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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방랑자

☼ 14.04.19 문학의 오마쥬(조병화의 '의자') 본문

직장/학교 수업

☼ 14.04.19 문학의 오마쥬(조병화의 '의자')

gunbbang 2014. 4. 19. 11:20

 

작품 읽기

의자

조병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 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읍니다.

 

 

 

 

네 컷 만화로 표현하기

 

 

이건호

 

 

 

임승빈

 

 

 

 

김민석

 

 

 

오현세

 

 

 

송지민

 

 

 

 

 

 

이야기로 표현하기

 

 

이건호

 

 

우선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나의 이야기를 하고 가겠다.

2012년 나는 대안학교에 갔다. 찐따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진도 아니고 그냥 평범하기 한데 가끔 사고치는 학생이었다. 그저 친구랑 놀기가 좋았고 공부랑은 점점 멀어져 성적은 점점 낮아졌다. 결국 엄마는 날 대안학교로 보냈고 시골대안학교랑 도시형을 다닐까 하다 김태원을 바탕으로 한 <락락락>을 보고 기타를 배우고 싶어 도시형을 선택했다. 그리고 3월 처음으로 기타 선생님을 만났고 과천에서 배웠던 것보다 실력이 더 빨리 상승했다.

그러던 중 기타선생님이 따로 학원을 세우셨고 나는 기타쌤께 더 배우고 싶어 학원을 바꿨다. 이것이 고마우셨는지 쌤은 박이 약했던 나를 다른 학생들보다 훨씬 더 많이 도와주셨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아빠와 싸우고 기타학원에 왔다. 토요일날도 기타학원에 갔던 나는 어쩌다가 쌤과 아빠 얘기를 했다. 그때 하필이면 고장났던 내기타를 고치면서 말이다.

싸우게 된 계기는 이것이다. 4월달 검정고시 시험을 치뤘다. 너무나도 피곤한 나머지 엄마한테는 잘봤어라는 한마디만 하고 아빠한테는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자버렸다. 아빠는 굉장히 화가 났었고 난 피곤해 말을 못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뭔가 나도 화가나기 시작했고 대화하기 싫다라는 마음이 들었고 아빠와 크게 싸운 것이다.

이것을 들은 기타쌤은 나에게 아빠께 사랑해요라는 말 한마디는 해봤냐면서 나와 얘기를 나누었다. 냉정히 따지면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아빠께 사과 문자를 하라고 했고 망설이다 쌤 말대로 문자를 보냈다. 그때 쌤이 나에게 처음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평소 기타쌤 레스폴을 좋아했었고 쌤이 망설이다가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레스폴 갖고 싶어?’ 나는 걍 우스갯소리인줄 알고 있으면 좋죠하며 넘어갔다. 그러더니 쌤이 갑자기 내 기타가방을 잡더니 레스폴을 넣어 주셨다. 나는 당황해서 쌤 뭐하시는 거예요?하니깐 쌤께서 내 기타랑 니 기타랑 바꾸는 거다하고 내가 평소 탐내던 레이니 LG12까지 주시면서 말했다.

아버지와 친하게 지내라고 그리고 쌤이 날 집으로 보냈고 나는 울면서 어깨엔 레스폴 한손엔 엠프를 들며 집으로 갔다. 나도 꼭 언젠가 기타쌤처럼 뜻이 있는 누군가에게 기타를 주고 싶다.

 

레이니 LG12까지 아낌없이 주시던 기타쌤. 

 

임승빈

 

 

의자(일기)

 

피곤한 몸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눈을 감을 정도로 익숙한 길이었다. 출구로 나오니, 내가 타려는 3413 버스가 나왔다. 지금 상태는 벤치에 앉으면 잠에 들 정도로 피곤했다. 몸은 움직이기 귀찮다고 했지만, 내 발은 사람이 가득한 3413으로 갔다.

어차피 다음 버스를 타려면 10분정도 기다려야 하며, 사람이 많을 것 같기 때문이다. 신경이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울 때, 몽촌토성역에서 한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직히 내가 앉고 싶었다. 하지만, 옆 사람이 갑자기 밀치고 들어와 앉았다. 하지만, 평소의 나의 모습이 겹쳐져서 그냥 참기로 했다.

올림픽공원 정류소. 허리 굽은 할머니가 버스에 탔다. 몸이 불편하면 차를 타거나 택시를 타면 되지 않았을까?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버스기사가 할머니를 위해 자리를 양보해주라고 했다. 누구도 양보해주지 않았다. 결국 올림픽공원에 갈 때까지 사람들이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올림픽공원역. 내 앞에 있던 한 할머니가 자리를 떴다. 나는 솔직히 앉고 싶었지만, 자리를 양보했다. 할머니는 고맙다고 하며, 자리에 앉았다. 날씨는 쌀쌀했지만, 마음이 훈훈했다. 남을 위해 자리를 내준 내가 자랑스러웠고, 버스기사도 할머니를 위해 자리를 내어 주라고 말한 것도 훈훈했다.

 

자기 자리만 챙기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닌, 남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이 되자.

