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방랑자
박동섭 - 내가 EM을 잘 몬 배았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아마추어 1강 자료) 본문
현상학적 분석이 적절히 드러내주는 바와 같이 교의적(doctrinal) 실수는 적발해서 교정하기가 어렵지 않아도 관점의 잘못은 흔히 지적인 종신감옥형을 자초한다.
김영민 『현상학과 시간』중에서
제대로 된 과학적 시점은 문학적 시점이기도 하다. 물론 그 역도 참이다.
과학의 목적은 무한한 英智의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誤謬에 제동을 거는 것이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0. 꼬투리 사냥꾼이 아닌, 어른이 되자
창조보단 파괴가 쉽고, 칭찬보다 비난이 쉽다
진지하모 진지하다, 농담하모 진담으로, 진담하모 농담으로, 농담하모 가볍다, 진담하모 무겁다, 웃으면 그게 우습냐고, 울모 그게 울 일이냐고, 말 안 하모 와 안 하노? 말하모 와 하노? 짧으모 짧다, 길모 길다.....말들이 많다.
페북이란 것의 특성상, 꼬투리를 잡자고 하면, 가히 무한대로 잡을 수 있는 게 이 ‘꼬투리’사냥이다. 그리고 대개 이 꼬투리 잡는 아들의 담벼락 특징은 표백한 듯 깨끗하다는 것, 제 논지 따위는 없고, 기껏 해봐야 남의 것으로 도배가 돼 있다는 것이다. 깨끗하고 순수하니 뭐든지 따질 수 있는 정당성 따위가 확보되는 것이다.
이런 아들은 제 처량한 앎, 혹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제 잘남, 혹은 모든 것을 뚫어내는 전지전능한 창 같은 게 있어서 마구‘자비’로 일단 쑤시고 보는데, 또 기막힌 방패까지 갖고 있어서 결코 뒤로 물러서거나 패하는 일이 없다. 그 방패란 다름 아닌 남의 소리를 결코 듣지 않고, 제 가당찮은 논리 전개에 필요한 말만 떠들면 되는 반복재생의 녹음기 같은 것이다. 모든 걸 뚫는 창과 모든 걸 막아내는 방패를 쥐었으니 가히 이들은 천하에 무적이다.
갸들은 와서 주구장창 떠든다.
“계란 팝니다, 닭알 팝니다, 닭보다 먼저 계란 팝니다!”
쉬바, 계란 안 묵는다는데, 닭백숙 묵고 싶은데, 복숭아도 묵고 싶은데, 계란 말고 메추리알은 없냐고 물어보는데, 오로지 계란만 판다고 떠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곤 계란 안 묵는다면, 결정적으로 삐져서 다시는 이 동네에 오니 안 오니, 파니 안 파니 개지랄을 떨다가, ‘수준’이 낮아서 못 놀겠다는 선언을 하곤 다른 동네에 또 계란을 팔러 떠나는 것이다.
계란을 파는 게 문제는 아니다. 다만 계란을 무라꼬 강요하면 안 될 일이다. 꼬투리 사냥을 나왔으면 꼬투리 알도 함 팔아 볼 일이다. 꼬투리 잡고 늘어져봤자 결국 까투리나 메추리알도 몬 만지고, 까나리 액젓도 몬 담그는 법이다.
‘계란을 판다’고 떠들듯이 모든 발언은 무언가를 누락하면서, 어떤 결여를 내포하면서 터지는 것이고, 언제나 어떤 맥락 아래서 발화되는 것. 꼬투리는 잡아봤자 말 그대로 꼬리밖에는 몬 잡고 마는 것. 꼬투리 잡을 시간에 자신의 담벼락에서 계란이 얼마나 위대한 식품인지 먼저 밝힐 일이다.
-황경민, FACEBOOK, 9월 10일
‘꼬투리 사냥꾼=채워지지 않는 전능감 사냥꾼’
자신의 그릇에 맞지 않는 이른바 자기존종감을 갖고 결코 채워지지 않는 전능감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은 창조적인 일을 싫어하는 반면 뭔가를 늘 파괴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기 마련이지요.
기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은 ‘개인적’인 일이고 아주 구체적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황선생님의 일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구체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것은 고유명의 태그가 붙은 ‘실물’을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내어놓고 그들의 시선에 노출되고 견디고 그들이 평가를 내리는 것을 기다린다는 의미이지요.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창조의 무서움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요.
도망도 가지 못하고 숨길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 거기에 있고 자신이 어느 정도 그릇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통째로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채워지지 않는) 전능감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작품’(황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신의 타임라인에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이야기가 전혀 없지요)을 제시하지 않고 타인이 만들어 낸 것(타인의 글)에 무자비한 평가를 내리는 것을 일과로 삼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게 됩니다.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없는 사람일수록 공격적이 되고 그 비평이 잔혹한 것이 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지요.
