 [젊은이의 총체적인 규격화다]라고 지적하는 한편, 자신은 다국적 기업이
돈을 많이 버는 일에는 상관하지 않지만, 그들이 젊은이를 규격화하는 건 견딜 수가 없다고 얘기하셨어요.

 

선생으로서 나는 그 규격화된 틀 밖으로 꺼내는 일이 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이름을 갖는 발언, 자신 밖에
할 수 없는 말을 해내는 것. 이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주로 듣는 일을 맡는다. 자기 자신만의 말을
하게 되면, 사람은 더듬게 된다. 같은 말을 뱅글뱅글 돌고 있는 느낌이 그것인데, 고유한 이름으로 발언하기 위해서
이것은 필수적인 과정이다. 처음부터 매끈한 문장을 해낼 수는 없다. 무겁게 나오는 말, 그걸 인내심있게 들어주는
이가 바로 스승이다.

 

선생님은 일본에 있는 합기도 도장에서 젊은 사람들을 가르쳐주고, 크고 작은 모임과 공부를 하는 작은 배움터를
운영하신다고 합니다. 합기도를 시작하는 젊은이들이 '도'를 시작할 때 자기의 몸이 뿜어내는 말을 기다리는 걸
스승의 작업이라고 생각하신대요. 그것 외엔 방법이 없다고요.

자기의 몸이 뿜어내는 말, 그것은 개성이고, 자기 몸의 유일무이성으로 흉내내지 않고, 태어나 처음 하는 움직임과
같은 거라고 합니다.

 

 

 


# 연장자에게

 

정치적인 의미의 국민국가는 이미 쇠퇴하고 있다. 글로벌화/세계화에서 국민국가는 수행력이 없다. 나의 도장은
이를테면 소규모의 국민국가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일본에는 이런 류의 단체가 몇몇 있다. 서로 네트워크도 없고,
약속한 것도 아니다. 각자 알아서 운영하는 거다. 이건 수익을 위해서 혹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나는 연장자는 젊은이를 지원해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50년 전에는 상식이었던 이야기. 잃어버린
도덕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강연의 제목이 '저주받은 시대'인데. 내 최근 저서의 제목이기도 하다. 나는 이 저주에 대항하는 방법은 다름 아닌
축복을 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초록이 깊구나' '하늘이 파랗구나' '계곡이 맑구나' 와 같은 주위 풍경을 아름답게
해주는 것들을 칭찬하며 사생(寫生: 식물이나 실경을 그대로 본떠 그리는 일)을 기술해보자. 젊은이와 함께 그려
나가는 것, 그들의 첫 마디를 들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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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은 이것으로 끝났고, 뒤이어 질의응답시간이 있었다.
그 중에 내가 품고 있던 질문과 통했던 답변 2가지를 덧붙인다.

 


# 추어탕 집에서

 

27살, 젊은 시절 누추하고 값싼 음식점에서 추어탕과 술을 곁들여 먹고 있는 한 중년 사내를 만났다.
그런데, 양념을 숟가락으로 떠서 탕에 넣는 자세, 국물을 먹고 술잔을 입 안으로 탁 털어넣는 모습을
이유도 모른 채, 계속 바라보았다.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뗄 수 없어 계속 보고 있게 될 수
밖에 없었다. 계속 쳐다보면서도, 내가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계속 좋아보였다는 것 밖에.

나이가 들고, 그 중년사내만큼 늙었을 때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가 내 눈에 어른답게 보였다는 것. 그리고, "왜 그렇게 바라볼 수 밖에 없었나?"라는 물음을 계속
품고 살았기 때문에 알아냈다는 것. 바로 이 두 가지다.


 

 

 

 

# 인간으로서의 경험

 

육아를 하게 되었을 때, 아이가 참 싫었다. 2시간마다 깨서 우는 신생아와 함께 같은 방을 쓰는 일은
몹시 힘들었다. 5주간이나 그런 밤을 보내면서 심신의 피로가 극에 달하는 순간에 이르자, 그렇게 밉고
귀찮았던 아이가 갑자기 이뻐보였다.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 라고 생각할 만큼 뇌가 변했다.
피로가 한계에 이르자, 살아남기 위해 뇌가 변화한 것이다.

누군가를 대신해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처음 해보았기에 스스로도 아주 놀랐다. 레비나스의 철학 중심엔
'사랑'이 있었는데, 그때가지 나는 '사랑'을 몰랐던 것. 그 하나를 통해 레비나스의 이해가 커졌다.

우치다 선생님은 다시 얘기를 이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나는 친근하게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눈을 감으시기 전에 얘기나누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가 들었다. 유골함을 받고, 사진을 붙여놓고 아침 저녁으로 "잘 주무셨어요?" "다녀왔습니다"
이런 인사를 했다. 만약, 아버지가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생각(평가)하셨을까 생각했다. 신문을 펼치고
볼 때에도 아버지라면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하며 떠나신 후 아버지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

존재하지 않는 자가 존재하는 자보다 더 가까이 느껴질 수 있다는 걸. 존재하지 않는 자의 절박함,
레비나스의 얘기가 더 와닿았다. 아이를 키우고, 아버지 죽음을 통해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철학의 주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다. 인간으로서의 경험을 축적한 사람이 인간으로서 무엇을 할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