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방랑자
2009년 임용을 기대하며 - 1. 자기 길에 대한 두 가지 인식 본문
1. 자기 길에 대한 두 가지 인식
누구나 자기의 길을 간다. 누군 자기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가기도 하고, 누군 그 역동적인 생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살아가기도 한다.
자기 길에 관한 이분법
전자는 자부심에 차 있는 사람이고 나의 주체성만 인정할 뿐 타인의 주체성은 인정하지 못하는 것임에 반해, 후자는 그 둘 사이의 주체성 가운데 미묘한 틈 사이를 활보한다. 그래서 얼핏 보면 전자가 삶을 주체적으로 활달하게 사는 것 같고 후자는 흐물흐물 휩쓸려 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 따지고 보면 전자야말로 무언가를 부여받았다는 소명론을 지닌 운명론자에 가깝고 후자는 거대한 생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해가는 우연론자에 가깝다. 그러니 전자는 예상 밖의 일이 생길 때 어떻게든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여건으로 환경을 변화시키려 노력은 하겠지만, 만약 그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운명 운운하며 자포자기한다. 그에 반해 후자는 우연성과 불예측성 사이를 노닐 수 있는 존재로 그런 가운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며 적극적으로 그 상황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자기 길을 가는 방식이 이다지도 다르다. 과연 어떤 방식으로 자기의 길을 만들어갈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어떤 방식으로 자기 길을 만들어 가느냐에 따라 그 삶의 모습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내용을 중심으로 지금부턴 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어떤 삶읠 방식을 지녔고 어떤 방식으로 나의 길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06년도의 자기 길 인식
확실히 2006년도엔 전자의 이미지가 강했다. 하긴 그땐 기독교라는 선민중심의 종교관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내가 아니면 누가 되랴’, ‘난 이미 이걸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라는 생각을 가졌었다. 물론 불합격한 후엔 ‘무얼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극단적인 비극을 미리 경험함으로 현재를 더 풍요롭게 만들자는 전략의 일환일 뿐이었다.
이런 운명론적인 시각으로 나의 과거를 회상해보니, 과거가 하나의 흐름으로 꿰어 맞춰지더라. ‘내가 한문교육과를 오게 된 건 운명이다’라는 전제가 세워지니, ‘어려서 한문을 배우게 됐던 건 운명이다’, ‘수능에서 낮은 점수를 받아 전북대 중국어과에 떨어지게 된 건 운명이다’, ‘시험에 임박한 시점에 여자 친구와 헤어지게 된 건 운명이다’ 등등으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건 내 모든 과거들이 현재의 내 모습을 만들기 위해 복무한 것이며, 그건 또 미래의 내 모습을 위해 현재의 모습도 복무하게 될 거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데 어떻게 내가 시험에서 떨어질 거라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운명을 타고 난 사람에게 시련은 있을지라도 실패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던 내가 첫 시험에서 보기 좋게 떨어지고 말았다. 뭐 구구절절하게 묘사하진 않겠지만 그 충격이 엄청 컸으리란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건 비유하자면, 부활하게 될 거라 확실히 믿고 죽임 당하신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한 것이며, 친구의 결백을 증명하려 내가 사형장에 볼모로 잡혀 있는데 친구가 돌아오지 않아 내가 사형당할 상황에 처한 경우라고나 할까. 그 충격은 예상보다 훨씬 오래 지속됐고 그걸 받아들이기 위해 나는 지난한 고난의 길을 떠나야만 했다.
그 결과 운명론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08년도의 자기 길 인식
그런 과정을 통해 생각이 바뀌었고 지금은 후자처럼 생각하게 됐다. 나의 과거가 현재를 위해 복무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며 지금의 현재가 미래를 위해 복무하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그건 곧 과거는 과거대로 의미가 있으며, 지금은 지금대로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한문교사가 되기 위해 운명적으로 한문을 배우게 됐던 것이 아니라, 한문을 배우게 된 계기로 나의 진로도 서서히 그쪽 방향으로 정해졌을 뿐이다. 선후관계를 명확히 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진심에 가까워질 수 있다.
더욱이 한문을 선택한 것이 나의 의지만으로 가능했던 양 묘사되어 있지만, 전혀 그렇지도 않다. 수능을 보고 나서 전북대 중문과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결국 떨어지게 됐고 어쩔 수 없이 전주대 한문교육과를 선택한 것뿐이다. ‘뿐’이라고 표현되던 현실이 어느새 ‘나의 운명’이라 표현되는 현실이 되었으니, 이 비약이야말로 인간의 합리화를 명확히 보여주는 지표가 아닐지.