어른은 자신이 모르는 것, 외부의 다른 것을 이해하려 하는 사람
10년 전에 아직 내가 ‘학회’라는 곳에 얼굴을 내밀고 있었을 때 학회발표 후의 질의응답에서 “선생님은....OO논문을 읽지 않으셨지요?”라든지 “주지에 관해서 언급이 없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와 같은 ‘발표 논문에서 논하고 있지 않은’ 것을 꺼내서 이런 것도 모르는 사람이 이 논건에 관해서 말할 자격이 없다고 사람을 몰아붙이는 태도를 보이는 학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꼬투리 사냥꾼’을 볼 때마다 왜 그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의 가치를 높게 점수 매기는 반면, ‘자신이 모르는 정보’는 전혀 알 가치가 없다고 그만큼이나 천진스럽게 믿고 있는 것인지 그 이유를 잘 알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의 가치를 과대평가하고 자신이 모르는 것의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연구자에게 있어서 가장 처음 해야 하는 일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학술정보의 가치를 적절하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런 것도 모르는가?”고 화를 내는 연구자들은 ‘이런 것’이 논의의 시작점에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에 관해서 거의 설명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지성의 기능에 관해서 반성적인 태도를 보이는 학자들은 스스로에게 먼저 이렇게 물어볼 것입니다. ‘나는 왜 어떤 것을 알고 있고 그것과는 다른 것을 모르는 것일까?’, ‘내가 뭔가를 알고 싶다고 생각하고 또 다른 어떤 것에 관해서는 ‘알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떠한 선별의 기준에 따르고 있는 것일까?’, ‘그 선별기준에는 일반성은 있는 것일까? 있다고 한다면 그 일반성은 어떻게 학적으로 기초 지워지는가?’ 등등. 그러한 일련의 물음은 ‘나의 지의 성립방식’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것이 ‘지식에 관한 지식’을 형태 짓습니다.
연구자라는 것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에 관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알 가치가 있고 자신이 모르는 것은 알 가치가 없다’고 무반성적으로 믿고 있는 연구자를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상대로 하는 것은 엄청난 피로감을 느끼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어른은 자신이 지금 알고 있는 것은 별 가치가 없고 진짜 가치가 있는 것은 외부로부터 도래하는 것이라는 스토리를 믿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1. 비둘기는 잘못 날고 있는 것일까?
눈이 부시게 하늘 푸르른 어느 날, 세스나기 한 대가 천천히 비행하고 있었다. 바람이나 기온 등의 일기 조건도 완벽하리만큼 최상의 상태였다. 그러나 조종사는 약간 긴장해 있었다. 지금 비행기는 초저공, 초저속으로 비행중이기 때문이다. 강과 바다뿐 아니라 도시의 거리와 건물의 윤곽, 특히 높고 낮게 이어져 있는 산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시야에 들어왔다.
조금 아래 비둘기가 나는 것도 보였다. 이것은 흔하지 않는 일이었다. 비둘기가 날지 않아도 오늘은 평화로운 날이야. 참 며칠 전에는 팔레스타인의 아라파트와 이스라엘의 라빈이 악수도 했었지......어쩌구저쩌구 중얼거리면서 조종사는 비둘기들이 나는 것을 보다가 이상한 사실을 발견했다. 비둘기들이 잘못 날고 있는 것이었다.
공기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모든 비행 물체는 몸을 날아가는 방향으로 수평화, 유선형화해야 한다는 것이 비행의 제일 원칙이다.
그런데도 비둘기들은 몸체를 한껏 세우고 날개깃을 전진 방향으로 잔뜩 치켜세웠다가 뒤로 젖히며 날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공기의 저항을 흘려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끼고자 하는 동작과도 같았다. 말하자면 비둘기들은 지금 비행의 제일원칙을 무시하며 날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비행하는 순간 비둘기들이 불쌍해졌다. 이 원칙을 알지 못해 비둘기들은 그 조상들부터 얼마나 부질없는 수고를 해왔으며 하고 있는가. 그리고는 이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이 사실을 비둘기들에게 알려주고 학습시킬 방도는 없는가. 어떻게 저 어리석은 비행의 방식에서 저들을 해방시킬 것인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1898~1956)가 인용했던 이 이야기에는 <과학적으로 생각하기>에 대한 유머러스하면서도 날카로운 풍자가 담겨 있다. 과학적으로만 생각할 때에 바라보이는 세상은 단순하다. 과학적이거나 비과학적이다. 과학적인 것은 옳고 참이며 비과학적인 것은 틀리고 거짓된 것이다. 여러 관점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학적 관점과 나머지의 비과학적 관점(예컨대 상식적 관점)들만이 있을 뿐이다.
2. 새로운 사회학(지성)의 탄생
그런데 브레히트가 지적한 <과학적으로 생각하기>의 오류는 (편협한) 자연과학자들에게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과학자들에게도 물론 종종 발견된다.
일상을 과학으로 풀어헤치려 하다
회화분석의 원류인 사람들의 사회학Ethnomethodology의 창시자인 해롤드 가핑클H. Garfinkel(1917~2011)에 의하면 기존의 사회학자들은 자신들의 일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였다.