 

 

 

김민석

 

시나리오 1(준 것)

20131월쯤에 외할아버지가 외로우실까봐 할머니 장례식을 치르고 오던 길에 잠시 들린 식당에서 별이와 달이를 처음 만났다. 내가 예전에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자주 말했지만 엄마는 개털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핑계로 강아지를 키울 수가 없었다. 이 식당에서 별이를 처음 만났을 때에도 우리가 별이를 데려올 줄은 몰랐다. 식당 아주머니는 강아지가 갖고 싶다면 가지라고 말씀하셨지만 엄마가 반대하실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포기했는데 다음 날 엄마가 별이와 달이를 데려오셨다. 아직 1달밖에 되지 않았고 외할아버지가 강아지를 키울 것을 허락하실지 몰라서 일단 우리 집에서 키우기로 하였다.

수컷은 달이, 암컷은 별이라고 이름을 짓고 우리 집에 왔을 때 우리들은 밖에서 털이 많이 더러울까봐 목욕을 시켰는데 목욕을 시킨 후 별이와 달이가 너무 떨어서 걱정하였지만 침대에서 곤히 잤다. 별이를 키우다 보니 처음에는 손바닥만하던 강아지가 2달이 지나자 몸도 커지고 달이와 함께 서로 쫓고 쫓기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아직 배변훈련을 시키지 않아서 집 안 곳곳에 물똥과 오줌을 싸서 우리는 휴지와 EM을 가지고 항상 대기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달이가 똥을 싸는데 똥이 나오지 않았다. 한참동안 달이가 힘을 줬더니 결국 뭐가 나오기는 나왔는데 흰색 회충이었다. 기생충을 처음 봐서 너무 놀라고 무서웠다. 내가 귀여워했던 강아지의 몸 속에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이 징그러운데다가 무서웠다. 몇시간동안 내 방 밖으로 나가지 않고 안에서 조용히 음악만 들으면서 게임만 했다. 결국 병원에 데려가니 밖에서 회충에게 감염된 상태였고 약을 먹이면 나아질 거라면서 약을 처방해 주셨다. 달이와 별이에게 약을 먹이고(별이한테는 회충이 나오지 않았다)며칠 후 달이와 별이는 괜찮아졌다.

이렇게 1달정도를 더 살았는데 달이와 별이가 너무 시끄러워서 결국 달이나 별이중에 한 마리를 다른 곳으로 보내기로 했다. 별이는 똥과 오줌을 가려서 우리 집에 별이를 두기로 했고 달이는 해담이의 친구에게 분양해주었다(지금 같이 있었다면 별이도 활기차고 재미있었을텐데 조금 아쉽다).

이렇게 달이를 보내고 별이만 키우게 되었고 우리는 달이가 있을 때보다 별이에게 더 신경도 써주고 돈을 써서 병원도 가고, 별이 집도 사주고, 간식같은 것들도 자주 사주었다.

시나리오 2(받은 것)

20136월 우리는 카자흐스탄에 갔다. 꽤나 오랬동안비행기를 타고 우리들은 카자흐스탄에 도착하였다. 카자흐스탄에서 여러 가지 일정을 다녔고 우리는 산자르의 집으로 가서 잠도 자고 밥도 먹고 엘다르와 만나서 처음으로 관람차도 타 보았다. 나는 산자르의 집에서 지내는 마지막 날 산자르의 노트북으로 평소와 다르지 않게 웹툰을 보고 있었는데 산자르가 나보고  come on 이라고 말하며 오리고 손짓하엿다. 그곳으로 가니 산자르의 가족들이 모두 모여 있었고 나에게 초콜릿(3000), 신발,(25000~35000) 목도리(5000원 상당), 카자의 전통 수통(12000정도)을 주었다.

 

민석이와 산자르가 체스를 두고 있다. 탈디코르간에 머무르는 동안 산자르는 민석이를 진심으로 잘 챙겨줬다.

 

우리가 외울 시 '의자'의 뜻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준다는 뜻을 담고 있다.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생각하다 보면 노숙자에게 적선한 일, 친구에게 무언가를 사주는 비록 가벼운 것들이지만 어떻게 보면 굉장히 중요하고 무거운 것일하고 볼 수 있다.

 

 

오현세

 

생각해보면 내가 다른 사람을 도왔던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 기억이 나지 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지금은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노숙자에게 돈을 주었던 경험을 쓰려고 한다.

 

내가 자양동에 살았을 적에는 주말에 외출을 할 때 마다 구의역에서 지하철을 타곤 했는데, 한번은 계단에서 사람들에게 구걸하던 노숙자를 봤다. 당시 나는 어려서 노숙자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고, 겉모습이 지저분한 노숙자를 동정하기 보다는 더럽다는 생각이 앞서 지나치려고 했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이 그 노숙자의 바구니에 돈을 넣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이 그 노숙자의 바구니에 돈을 넣어주는 것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돈을 내는 것이 규칙인줄 알고 노숙자의 바구니에2000원을 넣어주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노숙자에게 돈을 주는 사람들은 1000원 이상 넣진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매우 아깝다.

 

 

송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