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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섭 - <사후적 지성>과 <사후적으로 스토리를 입히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본문

책/[책]좋은 글은 심금을 울린다

박동섭 - <사후적 지성>과 <사후적으로 스토리를 입히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gunbbang 2016. 6. 1. 13:28

연일 계속되고 있는 강의후기작성의 달인 건빵 이종환 선생님의 <트위스트교육학> 5강좌 '내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메시지'에 강의후기에 대해 A라는 지인의 댓글이 달렸고 그 댓글에 대해서 건빵 선생님의 댓글 그리고 이 두 사람의 댓글에 대해 제가 댓글을 달았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일독을 권합니다.

 

A의 댓글

모든 가치는 사후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게 가장 고민이지요. 머리로는 알겠는데, 삶에서 가치를 먼저 측정하고 가늠하려고 든단 말이지. 사실 스토리텔링의 위대성은 가치를 사후적으로 스토리 옷을 입히는 것인데, 대개 사람들은 엉뚱한데서 결이 다른 얘기를 떠들고 있는 형편이지요.

 

B의 댓글

사후적으로 스토리가 입혀지는 건 알지만, 사전적으로 의미가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서 그걸 말하기가 어려운 거 같아요.

 

박동섭의 댓글

사후적으로 스토리 옷을 입히는 것아주 멋진 표현입니다. ^^

사람들의 사회학Ethnomethodology의 중요한 중 하나가 우리가 늘 일상에서 별생각 없이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선명한 윤곽을 그리거나 질서를 부여하는 것인데, 그런 면에서 본다면 방금 이 표현은 EM의 일 그 자체라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열심히 후기작성에 매진하고 있는 이종환 선생님도 그렇고 박준규 선생님에게 오해가 있을 것 같아서 몇 마디 첨언하고자 합니다.

 

 

 

사후적 지성과 스토리텔링은 다르다

 

사후적으로 알게 되는 지성사후적으로 스토리 옷을 입히는 것은 차원이 다른 혹은 지평이 다른 이야기이므로 주의를 요합니다.

EM연구자인 Lucy Suchmann은 그녀의 저서 Situated Cognition and Plans에서 플랜이 개체 혹은 개인의 머릿속에 먼저 있고 그 플랜에 따라서 행위가 일어난다는 이른바 플랜주의’ (저는 그녀의 이 플랜주의를 플랜의 명사화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를 비판하면서 플랜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행위자가 지금 하고 있는 일 그리고 한 일에 대해서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 즉석에서(ad hoc)’ 혹은 사후적으로(post hoc)’으로 가져오는 자원resource 혹은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주장합니다.

언뜻 보면 플랜이 마치 우리의 행위를 전일적으로 통제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아서 그때그때 일어나는 여러 우연적인 요소에 의해서 행위가 조정되거나 행위의 방향성이 정해지는 것이지요.

그리고 인간이란 스토리텔링을 하는 동물이라는 전제에 서면 이런 모든 자신의 일련의 행위를 설명해 내기 위한 리소스 혹은 사회적 구성물이 필요하게 마련이지요.

 

 

 

사후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개발된 플랜에 대해

 

그것이 다름 아닌 플랜이라는 사회문화역사적 인공물artifact이지요.

하여 자신의 행위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하여 즉석에서 혹은 사후적으로 가져오는 리소스가 바로 플랜이지요.

그렇게 본다면 사전에 그 가치나 그 의미를 아는 것밖에 하지 않겠다는 언설 또한 연구자에 의한 사후적 질서부여 혹은 의미부여라는 점에서는 플랜과 별 차이가 없겠지요.

물론 그런 인공물(예컨대 소비자 마인드/등가교환으로 배움을 정의하는 아이들)을 발명한 우치다 선생님의 통찰력에 경의를 표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지요.

당사자(예컨대 배움을 상품을 구입하는 것으로 정의하는 마음을 가진)는 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반성적으로 돌아보면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자각적 그리고 무반성적으로 그 일을 순식간에 해내기 때문에(“선생님 이거 배우면 어디에 도움이 되나요?”)사전이나 사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 논할 말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 보통이지요.

하여 소비자 마인드에 기초해서 세상일을 처리하는 태도나 지금 당장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이게 왠지 재미있을 것 같고 언젠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세상일과 마주하는 것 또한 연구자 (때론 메타적 사고를 늘 기동시키는 일반인)의 즉석에서 혹은 사후적으로 부여한 이야기의 하나라는 점에서는 똑같은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