과학의 언어로 번역되기 이전의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이 사용하는 표현은 그 의미가 종종 애매해서 아무래도 그대로는 과학적 논의 속에서 사용할 수 없다. 의미가 애매하다는 것은 말을 바꾸면 그 표현이 사용되는 문맥에 따라서 그 의미가 빈번히 바뀐다는 것이다.
그것에 비해서 과학의 언어는 모든 문맥을 초월해서 변하지 않는 의미를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과학은 보편성을 주장할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이 물리학과 화학 같은 자연과학의 경우라면 언어 같은 건 처음부터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 분야에서 나름 ‘엄밀하게’ 정의된 말을 만들어 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사회학의 경우 그렇게 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 사회학의 연구 대상영역은 일단은 일상 언어에 의해서 분절되고 구획 지워진 사람들의 일상적 행위의 다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살’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를 할 때 먼저 일상어의 ‘자살’에 의해 우리 같은 필부필부가 그 현상에 관해 인식하는 양태를 연구하지 않고 도대체 무엇을 연구한단 말인가. 그런데 일상 언어가 애매하다 보니까 그 해당하는 대상영역이 확실히 정해지지 않는다. 실제로 똑같은 하나의 행위가 그것이 이루어진 시기와 경우에 따라서 ‘자살’이라고 불리거나 불리지 않거나 한다. 그래서 사회학자는 먼저 이 애매한 표현을 수정해서 ‘객관적’ 표현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로 뒤르켐(Durkeim)이『자살론』의 모두(冒頭)에서 진술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이런 말이다. 뒤르켐 같은 고매한 과학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음과 같이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들은 참으로 애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컨대 ‘오후 3시’라는 아주 짧은 말조차도 문맥에 따라 그 폭이 상당히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늘 실감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부산발 서울의 KTX의 발차시각이라고 하면 ‘오후 3시는 1분 정도의 폭을 가질 지도 모르지만 로켓의 발사시각이라면 1초의 폭도 갖기가 힘들다. 혹은 내가 매일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라고 하면 10분 이상의 폭을 갖는다.
그런데 과학자의 잣대를 들이대기 전부터 비둘기가 잘 날고 있듯이, 똑같은 논리로 우리 일상인의 삶 또한 사회학이라는 과학의 잣대와 상관없이 아무 문제없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게 아니냐고 물음을 던지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즉 뒤르켐이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듯이 설령 애매한 말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애매한) 말을 사용해서 사회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따라서 적실하게 사회를 포착하려고 할 때 일단은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세속의 삶의 양태를 최전선의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과학을 한다는 목적에 비추어 본다면 일상의 말은 애매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을 수정해 버리면 도리어 포착해야 할 현상을 놓쳐버리고 마는 수가 있다. 수복 혹은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일상의 말이 설령 애매하다고 하더라도 애매한대로 일상생활 속에서 그때그때 어떻게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는가를 진지하게 고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사회학이라는 과학이 제일 먼저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할 일이 아닐까?
과학주의 빠진 과학자 & 과학에 빠진 과학자
이런 자세가 과학주의와 과학을 나누는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다.
과학주의에 빠진 과학자 혹은 자신의 틀 바깥으로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는 과학자들은 ‘과학의 영역’과 ‘세속의 영역’을 깨끗이 양분해서 과학의 영역은 명징함을 축으로 하는 객관적 사실과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합리적인 논리가 지배하고 있고, ‘세속의 영역’은 애매함과 모호함과 혼돈과 이데올로기와 같은 주관적인 표상이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제대로 된 과학적 지성은 그런 구분을 쉽게 하지 않는다. 진짜 과학적 지성은 ‘세속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사태에 관해서도 즉 사람들이 상황과 관계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예컨대 ‘자살’이라는 말에 관해서도 그것이 어떤 포괄적인 논리(예컨대 ‘빙충맞은 고집이 없는 필연성’)에 의해서 충분히 합리적이고 설명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오해해서는 곤란하기 때문에 서둘러 미리 말하지만 그것은 ‘모든 것은 과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라고 공언하는 이른바 과학주의자의 단순함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한 단순한 과학주의자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간단하게 망상 혹은 착각 그리고 세속 등으로 범주화해서 전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시야로부터 배제한다.
그런데 진짜 과학적인 지성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모든 현상을 자신의 시야에 넣을 수 있는’ 탄력이 있고 나긋나긋한 도량의 깊이를 반드시 동반한다. 그것은 그들이 과학적 논리의 ‘극한’ 가까이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극한’ 가까이에 있는 영역은 물론 정설화된 과학적 논리를 종종 적용할 수 없는 장면이다.
