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방랑자
2009년 임용을 기대하며 - 2. 합격이란 ‘허공의 한 조각을 잘라오는 것’이다 본문
2. 합격이란 ‘허공의 한 조각을 잘라오는 것’이다
2008년도를 기점으로 내 생각엔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그만큼 임용에서 실패했다는 사실은 나의 생각을 뒤집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생각의 변화는 파도처럼 여러 관념들을 뒤바꾸어 놓는다.
합격에 관한 생각
그 중 하나가 합격에 대한 생각이었다. 만약 이번 시험에 합격한다면, 난 나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자연이 날 합격시켜줬다고 여길 것이다. 이런 생각 자체가 확실히 ‘합격’이란 제목의 일기에서 얘기했던 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 일기에선 나의 실력만 배양되면 당연히 합격할 거라 본 반면, 여기선 그 외의 요소도 고려한 것이다. 내가 교사가 된다 할지라도 그건 우연한 일이라 생각하며 생의 흐름 중 일부에 동참한 것일 뿐이란 깨달음이다. 즉 언제고 변해가는 존재로서의 나만 존재할 뿐, 고정된 내 자신은 없다는 얘기다. 어디에 누구에 접속하고 어떠한 존재로 생성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고로 합격이란 하나의 과정도 새 흐름에 동참할 수 있느냐의 의미만 있을 뿐, 내 삶을 좌지우지할 엄청난 의미가 있는 건 아니란 이야기다. 그 흐름에 동참하지 못한다 해도 또 다른 흐름이 날 향해 밀어닥쳐 올 것이다. 언제나 삶은 물 위에 뜬 부표처럼 흘러다닐 수밖에 없다.
변한 인생관
합격에 대한 인식이 변한 것과 함께 인생관에도 일정 부분 변화가 생겼다. 과연 어떤 부분이 변했는지 다음 글을 읽어보며 나 자신의 모습을 반추해보도록 하겠다.
子曰:“君子無所爭, 必也射乎! 揖讓而升, 下而飮, 其爭也君子.” (八佾 7)
군자의 일상 행동 역시, ‘子曰:“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里仁 10) 꼭 해야만 한다고 고집 부리지도 않고, 또 절대 안 된다고 쌍지팡이 들고 나서지도 않으며, 단지 정황의 뜻에 맞춰 행동할 뿐’이니, 따라서 ‘다툴 거리조차 없는 것’이다. 그 나의 길이란 애초에 虛 속으로 길을 내는 것이요, 空 속에서 결을 찾는 것이요, 無 속으로 접속하는 길일진대, 그 어찌 “군자가 남과 경쟁할 것”이 따로 있으랴. 그 나의 길을 만들어 좇기도 인생은 짧은 것을
뭐 나도 애초에 누군가와 경쟁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어찌 보면 나와의 싸움일 뿐이다. 무뎌지고 ‘이쯤하면 되겠지’라는 안일한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나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나의 길을 가려하는 것이다. 남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던 저자의 마음이 그래서 와 닿는다.
하지만 나의 확고한 신념만을 가지고 덤벼들어 나의 길을 만들려고 하면 넉다운되게 마련이다. 세상 모든 것들이 내 맘과 같을 순 없다. 날카롭게 세운 칼날이 자신 안에서 이룩된 것이라면 그게 세상에 나아가선 닳고 닳아 칼날은 무뎌지고 전혀 다른 쓰임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나만의 생각은 나의 독단이며 그것은 소통의 흔적이 아니라 나의 고집이나 편견이 만들어낸 모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다음 글은 삶의 혜안을 제시해 준다.
‘(바로 윗 글에 이어지는 내용) 어디선가 현대 일본의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의 연주회를 듣고 난 감상을 이렇게 매듭짓고 있었는데, 꼭 이 대목에 참고할 만하다.
최고의 곡들은 작곡되지 않는다. 그것은 허공을 한 조각 잘라오는 것이다(21쪽) 윤종권 『도올고신』
허나 어디 작곡만이 그러하랴. 모든 ‘길 찾기’의 궁극이 다 “허공을 한 조각 잘라오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터이니, 이 길을 가는데 남과 다툴 겨를이 있을 턱이 없기 때문이다.