이렇듯 내 인생은 지금껏 우연과 우연이 마주쳐 빚어낸 것이다. 그 우연 사이에서 나의 주체성 운운하며 살아온 결과 지금에 이르렀다는 결론이 그래서 나온다. 솔직히 내 자신만 놓고 보면 어느 정도 진로의 확고성이랄지, 일관성이 있었던 탓에 운명론 운운하는 게 그다지 어색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허구성은 여지없이 밝혀진다. 한문교육과에 온 선후배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연하게’, ‘어찌어찌 하다 보니’ 이 자리에 오게 된 경우가 태반이다. 성적에 의해 왔다거나, 주위의 권유에 따라 왔다거나 하는 정도로 말이다. 물론 이런 우연마저도 크나큰 운명이라 여긴다면, 더 이상 할 얘기는 없지만 말이다.
이런 현실을 인지하다 보니 이젠 더 이상 합격에 대해서 운명 운운하며 말하지 않게 됐다. 단지 내 실력이 있으면 당연히 합격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당연히 불합격할 거라 생각한다. 결국 모든 원인은 나에게 있다는 것으로 시점이 변하였다.
하지만 이런 생각 또한 문제였던 것임을 최근에 알게 됐다. 나 혼자 살아간다면 맘먹은 대로 될 테지만, 관계성, 즉 주체와 주체의 충돌 속에 살아간다면 내 생각만 가지고는 언제나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만 열심히 공부했다고 되는 게 아니라, 얼마나 출제자의 의도에 접근했으며 그와 같은 방식으로 공부했느냐가 합격, 불합격을 가른다는 이야기다. 우린 그걸 어떤 희미한 이미지를 지녀 구체성을 이야기할 수 없는 ‘운’이라는 용어로 포괄적으로 표현한다. 그런 흐리멍덩한 개념으로 인해 운이 ‘운명’과 같은 용어로 쓰이기도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운명이었기에 운이 좋아 합격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다. 언제나 운명이 나를 조종할거라 믿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운이란 그런 간단한 게 아니라, 나와 대상의 역동적인 흐름이며 나를 둘러싼 환경의 상호작용을 말한다. 즉, 그와 같이 상호작용이 가능하도록 어느 정도 실력을 어느 정도 실력을 쌓고, 그와 같은 역동적인 흐름이 조성되도록 나 자신을 개방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바로 거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 다음엔 환경이 그에 따라 흐름을 만들어내고 스스로 그 흐름에 따라 노닐 수가 있을 때 운은 운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기회가 왔을 때 잡아라’라는 말을 흔히 한다. 그 기회란 이와 같은 흐름을 지칭하는 거다. 그 기회를 잡고 못 잡느냐는 내가 그걸 기회로 인지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렸으며, 그걸 잡을 수 있는 실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합격’이란 단어도 새롭게 정의해볼 필요가 있다. 합격은 나 자신의 실력이 무르익었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며, 운만 좋았다고 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건 무수한 흐름 속에 내가 어떤 것을 절단, 채취하느냐에 달려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힘과 실력으로 합격했다’기보다 ‘자연의 흐름이 우연하게도 날 합격하게 해줬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런 흐름 사이에 내가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다.
왠지 이렇게 이야기하고 나니, 신비주의적인 색채가 느껴진다. 어렴풋이 보면 혹 운명론과 차이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어차피 나의 의지를 벗어난 것이니, 두 가지는 같은 것이지 않냐?’고 반문할 만도 하다. 하지만 둘의 차이는 분명하다. 운명론의 핵심은 ‘정해진 루트’에 따라 가기만 하면 되기에 나의 의지나 생각보다 그런 ‘루트’가 무엇인지 알려하는데 반해, 우연성의 핵심은 정해진 것이 없이 모든 게 우연적이기에 나의 길을 만들어가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도전하며 자연의 흐름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지에 관심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확연한 차이가 있으니, 나의 길을 가고자 하는 방식도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는 거다.
이야기가 이렇게 길어져 버렸다. 운명론을 벗어난 우연성을 긍정하는 철학을 갖게 되었는데 아직도 내 스스로 그 둘의 차이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장광설을 펼치며 그 둘을 구분하려 하다 보니(물론 이 속엔 지금 내 삶의 철학이 과거에 비해 현격이 달라졌음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길어졌다. 그렇다면 이제부턴 우연성의 철학을 가진 내가 어떤 삶을 살려하는지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자. 지금 하는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2008년 10월 22일의 나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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