그러한 ‘산소가 희박한’ 영역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종종 ‘너무나도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것’(옆집 김씨와 앞집 이씨와 같은 필부필부들이 별 생각 없이 나누는 자살에 관한 이야기)에 매료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자신의 과학적 논리를 풍성하게 만드는데 있어서(즉 ‘극한’을 조금 더 확장시킬 가능성의 측면에서) 생산적인 자극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칼 포퍼Karl Raimund Popper(1902~1994)는 ‘과학자의 자질’이라는 것은 ‘자신의 이론에 부합하는 사례를 열거하는 것보다도 자기의 이론에 적합하지 않는 사례를 찾는 것을 우선시키는 경향’이라고 쓴 적이 있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자의 영광이라는 것은 ‘자신의 이론이 그 후에 등장한 보다 포괄적인 이론 안에서 한정적인 사상에 적용할 수 있는 로컬한 진리로서 인정받는 것’에 있다고 쓴 적이 있다.
즉 그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의 과학자의 자질이라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과학적 진리의 옳음이 확인되는 사례보다도 오히려 그것이 ‘파탄’되는 사례를 만나는 것에 더 큰 ‘쾌감’을 느끼는 경향(이라기보다 능력)에 있다.
그렇다. 명백한 의미에서 <자살론>을 쓴 뒤르켐이라는 사회학자는 자설自說이 파탄되는 것에 대해 엄청 두려움을 느낀 것 같다.
3. 문학이란 현상학의 가능성이다
요즘 내가 집필 작업 중에 있는 ‘사람들의 사회학’의 창시자인 가핑클과 ‘회화분석’의 창시자인 가핑클과 삭스.
문학적 자질이 풍부한 과학자들이 과학의 극한을 확장한다
해롤드 가핑클Harold Garfinkel과 회화분석의 창시자 하비 삭스Harvey Sacks의 저작을 처음으로 읽었을 때에는 그들 사상의 난해함으로 인해 그들의 관점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과학자라기보다는 문학적 자질이 풍부한 사람’이라는 인상만큼은 강렬하게 받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통감한 것은 가핑클(가핑클은 실제로 <컬러 트러블-Color Trouble>이라는 소설을 쓴 적이 있다)과 삭스의 이른바 '문학적 자질'은 '과학자답지'않은 것이 아니라 ‘과학자이기 위한 필연’으로서 필요불가결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의 김영민의 지적은 실로 귀담아 들을 만 하다.
상식적인 말에 불과하겠지만, 문학적인 묘사는 설명에 필연적으로 수반되어야 하는 개념적 분식(粉飾)과 절개(切開)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 따라서 체계와 도식과 형이상학적 사변과 자칫 공소(空疎)해질 수 있는 논리적 작업에 주안했던 철학적 전통이 그간 망실했던 <일상성>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일차적 준비는 아마도 섬세한 문학적 촉수가 될지도 모른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일상성의 회복—물론 그는 언어적 일상성에 국한시켜 논의를 전개하고 있지만—을 위해서는 “설명을 없애고 기술(記述)로써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 그의 적절한 지적처럼 설명과 기술의 차이는, 우선 후자가 삶의 일상성을 작위적으로 간섭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그대로 둔다”는 사실에 있다. 요컨대 삶과 경험의 원초성 속에서 인간에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들을 구성하는 방식에 기술적으로 관심하는 현상학적 시각이야말로 모든 인간의 문제를 절절하게 살아 있는 생활세계의 문맥에서 처리하고자 하는 문학적 감수성의 원야(原野)에 어울리는 촉수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문학이란 현상학의 가능성일 수 있으며, 아울러 문화와 학문이 빼앗아간 살아 있는 생활세계를 부단히 되돌려주는 작업으로서의 문학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철학사의 구조와 과학』, 김영민 저
그리고 그러한 문화적 자질이 풍부한 과학자들의 주된 일은 과학의 극한을 조금씩 확장하는 것에 있다.
애매함, 그렇지만 그곳엔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런 나긋나긋하고 유연한 과학자의 지성은 예컨대 자살을 연구할 때 일상인들이 문맥에 따라 수시로 그 의미를 바꾸어서 사용하는 ‘자살’이라는 말을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내치고 거기에 ‘엄밀’한 과학적 정의를 부여함으로써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살’이라는 말 혹은 개념이 세속에서 일상적으로 어떻게 적용되고 사용되는지를 먼저 연구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몇 해 전에 아내의 친구가 산에서 조난사를 당한 일이 있었다. 경찰은 검시檢屍 결과 현장에서 발을 헛디딘 흔적이 남아있던 것으로부터 그 죽음을 추락사라고 단정 지었다. 즉 그녀의 죽음은 사고사로 판명이 난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나의 아내를 포함한) 가까운 친구들에게 몇 번인가 부부관계에 대한 고민을 밝힌 적이 있었다. 게다가 사고 직전에 정식으로 이혼을 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면서 아내는 그 죽음은 ‘자살’임에 틀림없다고 말하였다. 물론 검시 결과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즉 그 당시 그 친구는 ‘죽어도 좋다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것이다.
