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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가능성

gunbbang 2009. 3. 18. 21:10


내 절친한 친구 백진규의 작품.. 맘에 든다~

 

"告子曰 不得於言 勿求於心 不得於心 勿求於氣 不得於心 勿求於氣 可 不得於言 勿求於心 不可(맹자 고자 上 2) - 고자는 "말에서 얻지 못하였거든 마음에서 구하지 말고 마음에서 얻지 못하였거든 기에서 구하지 말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나(맹자)는 '마음에서 얻지 못했으면 기에서 구하지 말라는 말은 옳지만, 말에서 얻지 못했으면 마음에서도 구하지 말란 말은 옳지 않은 거 같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나타난 맹자의 관점으로 윗 쪽 그림을 '소통'이란 관점을 풀어본다면?

 

  고자는 마음과 말이 불일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맘에 없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건 본심이 아닐 수도 있는 탓에 말 자체만 고치면 된다는 거다. 이렇게 된다면 거짓말하는 사람에게 우린 인간성, 도덕성 운운하는 비판을 할 수 없게 된다. 그 사람의 마음은 한없이 착하고 때때로 거친 말이나 거짓말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에 대해 맹자는 반대한다. 언어와 마음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본 것이다. 어떤 말을 했을 경우, 그 말 속엔 알게 모르게 그 사람의 마음이 들어 있다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맹자는 그 말을 제대로 파악하여 마음까지 알고자 하는 ‘知言(말을 통해 그 마음을 안다)’을 강조했던 것이다. 맹자는 “사랑해”라는 말을 통해 ‘나 용돈 필요해’. ‘내 부탁 들어줄거지’와 같은 의중을 간파해 낼 수 있다고 보았다.

 

  난 맹자의 논리에 일정 부분 동의한다. 즉, 언어의 이면에 담긴 마음을 파헤치려 했던 그 마음을 동의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맹자가 간과했던 것은  ‘言’을 통해 ‘心’에 이를 순 없다는 것이다. ‘言’이 ‘心’에 이르는 기초를 제공할 진 모르지만, 언어에 얽매이는 순간 우린 속마음에 나아가긴커녕 삼천포로 빠질 수밖에 없는 거다. “사랑해”라는 말 속에 ‘나 용돈 필요해’라는 의중이 담겨 있음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言’을 해체하고 ‘心’으로 다가가려는 적극성과 유연성이 필요할 뿐이다. 이걸 이를테면 ‘捨筏登岸(언덕에 올랐으면 배를 버려야 한다)’이라 할 수 있다. 어느 순간까지는 ‘言’이 필요하지만, 그 순간 이후엔 그 ‘言’을 버리고 나아가야만 비로소 ‘心’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 고로 난 ‘言=心’의 논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言이 心에 있어서 충분조건이기보다 일정 부분만 있으면 되는 필요조건일 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위의 그림은 명확하다. 겉으로 드러난 형상은 천사이다. 이건 ‘言’의 비유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그걸 움직이는 실체는 악마다. 이건 ‘心’의 비유이다. 이럴 수가~~~ 완전 쇼킹하게도 이런 극단적인 현실이 펼쳐져 있다. 정작 이런 사람을 진짜 만난다면 우린 어떤 미소를 지을까? 정작 이런 비유가 자신의 모습이리란 생각을 하긴 할까? 言心불일치의 상황. 이런 상황을 대하며 우린 어디에 더 비중을 두는가? 천사에, 아니면 악마에. 천사만을 보며(언어에만 집착하며) 사는 사람은 세상을 일면적으로 생각하며 사는 바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우린 어떻게 천사라는 외형을 통해 악마라는 본질을 알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이야말로 ‘mission impossible’이자 ‘무모한 도전’처럼 보인다. 맹자처럼 ‘천사’에만 집착해서는 결코 ‘악마’에 이를 수 없다. 거기엔 이미 ‘천사=선’이라는 선입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여기에서 포기해선 안 된다. 선과 악은 결코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전의 앞뒷면처럼 동일성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 그림에서 커튼 앞뒷면에 천사와 악마가 배치된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리라. 즉, 천사는 악마를 알게 하는 단서이자, 방해물이란 사실이다. 그런 이중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우린 눈 앞의 현실에 현혹되어 늘 그릇된 판단을 하며 삶을 저주로 내몰 수밖에 없다.

 

  상대방을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우선 그 사람이 말하는 언어에 집중하라. 단지 조건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성향의 일면을 파악하는 데까지만 유용하다는 거다. 그 다음엔 그 언어를 떠나 상대방의 미세한 행동이나 언어 외적인 것들에 신경의 촉수를 뻗어라. 그 순간 비로소 그 사람의 진의가 마음에 와닿을 것이다. 정말 필요한 일은 그런 노력이 평생 계속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통이란 그와 같은 노력이 얼마나 마지막까지 계속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