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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방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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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齋에 퍼진 墨香(묵향이 좋아 배운다)

gunbbang 2008. 7. 3. 19:13

(실컷 썼다가 다시 다 지웠다. 완전히 맘에 안 드는 건 아니었지만, 너무 피상적인 내용이 써진 것 같아 새로 쓰고 싶은 마음에 싸그리 지워버린 거다. 하지만 지운다고해도 이렇게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는 거다. 고로 써진 위에 또다시 쓰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사실. 이건 축복인가, 저주인가?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애써 과거를 지우려 노력하지 말자. 그럴수록 긴한 여운이 되어 더 생각날 터이니. 그게 지금에 충실하며 그렇게 자연스레 덧씌워지도록 놔두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 그럴 때 삶은 과거로 회귀하려 하지도 미래를 희구하려 하지도 않고, 바로 지금의 현재에 안착하게 될 것이다.)

 

 

 

서재, 책이 가득 찬 책장에 기대어 책을 읽는 것도 나름 운치가 있다. 나도 서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늘상 생각해왔었는데, 지금은 그 꿈을 반쯤 이뤘다. 책장에 책이 가득 꽂힌 나만의 방이 서재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활용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건 맘이 아프다. 꿈을 이루었다고 좋아할 게 아니라, 그 차후까지도 고민해보고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신경 써야 할 것이다. 무언가 꿈을 이루는 게 좋은 게 아니라 그 꿈이 지속되도록, 그런 대안을 유도하는 게 더 중요할 테니까. 그리고 더욱이 내가 서재를 만들고 싶었던 주요 이유는 독서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책들을 읽으며 나의 꽉 막힌 한계를 넘어서고 싶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나의 서재는 80% 성공적이리라. 책을 사서 읽다보니, 자연히 많은 책을 읽게 되었고 덩달아 서재도 점차 확대되게 되었으니까. 이런 걸 우린 꿩 먹고 알 먹고라고 한다. 새로운 환경은 새로운 인연을 부르고, 새로운 인연은 다시 새로운 환경을 부르는, 이 참을 수 없는 놀라운 순환의 고리란. 그 고리에 들어가는 작은 변화를 통해 결국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는 거다. 이름하야 毫釐之差 千里之繆이다. 이 선순환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나라는 존재를 구축하고 지축이 뒤틀렸다해도 크게 틀리진 않으리라. 우선 나란 존재의 무수한 변화 가능성을 알게 되었고, 공부가 주는 능동적이며 생기 가득한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그에 덩달아 타인을 보는 눈도 더 이상 일차원적이 아닌 다차원적으로 변했다. 이쯤 되면 지금의 나는 06년도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작은 엇나감이 크나큰 차이를 낳는다라는 문장이 이쯤 되면 더 이상 뻥!으로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와 같이 임용에 대한 배치도 뒤바꾸려 한다. ‘서재를 만들고 싶어라고 했더니 서재가 만들어진 게 아니라, 그저 읽고 싶은 책들을 하나하나 사서 읽다보니 어느새 서재가 만들어진 것처럼 임용이 되고 싶어 시험공부만 했더니 합격하는 게 아니라, 그저 하나하나의 공부를 충실히 해서 실력이 오르다보니 저절로 합격이 되는 거다. 어찌 보면 이건 선후의 순서만을 교묘하게 뒤바꾼 하찮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제대로 본 것이 아니라 일면만 보고 판단한 것에 불과하다. 왜 그런가? 그건 근본적으로 왜 공부하는가?’란 물음에 대한 대답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전자는 임용에 합격하기 위해라고 대답할 것이고, 후자는 공부가 재밌어서, 내 삶에 비전을 제시해주기에라고 대답할 것이다. 전자의 공부는 수동적인 성격을 띠며 혹 속성 과정이 있다면 거금을 들여서라도 거기에 전심 투지할 것이다. 하지만 후자의 공부는 능동적이며 속성을 위한 공부보다 진득하게 자기 실력을 쌓아갈 수 있는 과정을 밟을 것이다. 이 차이는 일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결과는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이다. 현실적으로 전자가 먼저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꿈의 나래를 활짝 펼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무언가를 이뤘다 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누구 말마따나 잠시 행복’, ‘긴 불행의 시작일 뿐이다. 자기 스스로가 공부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데 어떻게 아이들에게 공부의 즐거움을 가르칠 수 있으며 미래에 대한 꿈도 없이 어떻게 지리한 나날들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저 자신이 그래왔듯 수동적인 모습, 순종하는 모습만을 강요할 뿐일 것이다. 이에 반해 후자는 임용고시의 합격이 혹 늦어질지도 모른다. 뭐 그게 늦어진다고 해서 후자에겐 별로 영향을 끼치진 못하겠지만, (후자에겐 어느 인생의 순간이건 기회 아닌 때가 없으며 공부 아닌 때가 없기 때문) 그렇다고 운명론에 사로잡혀 비관하지도 않으리라. 그저 주어진 현실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으로 삼을 것이니까.

 

어떤 과정이건, 그는 거기에서 최대한 만족하며 삶을 보낼 것이다. 그렇게 지금, 여기를 축복하고 공부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으니, 그도 언젠가는 당연히 합격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합격한 후에 그에겐 불행이 찾아오기보다 행복이 찾아올 거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정반의 현실이 일어난다. ‘늘 행복’, ‘잠시 불행’. 이것이야 말로 후자의 삶의 패턴이며, 그에 따라 학생들과의 관계도 점차 능동적이며 활발하고 친근하게 전개될 것이다. 여기서 정말로 주의하며 봐야할 부분은 바로, 공부에 대한 기본관념이다. 정말 즐기면서 하기를, 그런 행복으로 살다보니 자신이 꿈꿨던 것이 현실이 되기를, 공부는 삶의 비전 뿐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도 탐구하는 최고의 향연이 되기를.

 

요즘 책들은 먹이 아닌 잉크로 쓰여 진다. 그런 까닭에 책에선 더 이상 묵향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린 더 이상 서재에서 묵향을 맡을 수 없다는 말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책에서 나지 않는 묵향을 과연 어떻게 나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너무 보채진 마라. 책이 할 수 없으면 사람이 하면 되니까. 겉으로 뿌린 향수는 순식간에 날라 가 버리지만 인간의 내면에 깃든 글의 자취와 향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속에서 은은히 풍겨오는 묵향은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줄 것이다. (위의 사진) 서재에서 묵향이 난다고?? 그건 바로 정이현씨의 은은한 향기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