주의해야 할 점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 무엇을 사실로서(혹은 증거로서) 들어야 하는지가 검시관과 나의 아내는 달랐다. 검시관에게 있어서 그 죽음이 ‘사고’라는 증거가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반면 나의 아내에게 있어서는 그 사람 자신이 밝힌 사적인 사정이 중요한 것이다. 어떤 성원에 관한 사실의 ‘사실’로서의 가치는 그 성원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지닌다. 즉 그 죽음을 단지 ‘사고사’라고 부를 건지 아니면 자살로 부를 건지는 각각 일정한 사회적 관계의 즉 검시관과 죽은 당사자의 관계(타인 관계) 및 친구관계의 일부가 된다.
두 번째로 검시관은 당장 기록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그 죽음을 판정한다. 그런데 나의 아내는 일기를 쓸 목적으로 그 죽음을 판정하는 것은 아니다. 아내가 친구의 고민을 들어 줄 때에는 친구에게 동정적으로 즉 그 (전)남편에 대해 비판적으로 듣는다. 즉 아내가 수행하는 죽음에 대한 판정은 친구의 (전)남편을 비난하는 행위의 일부이다. 단지 ‘사고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살’이라고 말한다고 하면 그 죽음의 책임을 보다 명확하게 누군가에게 귀속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사고사는 죽은 자에게(우연히) 닥친 일인데 비해서 자살은 자살자가 특정한 이유를 갖고 수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살’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비난하는 활동을 구성하는 것일 수 있다. 이처럼 복잡성의 기반은 사실세계가 아니라 바로 생활세계인 것이다.
자신의 틀에 안주하지 말고, 그 틀을 극한에서 넓혀야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일상적 개념이 애매하다고 해서 그것을 엄밀한 과학적 개념으로 수정해 버린다고 하면 그것은 포착해야 할 중요한 사회적 현실을 오히려 놓치고 말게 되는 것이다. 일상적인 개념이(설령 그것 자체가 연구자의 입장에서 봐서 애매하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때그때 실제 세속적인 삶 속에서 그 나름으로 구성원 사이에 이해되는 개념으로서 어떻게 사용되어지는지 이것이야말로 우선적으로 탐구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비둘기는 잘못 날고 있는 것인가? 시월에 핀 목련은 잘못 핀 것인가? 나의 아내의 친구의 죽음에 대한 아내의 정의(자살)는 너무나도 복잡하고 애매해서 사회학의 연구대상에서 배제되어야 하는가? 과학적으로 생각할 때에만 잘못 날고 잘못 피어 있고 연구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틀 안에서 안주하면서 극한을 조금씩 늘여나가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이른바 과학자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추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하늘에서나 비둘기는 비둘기로서 잘 날고 있으면 어느 땅에서나 목련은 목련으로서 피어날 뿐이고 어느 세속에서도 우리는 그렇게 (애매한) ‘말’을 하고 살아왔고,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4. 레비스트로스와 마르크스 뒤팽 그리고 홈즈에게 한 수 배우기
레비스트로스는 「슬픈 열대」에서 마르크스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17세 쯤 나는 휴가 중에 알게 된 젊은 벨기에의 사회주의자의 입문서를 통해서 맑시즘을 알게 되었다. 이 위대한 사상을 통해서 나는 칸트부터 헤겔에 이르는 철학의 흐름에도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그것만큼 한층 나는 마르크스의 책을 읽는데 열중하게 되었다.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내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 때 이후 이 열중은 한 번도 변질된 일이 없이 나는 어떤 사회학이라든지 민족학 문제를 탐구할 때에는 거의 언제나 미리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과 <경제학 비판>의 몇 페이지를 읽고 내 사고에 활기를 불어 넣고 나서 그 문제의 해명에 착수하였다.
이 레비스트로스의 말에 대학원 시절 나는 꽤 영향을 받았다. “아 그렇지 그렇지 맞아 맞아” 마르크스는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에 활기를 불어 넣는 것’이구나 하고 뭔가가 섬광처럼 나에게 닥쳐 들어왔다.
그러고 보면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은 확실히 ‘명탐정에 의한 계급투쟁의 진범인 찾기’로 읽으면 두근두근거릴 정도로 스릴 넘치는 지적긴장으로 가득 차게 된다.
마르크스의 매력은 제대로 들어맞는(적용이 가능한) 사례를 선택적으로 찾아서 가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구에게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사례’(예컨대 일상의 복잡성 속에서 일어나는 사례)를 수집하면서 그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단지 하나의 스토리 라인’을 찾아내는 오귀스트 뒤팽Auguste Dupin과 셜록 홈즈Sherlock Holmes와도 통하는 지적인 절묘한 솜씨(tour de force)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상상력이 필요한 자리에, 수학을 대입하다
포는 그의 소설 「도둑맞은 편지」에서 탐정 뒤팽의 입을 빌려 편지 찾기에 실패한 경찰국장의 잘못을 그의 친구에게 이렇게 지적해준다. “채택된 방법은 훌륭한 것이었고 그 실행도 빈틈없었지. 그러나 한 가지 옥의 티라면 방법이 상대방에게 알맞지 않았다는 점일세...그는 앞에 놓인 사건에 대해 지나치게 얕게 생각하거나 또는 깊게 생각하여 늘 실패만 하고 있지. 이 점에서 초등학교 아이가 그보다 훨씬 더 영리하다네.”
