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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방랑자

11.01.16 길을 잃더라도 발길을 돌리지 마라 본문

직장/취업 분투기

11.01.16 길을 잃더라도 발길을 돌리지 마라

gunbbang 2011. 1. 6. 19:52

아침에 중앙도서관 복도에서 청학동에서 같이 일했던 형을 만났다. 몇 번 임용 2차까지 붙었다가 최종에서 떨어진 형이다. 그래서 올해 계획을 물어보니 얼굴엔 침통한 기색이 어리며 작년엔 기간제 교사를 했으니 기회가 다시 온다면 또 하면서 공부해야지라고 하더라. 뾰족한 수가 없어 보였다.

 

 

08년 2월에 2주 동안 청학동에서 훈사를 했다. 색다른 경험이었지만, 다신 하고 싶지 않던 경험이었다.

 

 

 

임용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도둑질만 하겠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여태껏 어떻게든 흘러왔다. 그 흐름에 발맞춰 용케도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건 어찌 보면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었으며 노골적으로 말하면 편한 대로를 따라온 삶이었다. 고민도, 걱정도, 심지어 자신의 요구도 필요 없었다. 개인의 小史보다, 운명의 中史 또는 가족의 大史를 따른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머물 수밖에 없었다. 아깝다는 전제 하에 좌충우돌 하지 않고 자기 꿈이라는 기만으로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무시한다. 어차피 들어선 이상 전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 길만을 따라 간다.

 

 

 

고민하는 순간을 미루지 말자

 

나도 거기에서 얼마 벗어나진 못했다. 그건 정확히 악순환이었다. 이도 저도 아닌 시간 때우기. 공부를 하지만 제대로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걸 꿈꾸려 발버둥 치지만 현실에 머무는 소치 말이다. 그러면서 생의 약동함을 누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악순환에서 벗어날 실마리를 찾았다. 형과 나의 차이는 하나도 없지만 분명한 차별점은 있었다. 그건 지금껏 고수해온 길을 계속 가려는 마음과 새 길을 가고자 하는 마음의 간격이라 할 수 있다. 분명한 건 언제든 이런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금 정규직이 되더라도 30년 후엔 지금과 같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미 그 때는 가족도 있고 힘도 부치며 자신감도 줄었을 것이니 지금의 상황에 비할 바가 아닐 거다. 지금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 더 큰 고민과 걱정에 휩싸일 게 뻔하다. 언제든 겪을 일이라면 젊을 때, 나만 걱정하면 될 때 미리 경험해 두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이다.

 

 

 

지향하는 바가 있으면 그리 가면 된다

 

물이 흐르다 방해물을 만나면 어떻게 하는가? 흐름을 멈추는 게 아니라 돌고 돌아서 새 길을 만들며 가지 않던가. 그 길이 어느 순간엔 물길이 될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지금 이 순간은 그와 같은 새 길을 만드는 순간일 것이다. 지금 고민하고 경험하며 관계 맺는 모든 사람들이 새 길임에 분명하다. 어느 순간이고 어느 것이건 헛된 것이 없다고 할 적에 지금 이 순간은 앞으로 나의 30년 이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순간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기백이 형의 마음과는 달랐던 것이다.

지향하는 바가 있으면 계속 가면 된다. 길을 잃었다 할지라도 계속 가면 어느 순간 길은 통한다. 함열에서 논산으로 가는 길. 그 땐 길을 잃었었다(해당 글보기). 하지만 방향을 잘 잡고 걸어갔더니 어느새 강경에 다다랐고 논산에 도착했다. 그 순간 느꼈다. 길을 잃는다는 건 애초에 있을 수 없다는 걸. 방향만 맞다면 어떻게든 목표한 지점에 이르게 된다는 걸 말이다. 그렇기에 걷고 걸을 뿐이다.

 

 

참된 스승을 알아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간단할 수 있다. 가르치는 사람이 남을 위해 가르치는가 자신을 위해 가르치는가, 남을 섬기기 위해 가르치는가 섬김을 받기 위해 가르치는가, 남을 해방시키기 위해 가르치는가 남을 자기에게 묶어 놓기 위해 가르치는가, 한 마디로 타인중심적인 가르침인가, 자기중심적인 가르침인가를 알아보면 된다. -또 다른 예수, pp3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