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방랑자
11.08.18 웃자라지 않기 본문
봄철에 비가 자주 내려 보리나 밀이 많이 웃자랐습니다. 보기에는 키도 크고 열매도 많이 달려서 이대로만 간다면 풍년을 기약할 수 있을 듯하지만 아시다시피 웃자란 보리나 밀은 대가 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쓰러지고, 어떤 때는 모개 무게에 못 이겨 제풀에 모로 눕기도 합니다.
-윤구병,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pp 28
겉보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실상 내실은 없다. 그래서 현혹되기 쉽고 그게 간혹 남에게 그렇게 인식되기 하여 자신도 ‘잘 자랐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런데 조그만 시련이 닥쳐도 쓰러지고 자신이 맡은 직책을 못 이겨 제풀에 꺼꾸러지기도 하니, 이럴 경우엔 누굴 탓해야 할까. 그렇게 착각하도록 만든 환경을 탓해야 하나,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자신을 탓해야 하나?
이런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노자가 이야기한 虛의 문제는 단순한 사변적인 언어가 아닌 깊이가 있는 철학적 언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허를 알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날카로운 작두날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의 긴장과 직시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 그리고 세상을 향한 끊임없는 질문이 계속될 때에만 虛를 실천할 수 있다. 그런 곳이야말로 생의 에너지를 좀 먹지 않고 창조적 에너지로 자유분방하게 일할 수 있는 곳이지 않을까. 웃자람은 그와 같은 것을 거부한 자신에 폭력이며 삶에 대한 저주다.
난 웃자랐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기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 스스로에게도 정직하지 못했으며 생에 대해서도 늘 불안해하는 채로 여기까지 이끌려 왔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의지로 왔다고 내가 ‘잘 자란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우습기까지 하다. 취업하겠다고 나대기 전에 정신부터 차려 ‘웃자란 놈’임을 인정할 일이다.
강 건너
비닐 하우스에 켜진 불
멀리서 보면
참 예쁘다.
하지만
저 불은
들깻잎을 못 자게 깨우는 것.
나는 이제 잘라 하는데
저거들은 얼마나 힘들겠노.
인간도 저렇게 당해 봐야
식물의 아픔을 알 거다.
-밀양 단산초 백아르미, 『자연의 밥상에 둘러 앉다』, pp 188
웃자람은 생의 에너지를 갉아 먹고 겉만 그럴 듯하게 자람이다. 아픔을 먹고 성장한 것이니 거기엔 슬픔의 정조, 고통은 나의 힘이란 관념만이 어린다. 생의 기쁨은 없어 초췌한 몰골, 냉정함으로 탈색된 도시화 언어, 음산한 기운을 발산하는 몸짓이 웃자람의 증표라고 할 수 있다. 몸이 컸다고 어른이라고 하지 말며 잘난 척 하지 말라. 그것이야말로 ‘대가 실하지 않’은 가소로움일 뿐이니 말이다.
이건 바로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본격적인 삶에 대한 고민을 하는 지금, 난 바람이 조금만 불려고만 해도 고개라도 떨굴 듯이 심하게 흔들리며 날 거부하는 이야기만 들어도 삶이 끝나는 듯이 좌절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얼마나 ‘대가 실하지 않’은 웃자란 존재인 줄 알겠다.
아픔은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계기다. 아픔을 통해 자랄 수 있다고 한다면, 아픔을 부정적 힘의 추진제로 사용하여 생의 에너지를 갉아 먹으라는 게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고 부족한 부분들을 보충해 가라는 뜻에서 일 것이다. 지금은 나를 더욱 치밀하게 들여다보며 대가 실하도록 만드는 시기임이 분명하다. ‘못 자게 비닐하우스에 불을 켜는 게’ 아니라 ‘잘 자랄 수 있도록 보리밟기(봄철 보리싹이 나와 들뜬 밭을 밟아 다지는 일)하는 것’이다. 얼마나 제대로 이 시기를 보내느냐에 따라 웃자라기도, 잘 자라기도 할 테니.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도망치려 하지 말고 충실히 보내자. 도망치려 하지 말고 충실히 보내자.
▲ 삶은 그래서 다채롭다. 잘 자란 게 잘 자란 게 아니고, 밟으면 오히려 잘 자랄 수 있다. 그게 인생의 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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