포의 「도둑맞은 편지」는 생각에 대한 생각을 생각하게 해주는 철학적 소설이다. 왕비는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바로 자기 눈앞에서 한 장관에게 자신의 비밀이 담긴 편지를 도둑맞는다. 물론 그 장관은 그날 이후 등등한 기세로 훔친 편지가 보증해주는 권력을 향유한다. 참다못한 왕비가 경찰국장에게 사태의 전말을 들려주고 은밀히 그 편지를 다시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특명을 받은 경찰국장이 무려 넉 달 동안이나 장관의 집에 침입하여 숨길만한 곳을 이 잡듯이 뒤졌으나 허사였다.
EM은 시인이 되어 반지성주의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그러나 뒤팽은 단 한 번의 방문으로도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찾아낸다. 짐작했던 대로 그것은 장관의 거실 벽난로 밑에 마치 쓰레기처럼 반쯤 찢겨진 봉투에 쑤셔 넣어진 채 아무렇게나 내팽겨쳐져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뒤팽이 구사했던 방법이 바로 조약돌 놀이하는 초등학교 꼬마의 심리학이다. 조약돌 놀이란 손에 쥔 조약돌이 짝수인지 홀수인지를 맞추어서 이기면 얻고 지면 뺏기는 게임이다. 그 여덟 살 바가니는 첫 번에만 가끔 실패할 뿐이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몽땅 맞추어 내서 마침내 학교의 모든 조약돌을 차지한다. 그 비결은 바로 이렇다. 우선 첫 번의 답으로 손 내민 아이의 머리 씀씀이를 가늠한다. 다음으로 그 아이의 표정과 음성, 손짓 들을 살펴서 그 모든 것에 자신이 일치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답은 바로 ‘그 아이의 생각’을 생각하는 데서 찾아낸다.
뒤팽은 장관 집을 방문해서 편지를 찾을 했을 때에 바로 이 꼬마의 전략대로 먼저 ‘왕비가 보낸 사람이 집 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지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장관의 처지에 서보려 한다. 그 지점에서부터 어떻게 숨길 것인가를 궁리하는 장관의 생각을 추적해 들어갔던 것이다. 여기서 뒤팽이 내렸던 결론은 이것이니 곧 이 일에 필요한 것은 주판과 확대경이 아니라 꿈과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편지를 찾으려면 수학자가 아니라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집의 모든 면적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빠트리는 부분이 없도록 번호를 매긴 다음, 바로 옆에 붙은 두 채의 집도 포함해 온 집안을 1제곱인치씩 확대경으로 살펴보았”던 경찰국장의 기하학적 방법과 대비된다. 그가 일을 그르친 것은 시인이 되어야 하는 곳에서 수학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노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잘 가는 자는 자취를 남기지 아니하고, 좋은 말은 흠이 없다. 잘 헤아리는 자는 주판을 쓰지 아니하고 잘 단속하는 자는 자물쇠를 쓰지 않는다.” 그런데 그 무슨 야단스러움이었더란 말이냐.
그것은 ‘기지旣知에의 환원’이라기보다도 ‘미지에의 투기投企’에 가까운 지성의 사용방식으로 마르크스는 ‘그런 사람’이다는 것을 마르크스 ‘주의자’들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반反지성주의라는 것은 한 마디로 하자면 ‘기지의 이미 검인이 끝난 도량형’에 끼워 맞추는 것으로 밖에 현상을 생각할 수 없는 멘탈리티를 가리킨다. 그들은 계량할 수 없는 것밖에 믿지 않는다. 즉 “왜 어떤 것은 계량할 수 있고, 반면에 어떤 것은 계량할 수 없는가. 아니 그 이 전에 애당초 <계량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와 같은 식으로 결코 물음이 심화되지 않는 것이 반지성주의의 한계일 것이다.
EM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이러한 반지성주의의 한계를 뛰어넘는데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5. 문맥의존성과 애매함
그런데 만약 애매한 일상어를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면 EM은 애매한 말로서 사회와 사람들의 삶을 말하게 되는 것일까?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대체로 학문의 이름에 걸맞은 일인가?
말은 말로서 사용하는 게 아니라, 행위를 전제한다
말이라는 것은 어쨌든 문맥 의존적이다. 즉 말은 문맥에 따라서 사용되고 문맥에 따라서 적당한 의미가 충당된다. 예를 들면 일견一見 문맥으로부터 독립되어 보이는 표현인 ‘오후 3시’라는 말조차도 엄연히 문맥의존적이다. KTX의 발차시각이라면 ‘오후 3시’는 1분 정도의 폭을 가질 지도 모르지만 인공위성의 발사시각이라면 1초의 차이도 허용하지 않는다. 혹은 우리가 매일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라면 10분 이상의 폭을 갖는다.
