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방랑자
[박동섭] 내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 5. 나가며 본문
미래의 직인을 위한 석공일을 하던 석공
졸업논문의 최종수익자는 내가 아닌 모든 것
학술연구란 집합적인 일이다
나의 연구활동은 ‘end-user’가 아닌, ‘pass-user’일 뿐
모스의 증여론 1 - 마오리족의 하우에 대해
모스의 증여론 2 - 답례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길 때, 비로소 선물이 된다
레비스트로스의 커뮤니케이션론 1 - 답례는 다른 대상에게 하는 것
레비스트로스의 커뮤니케이션론 2 - ‘근친상간 금지’가 사회를 시작시켰다
레비스트로스의 커뮤니케이션론 3 - 침묵교역은 가치를 알 수 없는 것으로 유지된다
착각할 수 있는 능력
고맙습니다라는 말로 증여는 시작된다
증여는 주체적인 행위가 아니다
증여라는 감각은 시간과 함께 시간 속에서 배양되는 것이다
교육을 등가교환으로서 보는 것의 폐해
증여의 교육은 어떤 가치가 있는 지를 모르는 것을 배웠다는 것
교육의 성과는 반드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증여의 교육을 할 때 사람은 성숙해진다
교사는 교사단으로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좋은 노래도 증여가 된다
배움은 선생과 제자의 내 딛음으로부터
5. 나가며
지금까지 이 연구에서 나는 증여에 관해서 그리고 그 활동을 통해서 교육을 고쳐보는 것에 관해서 긴 이야기를 하나 하였다. 그런데 이런 나의 글쓰기 또한 실은 반대급무의무에서 나온 것이다. 나에게 증여에 관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준 한 명의 석공부터해서 모스, 레비스트로스 그리고 우치다 까지 증여에 관한 아이디어를 준 모든 사람들의 증여에 답례해야 할 반대급부의무를 강하게 느껴서 그들이 말하려고 한 것을 가능한 한 밀도 있고 농밀하게 그리고 서로 연결고리를 지으면서 풀어내려고 하였다. 그들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누군가에게 전하지 않으면 인간적인 도리가 아니라고 느껴서 이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노래도 증여가 된다
이 글을 쓰고 있다 보니 일본의 싱어송 라이터인 아라이(荒井, 1992)의 <다정함에 감싸 안긴다면>이라는 노래가 문득 떠올라서 CD를 찾아서 오래간만에 들어보았다. 그 노래 중에 다음과 같은 가사가 나온다.
‘커튼을 열고, 조용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의 다정함에 감싸 안긴다면, 틀림없이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은 메시지.’
오래간만에 이 노래를 듣고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 노래야 말로 ‘증여론’이 아닌가 하고.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은 메시지’, 이 감각을 ‘피被증여의 감각’이라고 부르지 않고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 누구도 메시지 같은 것 보내지 않았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은 누구로부터의 메시지도 아니다. 그냥 자연현상이다. 하지만 아라이는 거기서 ‘자신 앞으로 배달된’ ‘메시지’를 읽어냈다. 자신을 축복해 주는 메시지를 거기서부터 길어낸 것이다. 그리고 그 선물에 대한 ‘답례’로서 노래를 만들었다. 그 노래를 듣고 우리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세계는 아직 그래도 살 가치가 있는 곳이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해 준 아라이에게 “고맙습니다”는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답례의무를 느꼈기 때문에 CD를 구입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 노래를 듣고 나서 15년이 지나고 나서도 이렇게 “그 노래 참 좋다”는 문장을 쓰고 있는 것이다. 증여란 다름 아닌 이런 것이다. 즉 증여는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운동이다.
배움은 선생과 제자의 내 딛음으로부터
우치다(2015)는 그의 교육론에서 가르치는 사람은 일단 수요(예컨대 배움)가 없는 상태에서 여하튼 가르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교육은 먼저 수요가 있어서 그것에 대해서 “네 이것이 당신이 찾는 것입니다”라고 내어 놓고 그것을 대가로 뭔가를 받는 것이 아니다. 교육은 상품거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무상의 증여로부터 시작한다. 배우고 싶은 사람이 없어도 “나는 꼭 가르치고 싶은 것이 있다”는 사람이 어쨌든 가르치기 시작한다. “듣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지 가르쳐주겠습니다.”는 가르치는 쪽의 강한 한발의 내 딛기가 있고나서야 교육은 비로소 기동한다. 먼저 가르치는 쪽의 ‘가르치고 싶다’는 내 딛기가 있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배우고 싶다’는 학생 측의 내 딛기가 있다. 가르치는 쪽의 내딛기와 배우고 싶은 측의 내딛기가 만났을 때 비로소 교육은 성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교육자인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예컨대 “자 그러면 이 선생님에게 배워 볼까!”라고 배우는 쪽이 생각하였다고 해서 절대로 무리하게 손을 잡고 끌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선생이 ‘가르치고 싶다’고 말하고 한 발 내딛기를 할 때, 학생이 뭔가 배우려는 반응 같은 것을 보인다고 해서 그/그녀를 강제로 끌어서는 안 된다. 그것 보다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정녕 배우고 싶으면 미안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결단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배우는 결단만큼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쪽이 ‘배우지 않으련?’ 하고 먼저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야 한다. 그건 아주 중요하고 필요한 행위이다. 그런데 “그러면 나는 당신의 제자가 되어서 당신으로부터 배우겠습니다”는 배우는 쪽이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서 사제관계가 성립되려고 한다고 치자. 하지만 그럴 때조차도 가르치는 쪽은 경계선의 이쪽에 서서 지그시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마지막 한 걸음이 남은 상황에서는 학생이 자기책임으로 그리고 자기결정으로 경계선을 넘어서 들어오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이렇게 교육에 대한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증여의 메커니즘에 대한 선철들의 통찰력 있는 고찰이라는 선물에 대한 반대급무의무의 발로이다.
'책 > [책]좋은 글은 심금을 울린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경민 - 어디로 갈 것인가? (0) | 2016.06.01 |
---|---|
박동섭 - <사후적 지성>과 <사후적으로 스토리를 입히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0) | 2016.06.01 |
[박동섭] 내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 4. 증여로서 교육 고쳐보기 (0) | 2016.05.26 |
[박동섭] 내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 3. 증여의 의미를 고찰해 보았을 때 부각되는 것들 (0) | 2016.05.26 |
[박준규] 학교를 잘 가동시켜 세상을 바꾸자? (0) | 2016.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