-배병삼, 『한글세대가 본 논어』, 문학동네, 2002년, 132쪽
최고의 곡들, 그건 누구나 인정하는 명곡이다. 그런데 그런 곡들이 누군가에 의해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 있는 무수한 조각 중 한 조각을 끄집어 내는 것일 뿐이란다. 어떻게 보면 작곡자는 그걸 포착해낸 존재에 불과할 뿐 실질적인 주인일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자기의 길에까지 저자는 확장하고 있다. 그 길이란 나를 통해 발현된 어떤 것일 뿐, 내가 만들어 가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물론 나를 통해 구현되기까지 내가 포착해야 하고 그게 발현될 수 있도록 나의 의지가 개입되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하게 봐야 할 부분은 주객전도가 된 현실이다.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 길을 가는 주체이고 환경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객체로 여겨졌으나, 여기선 오히려 환경이 주체이고 그게 발현되는 통로로만 나를 사용한다고 하니, 난 객체로 전락해버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객의 입장이 확 바뀌었으니, 이 글을 읽는 독자의 마음속에 불편함이 어리는 것도 전혀 어색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 이런 현상이 초래된 것이며 이 말이 정당성을 갖게 되는 것일까?
그건 누누이 말했다시피 나 자신의 관계성의 확장에서 비롯된다. 나 혼자만 사는 게 아니라 타인과 함께 살아가며, 혼자 살아가는 와중이라 하더라도 우린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자연-나-너’의 삼중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으니, 나의 의지 못지않게 ‘너의 의지’, ‘자연의 의지’에 신경 쓸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런 서로의 의지들을 잘 융합할 수 있을 때 삶은 풍요로워진다.
그럼에도 사람은 자신만의 생각으로 세상을 살게 마련이다. 나만의 주체적인 인간인 척하려 하는 거다. 그래서 무참히 ‘너의 의지’, ‘자연의 의지’를 꺾어 버린다. 그렇게 하다 보니 삶은 알게 모르게 꼬일 수밖에 없고 자기의 의지와는 다르게 진행되는 삶을 보며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다. 최고의 곡들이 그와 같이 작곡되는 게 아니라 발현되는 것이듯, 자기의 길이란 것도 나와 자연의 의지가 마주쳐 이루어낸 결과라는 것이다. 서로 간에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결과물로써의 내가 걷고 있는 이 길, 그렇기 때문에 내가 교사가 된다면 그건 나를 통해 발현된 어떤 자연의 의지라 볼 수 있는 것이며 그런 우연성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어떤 의지들이 어떻게 마주쳐, 어떤 스파크를 만들어낼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만의 길
‘MY Way’ 나의 길로 풀이되는 이 말은 꼭 확정된 나의 길이 있는 것만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하지만 여기서의 길은 ‘길이란 걸어가다 보니 만들어진다(道行之而成)’에서 말하는 길과 같다. 즉, 내가 걸어갔기 때문에 만들어진 나의 길, 어떤 길을 만들어가게 될진 모르지만, 나와 접촉하면서 만들어질 길. 그렇기 때문에 나의 길이란 타인의 길과의 차별성, 차이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차이가 아닌 개별성으로 만들어질 뿐이다. 바로 그러한 길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 어떤 조각들을 잘라 와서 나의 길의 소재로 쓸 것인지는 나에게 달려 있다.
1차 합격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1차 합격에 대해 써보려 한다. 당연히 실제로 경험해보지 않았으니, 어디까지나 인상적인 비평에 머물 수밖에 없다.
오늘의 주제는 ‘1차 합격 후 2차에 떨어진 경우, 그건 행복인가, 불행인가?’하는 거다. 자기의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측면에선 행복일 거다. 그만큼 더 많은 지원과 지지를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건 분명히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다. 거기서 만족하고 머뭇거리기도 하며 더 큰 기대와 불안으로 자신의 페이스를 잃기도 할 터다. 그것이 불행이다. 물론 아예 낙방한 것에 비하면 나을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선 오히려 그것만도 못하다고 할 수 있다. 1차 합격은 ‘기회’의 또 다른 명칭이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잡아야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그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나의 여건이 충분히 갖춰져 있어야 한다. 이미 ‘nobody’란 제목의 일기에서 밝혔듯이 그걸 잡을 만한 온축된 내공이 있을 때에만 잡아낼 수 있어야 한다. 당연히 그런 실력이 뒷받침이 안 되면 기회는 놓칠 수밖에 없다. 고로 최종합격까진 진정한 자신의 실력을 어느 정도 갈고 닦았느냐가 관건이며 얼마나 피땀 어린 노력을 했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그렇다면 1차 합격은 ‘기회의 주어짐이다’로 말을 수정해야 할 거다. 과연 그런 기회가 이번에 나에게 올 것인가? 온다면 보란 듯이 잡아내어 ‘놀라운 신인이 등장했습니다 Wondergirls’라고 하는 것처럼 그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인가? 더 열심히 노력해야만 한다(이렇게 쓰고 나니 꼭 최종 합격을 한 사람은 엄청 대단한 사람인양 서술해 놓은 저의가 읽힌다. 그러나 그건 합격과 불합격의 단순 비교에서나 그러할 뿐 최종합격을 했다 해도 엄청 대단한 건 아님을 명확히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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