그러나 ‘문맥의존적’이라고 해서 일체의 말 혹은 표현이 애매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실감상으로는 자신들이 사용하는 말이 애매하다고 느끼는 일은 별로 없다. 수정주의 사회학이 종종 놓치고 있는 것은 말은 단지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데에만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에 관해서는 Garfinkel의 공동연구자인 삭스(Sacks, 1992)의 의견이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우리는 종종 보고라는 활동을 수행한다. 예를 들면 “오늘......일이 있었다”, “오늘....일이 없었다” “지금 막....을 하려고 하던 참이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보고 내용은 대체적으로 진실이다. 그런데 그 보고가 다름 아닌 그 때 이루어진 것은 그것이 단지 진실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진실과 관련된 보고는 무수히 있을 수 있다. 특히 ‘오늘은 없었다’에 관해서 말해보자면 그것은 확실하다(“오늘 킹콩이 오지 않았다” “오늘 지구가 폭발하지 않았다” 등등 이러한 것들은 모두 진실이다). 그런데 우리가 진실의 보고를 하는 것은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서 어떤 특정한 행위를 수행하기 위함이다. 예를 들면 “문구통 안에 투명 테이프가 없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상대를(그것을 사용한 후에 원래 자리에 돌려놓지 않았다는 것에 관해서) 비난하는 경우이기도 하다.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세계를 묘사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세계내의 사건(즉 활동․행위)을 만들어 내는 것이기도 하다.
일상은 애매하진 않고 복잡할 뿐이며, 사람들은 그 복잡함을 살아낸다
말의 사용은 이렇게 행위와 함께 있다. 말을 바꾸면 말은 실천적인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목적에 들어맞는 한 문맥의존적인 표현도 결코 애매한 것이 아니다. 혹은 실천적인 목적에 비추어 봤을 때 역으로 불필요하게 상세하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애매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도로가 막혀 있는 것을 친구에게 알려주려고 할 때 “도로가 주차장으로 변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어떤 구간의 자동차 수를 말하는 것보다 확실할 것이다(실제로 우리는 몇 km 구간에 몇 대 있으면 차가 막힌다고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구체적인 숫자를 예시하는 것조차 할 수 없다.). 하나 더 예를 들어 보면 내가 매일 커피를 마시는 시간에 관해서 “오후 2시 56분 3초부터 3시 4분 47초 사이에”라고 말한다고 하면 오히려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애매하게 생각할 것이다.
즉 문맥의존성은 애매한 것이 아니라는 것 이것이 앞의 물음에 대한 대답의 제일 첫 번째 포인트이다. 김영민은 ‘복잡성의 철학’이라는 조어造語를 통해서 애매함을 이유로 수정사회학이 내친 일상을 다음과 같이 어루만져준다.
우선 복잡성은 혼란의 원인이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애매성과 다르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회화로 대변되는 문화적 순치와 훈련을 통해서 자신의 생활을 일관성 있게 조율하며, 별 혼란 없이 삶의 복잡성에 대응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삶은 복잡하지만 애매하지는 않다. 복잡한 현실은 정서와 행위의 다양성을 요청할 뿐이지만, 애매한 현실은 정서와 행위의 근거 자체를 앗아가 버리기 때문이다.....중략
일상의 삶이 비록 복잡해도 시야는 흐릿하지 않으며, 우리는 각자의 몸과 마음에 익은 패턴을 좇아서 그 복잡성을 탄력성 있게 헤치며 비교적 일관되게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다
김영민, 1996, pp. 151-152
즉 일상은 결코 애매한 것이 아니라 단지 복잡할 따름이다. EM은 그 복잡한 일상이 어떻게 성립되고 유지되는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학문이다. 김영민의 지적처럼 우리일상에서 수행하는 다양한 행위가 결코 애매한 것이 아니라 단지 복잡할 뿐이고 그럼에도 우리는 그 복잡성을 탄력성 있게 헤치며 비교적 일관되게 삶을 꾸려나간다고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M은 그 복잡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던졌던 일상 언어가 애매하다고 해서 EM 또한 애매한 말로 해야 되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해보기로 하자. 이 문제와 관련해서 자주 오해를 받고 있는 것인데 수정주의에 반대한다고 해서 EM을 논하는데 있어 일상적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표현의 일상적인 용법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이상 비일상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편이 오히려 사안을 확실히 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이런 사람들의 복잡한 삶의 모습을 제대로 담아내기 위해서 김영민은 ‘빙충맞은 고집이 없는 필연성’ 이다. 그가 말하는 참으로 비일상적인 표현을 예증할 수 있는 다음의 회화장면을 분석해보기로 하자.
6. 회화의 논리-우발성과 아포리아의 구조
회화분석과 논리 문법
다음과 같은 회화의 단편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A: 아직 리포트 안 냈나?
B: 어
A의 발화는 의문문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과 동시에 한 가지 행위를 구성하고 있다. 즉 A는 ‘질문’이라는 행위를 하고 있다고 분석가능하다. 그에 대해서 B의 발화는 ‘응답’이라는 행위가 된다. 동시에 B는 ‘응답’을 함으로써 A의 발화를 ‘질문’이라고 이해하였다는 것을 자신의 ‘발화’를 통해서 제시한 것이 된다. 이러한 사태는 회화분석에 의하면 이 A와 B의 발화는 ‘질문’과 ‘응답’의 인접쌍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논리문법분석에서는 예를 들면 이러한 인접쌍을 논리적인 관계로서 포착한다. 즉 ‘질문’과 ‘응답’이라는 인접쌍이 규범적으로 결합하고 있는 ‘개념의 논리문법’이라고 보는 것이다.
회화의 우발성
그러면 이러한 ‘질문-응답’이라는 쌍 혹은 대는 어떠한 논리관계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질문’ 뒤에 반드시 ‘응답’이 온다는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법칙law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이 ‘질문’ 뒤에 ‘질문’이 올 수도 있다.
B: 오늘이 내는 날이가?
이 경우 B는 A가 질문을 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B가 ‘질문’을 함으로써 A의 발화내용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면 만약 B가 “마 나나라”라고 말했다면 어떻게 될까?
똑같은 A의 발화는 B에 의해서 ‘비난’으로 이해되어 B가 ‘응수’한 것이 되어 ‘비난-응수’의 인접쌍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처럼 ‘질문’ 후에 ‘응답’이 오는 것은 ‘법칙’으로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상대방(다음 행위자)이 어떻게 발화하는가 하는 우발성contingent에 의거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다음에 무엇이 와도 좋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거기에는 다음에 무엇이 와야 할 것인가에 관한 규범적인 제약이 있다. A의 발화 뒤에 ‘침묵’이 오면 ‘B의 응답이 없다’는 것을 이해가능하게 된다는 것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 이 경우 B는 동작도 발화도 없는 ‘침묵’이라는 행위를 한 것이 된다.
그리고 A의 발화가 ‘질문’이 되는지 ‘비난’이 되는지는 이 ‘침묵’에 이은 발화를 계속해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별 생각 없이 나누는 회화를 보면 회화의 계열sequence에서 다음의 한 수는 우발성에 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규범적 제약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똑같은 일은 물론 ‘질문-응답’과 같은 인접쌍 뿐만 아니라 ‘비난-응수’, ‘인사-인사’와 같은 인접쌍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회화의 아포리아적인 구조
그리고 이러한 인접상의 존재는 통계의 의한 귀납적인 결론은 물론 아니다. 예컨대 질문 뒤에 응답이 올 가능성이 높다든지 어떤 조건 하에서 몇%의 발생빈도 혹은 확률이 있기 때문에 이 인접쌍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 보다는 ‘질문-응답’이라는 개념의 관습적인 짝이 빈도를 세기 전에 아포리아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면 앞에서 나온 것처럼 B가 “마 나나라”라는 ‘응수’를 했다고 하면 그 앞의 A의 발화는 ‘질문’으로 이해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질문-응수’라는 짝은 관습적으로 연결되지 않기(논리문법위반) 때문이다.
B의 ‘응수’에 관습적으로 대응하는 짝은 ‘비난-응수’이다. 그로 인해 A의 발화는 ‘질문’이 아니라 ‘비난’으로 이해되고, ‘비난-응수’라는 짝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물론 그 후의 회화에서 이 짝이 어떻게 다루어지는가 하는 것은 계속되는 회화를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아포리아적인 구조(a priori structure)는 그 논리를 사용하고 있는 자연언어의 공동체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보고 말할 수 있는(이해 가능한) 것이다(그것 때문에 ‘옳은지’ 어떤지에 관해서 교섭가능하다). 이렇게 논리문법분석에 의하면 회화는 한편으로는 우발성에 의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규범으로서의 ‘아포리아적인 구조’에 기초하면서 진행한다고 볼 수 있다(Coulter, 1983).
우리들이 일상에서 늘 경험하는 사람들의 방법 중 하나인 ‘회화’의 이러한 아포리아적인 구조를 철학자 김영민은 일리라는 관점으로 다음과 같이 풀어내고 있다.
우리의 인간스러움과 그 일상은 전권을 쥔 정답(眞理)에서도, 산산이 부서지는 오답(無理) 속에서도 찾을 수 없다. 넓은 터와 긴 시간의 지평에서 넉넉히 드러나는 일리들과 그 운용의 묘에서 인간됨의 모습은 제자리를 찾아간다.
빙휴먼의 인간학은 복잡다단한 삶의 구성에 정직하려는 복잡성의 철학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복잡성을 드러내는 노고가 무책임한 애매성의 옹호로 비쳐져서는 곤란하다. 복잡성의 현실과 빙휴먼의 현실이 서로 만나는 방식은 늘 일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삶의 일상을 통해서 경험하는 현실은 이로정연(理路整然)한 코스모스 kosmos도 아니고 앞뒤의 분별이 서지 않는 카오스 khaos도 아니다. 그것은 각자의 터와 역사의 구체성을 좇아 이치를 세우는 일리의 세계인 것이다
김영민 저『컨텍스트로 패턴으로』p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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